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키, 깊은 세계의 소년
지난 4년 동안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아이돌 샤이니의 키가 새로운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아이돌로는 처음으로 소극장 연극 무대에 도전하는 것. 키가 연극 데뷔식을 치를 작품은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무대로 옮긴 작품. 키는 ‘범우주적 코믹 납치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연극에서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 병구를 맡아 무대에 선다. 작은 표정과 몸짓 하나를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할 수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있다는 키를 만났다.
무대에서 성장한 시간
연극 출연 소식은 뜻밖이었어요.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에요?
아뇨, 제가 생각해도 엄청 파격적인 선택 같아요. 내가 또 언제 이런 일을 저질러볼까 싶은? 그런데 이걸 하면 제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사람들한테 날 알려야겠단 조급한 마음이 없어져서 그런가.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는 극장, 더 많은 개런티, 이런 것보다는 저한테 진짜 가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제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지구를 지켜라>의 어떤 점에 그렇게 끌렸어요?
이지나 연출님이 저한테 직접 연락하셔서 저랑 캐릭터도 잘 어울리고 소극장 공연은 좋은 경험이 될 거라시는데, 그냥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연출님하고 작년에 했던 <인 더 하이츠>가 정말 좋았거든요. 다른 생각 안 하고 바로 하겠다고 했죠.
얼마 전에 이지나 연출가가 SNS에 키와 관련된 일화를 공개했는데, 계약에 앞서 연출가에게 작품에 대한 브리핑을 요청했다면서요? 그런 아이돌은 처음이었다고, 좋은 의미로 놀랍다고 했어요.
아, 그건 <인 더 하이츠> 때 얘기예요. 작품 제의가 들어왔을 때, 매주 고정적으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던 데다 공연 시기가 샤이니 앨범 활동하고 겹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을 작품인지 미팅을 요청드렸던 거예요. 연출님이 <인 더 하이츠>는 제가 하면 무대에서 맘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어서 지금 주어진 상황 안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인 더 하이츠>를 하고 나서 아, 작품은 이렇게 골라야 하는구나, 뭔가 깨달았어요.
그 전에는 작품을 어떻게 골랐는데요?
제 첫 뮤지컬이 <캐치 미 이프 유 캔>인데, 그게 저한테 처음 들어온 작품이었어요. 시작은 그렇게 단순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을 하면서 뮤지컬을 좋아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제안이 들어오는 대로 거의 다 했던 것 같아요. 일정만 맞으면요. 솔직히 딱히 작품을 가릴 상황도 아니었고, 뭐가 됐든 나한테 온 기회를 날려버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저한테 어울리는 걸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한데, 그땐 그런 구분을 할 줄 몰랐어요. 뮤지컬을 막 시작했을 땐 겨우 스무 두세 살이었고 뭘 알기엔 너무 어렸던 거죠.
뮤지컬을 하면서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네, 아무래도 앞뒤 안 따지고 계속 작품을 하다 보니 좀 지치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체스>를 하면서는 심적으로 꽤 힘들었어요. 거기서 제 캐릭터가 냉전 시대에 미국 선수와 체스 대결을 하게 된 러시아 선수였는데, 제 안에서 뭘 끄집어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일정은 바쁜데 캐릭터도 버겁고, 한 번 공연하고 한 번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자꾸 다른 탓을 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럼 그게 또 힘들고,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던 것 같아요. 세종문화회관이라는 큰 극장에 선다는 게 기뻐서 그 작품을 했는데,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죠.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과거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 안에서 즐거울 수 있는 점을 찾는다고. 뮤지컬을 하면서 힘든 동안엔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계속 생각했어요. <삼총사> 때, 유준상 선배님이 저랑 첫 공연을 하고 나서 그러셨거든요. “너 이거 공부해서 계속해.” 생각보다 제가 되게 괜찮고, 또 잘한다고 해주시는데, 그 말에 엄청 용기를 얻었어요. 여러 편을 함께한 선배님들이 “얜 걱정 없어” 하고 지나가듯이 얘기해 주실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런 말들은 되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다시 새로운 시작에서
아이돌로 활동할 때는 연기에 대한 꿈은 없었다고 했는데, 그럼 뮤지컬을 하면서 연기하는 것도 좋아진 거예요? 특별히 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작품이 있어요?
첫 작품부터 공연을 하면 할수록 후반부에서 상대 배우의 눈빛이 느껴지는 거예요. 상대 배우의 감정이 저한테 전달될 때, 그때 아, 이런 게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기분이 진짜 짜릿했어요. 그리고 <인 더 하이츠>를 할 때 연출님이 저한테 분장을 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맡은 우스나비라는 역할이 굳이 예뻐 보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분장을 안 한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고요. 아마 첫 작품이었으면 연출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도 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제 자신보다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니까, 나도 준비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도 연기를 욕심내서 해보려고 하는구나 싶었죠.
연극 대본을 읽은 소감은 어땠어요?
일단 대본이 안 어려워서 좋았어요. 영화는 은유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한 번에 이해하기가 좀 어렵잖아요? 그런데 저희 연극은 영화에 비해 훨씬 쉽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요. 사회적 위치가 각자 다른 두 인물, 강자 강만식 사장하고 약자 병구의 입장을 정확히 대비해 이야기를 전달하죠. 대사에 누군가는 그런 얘기를 실제로 하고 있을 것 같은 생명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흥미로웠어요.
원작 영화는 대중적으론 흥행하지 못했지만 마니아도 많고, 배우들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잖아요. 그런 점이 부담스럽진 않아요?
아뇨, 저도 원작 영화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 나요. 예술계 종사자로서 메이저 영화는 문화의 흐름이니까 당연히 챙겨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이너 감성의 영화를 더 좋아하거든요. 스무 살 땐가, <지구를 지켜라>를 우연히 보게 됐을 때 이런 재미있는 컬트영화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게, 그리고 그걸 발견했다는 게 되게 기뻤어요.
그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있다면 뭐예요?
소극장 무대에 서는 두려움은 딱히 없어요. 연습을 시작한 지 이제 2주 정도 됐는데, 서로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게 좋더라고요. 하나 걱정되는 거라면, 마이크 없이 공연해야 하는 거? 감정에 따라 조그맣게 말해야 할 땐 어떡하지? 마이크 없이 2층 객석까지 대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처음 해보는 거라 이런 게 걱정이에요. 아! 그리고 강만식 사장으로 나오는 세 분이 정말 다 다른 캐릭터거든요. 특히 어떤 선배님은 애드리브가 정말 빵빵 터져요! (웃음) 전 아직 무대에서 순발력이 부족한데 애드리브에 대처를 못 하는 제 약한 부분이 나올까 봐 그것도 좀 걱정이긴 해요. 이번에 애드리브에 대한 두려움을 깨보려고요.
대본 속 병구의 말 중에서 마음을 뜨겁게 한 대사가 있어요?
병구가 왜 아무도 날 가만두지 않는 거야, 라면서 막 화를 내는 장면이 있어요. 물론 병구는 절대 합리화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하지만, 병구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럴까 싶어요. 특히 요즘엔 사회가 날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법한 상황들이 많잖아요. 제 주변에도 이제 막 사회에 나와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대사예요.
인터넷 검색창에 ‘키’를 치면 연관 검색어로 명언이 나오는 거 알아요? 끝으로 명언 같은 걸 하나 해준다면?
어렸을 땐 하고 싶은 건 그게 뭐가 됐든 다 해봐도 되는 것 같아요.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값진 경험이어서 뭔가를 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주위에도 여러 가지 일들로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전 친구들한테도 고민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거든요. 서른 살 때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하면서요. 물론 아직 서른 살까지 안 살아본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웃음),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1호 2016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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