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가족 오락물로 탄생, <뉴시즈>
옐로 저널리즘 시대
1900년대를 전후로 미국에선 신문들의 가판 경쟁이 치열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당 기관지 같던 값비싼 신문이 무조건 많이 팔아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박리다매의 수익 사업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한 푼이면 살 수 있는 신문이라 해서 일전신문(Penny Paper)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대표적인 신문 재벌이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지프 퓰리처였다. ‘옐로 저널리즘’이란 말도 이때 생겨났다. 기사에 자극적인 내용을 실어 사람들로 하여금 솔깃하게 만들어야 신문은 더욱 잘 팔려 나갔고, 그래서 요즘은 천재지변이나 국가 중대사에나 등장하는 신문의 한 면을 가로지르는 큰 글자 크기의 통단제목(Banner)도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쓰이는 편집 기법으로 통했다. 옐로 저널리즘이란 퓰리처의 아성에 도전하던 허스트가 자신이 발행하던 신문인 ‘선데이 월드’에 옐로 키드(The Yellow Kid)라는 시사만화로 인기를 끌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추구했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서는 이런 미국 근대사에 얽힌 흥미로운 내용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례 중 하나가 <시카고>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마치 썩은 고기를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언론이라기보다는 옐로 저널리즘 시대의 단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재판이 벌어지는 법원 마당에는 ‘록시 유죄’, ‘록시 무죄’라는 각각의 제목이 모두 인쇄된 신문들이 이미 인쇄돼 있다. 이윽고 법정 창문으로 흰 깃발이 펄럭이자 배달부들은 일제히 “호외요!”를 외치며 신문을 팔기 시작한다. 사건의 본질보다 신문의 판매가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대의 풍경인 셈이다. 저질 신문의 경쟁은 훗날 언론의 자정 운동을 가져왔고, 역으로 정론 보도의 욕구도 생겨났다. 그 이름도 유명한 퓰리처상은 마치 노벨이 폭탄을 발명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자 자신의 재산으로 노벨상을 제정했던 것처럼, 퓰리처가 살아생전 신문 전쟁을 통해 쌓은 부를 사후 컬럼비아 대학에 기금으로 기부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뉴시즈>는 바로 그 격변의 미국 대중지에 얽힌 신문 전쟁 시대의 실제 있었던 사건을 처음에는 영화로, 훗날 다시 영화를 무대용 콘텐츠로 탈바꿈시킨 작품이다. 가판(길거리 판매)이 주를 이루던 시절, 신문을 싸게 구입해 약간의 덤을 얹어 돈벌이를 하던 신문 배달부 소년들이, 손쉽게 수익을 올리려 신문사들의 담합을 통해 개별 부수의 가격을 올린 언론 재벌 퓰리처에 대항해 신문 역사상 최초로 파업을 벌였던 역사적 배경이 바로 그것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미국식 문화산업의 아이디어 발굴 공식이 여실히 담겨있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즈니적 윤색
디즈니가 만든 콘텐츠답게 뮤지컬에는 ‘세상은 아름다워라’ 식의 윤색이 등장한다. 퓰리처의 딸 캐서린이 파업을 주도하는 신문 배달부 소년 잭과 로맨스 관계로 발전한다든지, 주지사였던 루스벨트까지 가세해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부류의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원래 진짜 파업을 주도했던 역사 속 인물은 ‘애꾸눈 꼬마(Kid Blink)’라고 불렸던 한쪽 눈이 안 보이는 배달부 소년 루이스 발렛이었는데,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조연급의 캐릭터인 다리가 불편한 소년 크러치로 묘사되는 것도 현실과 사뭇 달라진 뮤지컬 속의 판타지다. 물론, 무대가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고증일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구현된 역사적 사실로의 접근은 다분히 건전한(?) 가족 오락물로 명성을 얻은 제작사의 정체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디즈니가 만들면 인어공주도 되살아나고, 아이다도 윤회를 통해 라다메스와 다시 만난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가 분명해 작품의 주제 의식이 선명해지기도 하지만, 다분히 도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결말은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악재로도 작용한다. 처음 영화가 제작된 당시부터 디즈니의 물건치고는 그들이 추구해 온 세계관이나 역사관에 비해 다소 파격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서 기인된 일이었다. 결국 자본에 저항해 생존을 걸고 파업을 감행했다는 뉴스 보이들의 정신이 해피엔딩의 뻔한 결말에 가려 극적 생동감을 잃게 되고 말았다. 언론학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뮤지컬의 재미는 단연 춤
뮤지컬 작품으로서 이 무대의 가장 큰 재미는 단연 안무다. 어깨 한쪽에 신문을 담는 끈 가방을 걸치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소년들의 춤사위는 그야말로 역동감이 넘친다. 2013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사회를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가 객석 통로로 춤추며 뛰어나오는 <뉴시즈> 출연자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에 드는 배달부는 제게 말해 줘요.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드릴게요”라는 다분히 동성애적 유머 코드가 실린 농담을 노래하는 것도 이들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이미지를 구현해 내는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 작품으로 토니상 안무상까지 받은 크리스토퍼 가텔리는 우리 관객들에겐 <알타보이스>나 <뱃보이>로 익숙하다. 대본은 <라 카지 오 폴>, <킹키부츠> 등으로 유명한 하비 피어스타인이 맡았다. 특히, <헤어스프레이>에서는 걸걸한 목소리의 엄마 에드나 역으로 직접 무대에 등장해 그해 토니상 남우주연상(여우주연이 아니다!)을 받았다. 연출을 맡았던 제프 칼훈 역시 요즘 브로드웨이에서 ‘잘나가는’ 인기 연출가 겸 안무가로 최근 국내에서 월드 프리미어 무대가 열린 ‘마타 하리’를 만든 바로 그 인물이다.
음악은 알란 멘켄이 작사가 잭 펠드만과 콤비를 이루고 있다. 하워드 애슈먼이 세상을 떠난 이후 앨런 멘켄의 선율들은 다소 맥이 빠진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작품은 이들 콤비에게 토니상 음악상의 성과를 안겨줘 화제가 됐다. 거의 주제가격이라 할 수 있는 ‘캐링 더 배너’는 멋들어진 군무와 함께 이 뮤지컬의 상징처럼 통한다.
온주완, 서경수, 이재균, 린아, 최수진 등이 선보이는 무대는 비교적 만족스럽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스타의 무대 나들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이들의 무대 위 케미는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여준다. 사실 ‘진짜’ 볼거리는 따로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바로 뉴스 배달부 전체가 보여주는 군무와 합창이다. 원작이 올라갔던 브로드웨이에서도 어디서 저런 꼬마 배우들을 저토록 많이 잘 섭외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 무대 위 이미지들이 강렬한 뒷맛을 남겨주었다. 우리 무대도 역동성으로 보자면 크게 뒤처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리던 곳은 네덜란더 극장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단체 관람을 온 중고생쯤 돼보이는 관객들은 제자리에 앉아있는 경우가 흔했는데, 홍보 담당자가 나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운용됐기 때문이다. 실제 신문 배달부들이 쓰고 다녔던 빵모자(뉴스보이캡이라고도 불린다)나 파업 당시에 만들었던 신문들의 복사본을 나눠주며 근대 신문사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용감한 시도를 들려주고 경청하던 모습은 꽤나 인상 깊은 풍경이었다. 특히, 문화가, 예술이, 그리고 뮤지컬 작품이 교육의 도구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여실히 실감케 해주는 경험이었다. 우리 관객들도 한 번쯤 곱씹어보며 감상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흥행을 점쳐 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2호 2016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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