기술과 예술의 만남
EMK뮤지컬컴퍼니의 첫 창작뮤지컬 <마타하리>는 개막 전까지도 스타 배우와 해외 유명 제작진의 참여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공연이 개막한 지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국내 제작진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무대다. 무대 위 육중한 세트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흐르듯이 매끄럽게 전환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무대가 가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오토메이션(전자동) 시스템에 있다.
오토메이션 시스템이란 무대 크루가 그때그때 수동으로 세트를 움직이는 대신, 기계장치를 이용해 세트의 움직임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미리 입력해 둔 이동 속도와 위치 메모리 그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수동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정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동시에 여러 가지 세트를 움직여야 할 경우 이러한 기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초기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대신 공연 기간이 길어질수록 크루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마타하리>의 무대는 처음부터 오토메이션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한 무희 마타 하리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처형장에 선 마타 하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오필영 무대디자이너는 이때 마타 하리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바로 이 뮤지컬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기억처럼 비현실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대를 구상했다. 이 같은 무대를 구현하는 데 오토메이션 시스템의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마타하리>의 세트 제작을 담당한 ‘처음무대’의 최인성 대표는 처음에 디자이너에게 해외 업체 의뢰를 제안했다. “디자인대로 무대를 구현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서 해외 업체를 추천했어요. 하지만 해외 업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을 부르는 걸 듣고,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죠.” 국내 기술력으로 완성된 마타하리의 무대에는 26개의 모터와 8개의 키네시스 체인 모터가 사용되었다. 26개의 모터를 하나의 콘솔(전기 기기의 각종 스위치를 한곳에 모아 제어할 수 있도록 한 조정 장치)로 제어할 수 있는 제어 장치 역시 국내 최초로 개발됐다. 이만한 무대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흔치 않다는 것이 최인성 대표의 설명이다. “20년 넘게 무대 제작 일을 해왔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모터와 기계가 들어간 무대는 처음이에요. 군데군데 오토메이션 장치가 안 쓰인 곳이 없고, 세트 물량 자체도 역대급이죠. EMK뮤지컬컴퍼니의 전작 중 가장 물량이 많았던 <엘리자벳>의 전체 세트 무게가 30톤인데 <마타하리>는 70톤에 이르러요.”
그러나 오토메이션 시스템에도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비상시 임기응변이 쉬운 수동 장치와 달리, 전동 장치는 기계가 멈추거나 오작동 하는 경우 공연을 중단해야 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만큼 공연에 들어가기 전 충분한 시연 시간을 가지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타하리>의 무대도 극장에 들어가기 앞서, 경기도 광주의 500평짜리 물류 센터에서 시험 가동 과정을 거쳤다. “무대를 세워놓고 20일가량 음악에 맞춰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마지막에는 배우들도 물류 센터에 들러 리허설을 했죠. 그렇게 어느 정도 메모리를 짜놓고, 극장에 들어와 점검에 점검을 거듭했어요.”
국내 오토메이션 무대 기술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비하면 아직 발전 단계에 있다. 최인성 대표는 관객층이 적고 장기 공연이 불가능한 국내 공연 시장에서는 환경적으로 해외 기술을 따라잡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해외에서는 한 작품을 같은 공연장에서 몇 년씩 공연하기 때문에, 그 작품을 위해 아예 공연장을 개조하기도 해요. 제어 장치도 잘 구축이 되어 있어서, 그때그때 장비를 연결해 쓰기만 하면 되죠. 우리나라에서는 오토메이션 장치의 수요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돈 들여 그런 제어 장치를 개발하려는 곳이 없어요. 하지만 국내 뮤지컬 시장이 활성화된 게 불과 20년 정도인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 해외 기술력을 따라잡은 것도 대단하다고 봅니다.” <마타하리>의 성과가 국내 오토메이션 무대의 새 장을 여는 한 걸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서곡’의 웨이 데크
사다리꼴 모양의 하부 데크는 ‘마타 하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의미에서 ‘웨이(Way) 데크’라고 불린다. 사형장에 선 마타 하리의 기억은 이 길을 따라 그녀 삶의 무대인 물랑루즈로 이어진다. 웨이 데크는 전진과 후진, 회전, 경사 조절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다.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전후진과 회전이 가능한 데크를 선보인 바 있지만, 경사 조절까지 가능한 데크는 국내 최초다. 밑에 설치된 볼스큐류 방식의 리프트 장치 3개가 따로 움직이면서 다양한 형태의 경사 무대를 만들어낸다.
‘서곡’의 천장 세트
사형장 장면에서 네 조각의 세트가 천장에서 내려와 하나로 합쳐지는 것 역시 최초로 선보이는 기술이다. 네 조각 모두 정확히 같은 속도와 각도로 기울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키네시스 체인 모터가 사용됐다. 키네시스 체인 모터는 속도와 위치를 입력해놓고 자동으로 가동시킬 수 있는 체인 모터로, 가동 속도도 일반 체인 모터보다 빠른 편이다. 세트의 앞뒤로 4개씩 총 8개의 키네시스 체인 모터가 쓰였다. 조금이라도 예정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다른 세트가 내려올 때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누구와’의 타워
무대 위에 놓인 10개의 타워는 모터로 움직인다. 모터가 정방향으로 돌면 타워가 무대로 나가고 역방향으로 돌면 다시 들어오는 식이다. 7.6m 높이의 타워는 바닥의 거치대에 고정돼 움직이는데, 아래서 5mm만 흔들려도 꼭대기는 10cm까지 흔들릴 수 있었다. 타워 간의 간격이 약 5cm에 불과해 흔들리며 충돌할 가능성을 염려했지만 막상 가동해보니 타워의 무게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사각 타워 안에는 회전 가능한 원통이 있어, 절반은 물랑루즈의 발코니, 절반은 전쟁터의 참호로 꾸며져 있다. ‘누구와’ 장면에서는 이 원통이 회전하면서 전쟁에 나간 군인과 그들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애틋하게 교차된다. 발코니의 화려한 장식물은 회전하면서 바깥쪽에 쓸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제작해야 했는데, 실제로 회전할 때 원통과 틀 사이의 간격은 약 1cm에 불과하다.
‘내 맘을 조심해’의 국기
마타 하리가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에서는 바닥의 웨이 데크와 공중의 국기가 동시에 회전하면서 무대가 전환된다. 프랑스의 삼색기를 옆으로 돌리면 그 당시 독일 깃발이 되는 것에 착안한 장면이다. 회전하는 국기와 가구 세트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며 긴장감을 유발하는 이 장면 역시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도였다. 회전하면서 국기의 하중이 앞으로 쏠릴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한 번에 무리 없이 작동됐다고.
‘어딘가’의 비행기
1막 엔딩에서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비행기 이륙 장면에는 극장 바튼(조명이나 무대장치를 걸 수 있는 철제 파이프)이 이용됐다. 비행기와 연결된 두개의 바튼 중 하나가 먼저 올라가고, 나머지 하나가 따라 올라가면서 각도를 틀어 수직 상승하는 비행기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2호 2016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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