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INTERVIEW] <마스터 클래스> 윤석화 [No.150]

글 |김슬기 사진 |심주호 2016-03-17 4,400

당신을 기다려온 연극, 당신이 기다려온 연기



배우 윤석화, 그녀의 연기 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1998년, 윤석화는 이 작품을 연기하면서 인생의 큰 산 하나를 넘었고,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를 지났다.

연극 <마스터 클래스>는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목소리를 잃고,

은퇴 후 현장의 성악가들을 대상으로 했던 실제 수업을 그 배경으로 한다.

삶은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흔들거리고 과거의 화려함은 현실의 쓸쓸함과 엇갈려 그 종적이 묘연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노래가 있고 열정이 있으니 오늘도 막은 오르고 예술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렇게 무대와 인생, 욕망과 상실을 넘나드는 한 예술가의 영혼이 극장에 머무르고 있다.

배우 윤석화가 무려 18년 만에 다시 찾은 작품이다.



뜨겁고도 창백한 극장, 어느 예술가의 초상

                       


극 전반을 장악해야 하는 역할이고, 대극장 무대를 채워야 하니 체력적으로도 힘든 작업일 것 같은데 요즘 연습은 어떠세요?

작업이라는 게 내가 노력한 만큼 가치와 보람을 가져가는 거잖아요. 연습은 즐거워요. 다만 대사량이 모노드라마 몇 개를 붙여 놓은 것만큼 많아서 힘들긴 하죠. 오페라를 소재로 하고 있으니 이탈리아어는 물론 음악도 알아야 하고요. 체력 관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실제로 얼마만큼 도움이 될 거라고 계산을 해서라기보다는, 이러한 노력들이 무대에서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는 거죠.


18년 만에 다시 하는 작품이에요. 당시와 비교해서 지금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예술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는 왜 아직 연극이라는 이 길 위에 있는지 얘기하고 싶은 거거든요.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노래로 풀어내지만 그게 결국 삶이잖아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얘기인 거죠. 물론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이야기 자체를 훨씬 깊이 받아들이긴 해요. 배우가 그것을 충분히 자기화해 보여준다면 관객들이 가져가는 것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무대에 등장한 마리아 칼라스의 첫 대사가 인상적이에요. “박수는 사절입니다”라고 말하죠.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가 굉장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맞아요. 그 짧은 한마디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죠. 지금 이 여자는 극장에 있지만, 노래하기 위해 서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수업을 위한 공간으로 그곳을 사용할 뿐이죠. 그러니 박수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걸 직설적으로 내뱉는 거예요. 마리아 칼라스의 성격적 단호함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대사죠. 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해요. 평생을 박수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박수가 안 나오면 어쩌지, 두려운 거거든요. 말하자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선수를 치는 거죠.


아주 강렬한 등장이에요. 극이 시작하자마자 아무 맥락 없이 양가적인 감정, 복합적인 감각을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요.

그 강함과 여림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저 인물 자체를 느끼는 수밖에 없죠.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바로 그 순간의 상황은 어떠했을지 실제 자료도 참고하고, 추정도 하고 상상도 하면서 내 안에 인물을 넣으려고 애써요.

18년 전에 연기했을 때를 돌아보곤 하는데, 마침 당시 내 상황이 고난의 가장 깊은 심연에 내려가 있을 때였고, 그래서 가능했던 표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어떤 여유 같은 것들이 보이겠죠.


극 중 마스터 클래스에 찾아온 두 명의 소프라노는 각각 ‘몽유병 여인’과 ‘레이디 맥베스’를 노래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매우 결이 다른 두 곡의 노래를 고른 건데요.

실제로 마리아 칼라스가 남긴 명곡들은 셀 수 없이 많죠. 아무래도 작가는 이 두 노래로 마리아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연인 오나시스로부터 버림받았을 때의 심정이 몽유병 여인을 통해 드러나는 거예요. 상실감과 고통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공존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밉겠어요. 레이디 맥베스가 던컨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순간은 바로 그런 감정을 대변하죠.


그런데 극 중 마리아는 그런 상황들을 이미 다 겪어낸 후에 이곳에 와있어요. 이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극의 구조와 흐름에 따라 형성되는 게 아니죠.

40년간 무대에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리고 지금 내가 직면해 있는 상황이라는 게 분명 있어요. 소위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받았던 ‘인기’로부터 한 걸음 내려와 있으니까요. 바로 이런 내 삶이 마리아를 이해하게 해요. 그녀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그 입장을 절절히 느낄 수 있죠.


다소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배우 윤석화에게 ‘인기’란 무엇인가요.

나는 인기라는 게 눈에도 보이고 손에도 잡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그 과정들을 다 겪어왔기 때문에 지금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거고요.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신념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아직 더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죠. 물론 아직 설익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줬는데, 오히려 무르익을 대로 익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쓸쓸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져요. (웃음) 그런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윤석화’라는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었고, 그걸 윤석화답게 지켜낼 필요를 느껴요.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이 배우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는 더 그렇죠. 이건 안개처럼, 바람처럼 사라지는 순간의 예술이잖아요. 남겨지는 게 없죠. 그렇다고 이 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나는 연기를 하면서 나를 찾았고, 사람들하고 많은 것들을 나누었어요. 그 과정에서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 있었고요.



무대라는 땅, 배우로 살아간다는 것

                     

 

과정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배우는 단 몇 회의 무대 공연을 위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연습을 하잖아요.

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겠는데, 나는 연습이 사는 과정이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죽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연습에 치열하게 임하면 임할수록, 작품의 본질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무대에서 승화되는 것들이 있거든요. 언제나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지금 이 순간부터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잘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건, 이미 그 인물로서 무대에 서있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튀어나왔다는 걸 뜻하니까요.


온전히 인물로 존재하면서 객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특히 연극은 관객들과의 소통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공연은 관객들과 함께 만드는 거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연기를 하다가도 객석에 앉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으면 아주 짧은 찰나일지언정, 내가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거든요. 배우도 사람이니 끊임없이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간 거쳐 왔던 많은 무대들을 통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지금은 그런 관객들을 접해도 각자의 방식으로 공연을 즐기는 거라 생각해요. 중요한 점은 ‘나’라는 악기가 다른 삶을 연주한다는 거죠. 그건 무대라는 허구의 땅에서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진실을 연주하는 거잖아요. 이제 나는 없어지고 이 인물만이 무대에 남는다고 생각하면 한편 초연해지기도 해요. 그걸 뻔뻔하게 잘해 내기 위해 죽어라고 연습도 하는 거고요.


그런데 배우는 그 역할을 입고 있는 한, 연습은 물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매일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잖아요.

실제로 나의 삶과 연기를 얼마나 잘 조율하느냐가 배우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고 봐요. 때로는 하늘의 별을 따기 위해 진짜 쓰레기 더미를 기어 다녀야 하는 것이 배우의 일이죠. 그러니 너무 무대에만 치우쳐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현실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도 곤란해요. 그 사이를 잘 지켜내는 것이 배우에게는 큰 숙제인 셈이죠. 결국 좋은 배우가 된다는 건 큰 인간이 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어요.


무대 위의 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참 아슬아슬한 일인 것 같아요.

정말 처절하게 외로운 길이죠. 그러니 무대 위에서 박수 받으면 어떻게 안 우쭐대겠어요. (웃음) 근데 그것도 잠깐이에요. 과연 내가 이런 박수를 받을 만큼 무언가를 잘해 낸 건가라는 자기반성 같은 게 오거든요. 아마 그런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다 이루었다 생각했다면 더 못했겠죠. 그리고 여전히,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많아요. 그래서인지 결국 연극 배우는 좋은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공연을 직접 연출도 하시잖아요. 연출가로서 얘기할 수 있는 연극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가 나를 만드는 건 고통스럽잖아요. 연출을 할 때는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있지요. 그런데 한편 내가 연기하는 건 스스로 고민한 만큼 나오는데, 연출을 하는 건 내 의지를 빗겨갈 때가 많아요. 왜 이런 게 안 되는 걸까? 하다가도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싶기도 하고요. (웃음) 무엇보다 이제는 후배들하고 작업할 기회들이 많으니 그 친구들이 한 뼘 한 뼘 자라는 게 보여서, 마치 내가 물 잘 뿌리고 거름 잘 줘서 그런 것 같아 뿌듯해요. 하지만 무대는 결국 배우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외롭기도 하죠. 연출이 무대 뒤에서 얼마나 땀 흘리고 있는지는 보여줄 수 없는 거니까요.


오랜 시간 한국 연극계와 해외의 연극 현장을 직접 경험하시고, 또 거리를 두면서 지켜봐 오셨는데요. 어떤 변화를 체감하시나요.

요즘의 전반적인 추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삶이 획일화되고 경제적인 논리에 떠밀려 예술이 점차 외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영국 공연계에서 제작에 관여하다 보니 지방 투어를 다닐 일이 많은데, 그곳 관객들이 순수하게 연극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곤 하죠. 교육이나 정책 등 환경적인 영향이 분명 있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거든요. 특히 연극은 모든 공연 예술의 근간이죠. 인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니까요. 우리가 연극을 볼 때 작품이 말하려는 바를 그냥 가져가지는 않잖아요.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 생각들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만들고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연기는 물론, 연출과 제작, 극장 운영에서 잡지 발행까지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해오셨어요. 여전히 열정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고 계시고요. 또 어떤 일들을 계획하시나요.

지난 40년 동안 나답게 잘해 왔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좀 다독거리려는 심정에서 이번 작품을 하고 있어요. 이후의 나는 또 무엇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면 그게 어떤 역할이 되었든 무대 위에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배우로서는 좀 더 자유롭게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현실적으로 돈이 안 되거나 당장의 결과를 볼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제 신념이 향하는 것이라면 계속해 나가겠죠.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생명을 위한 일들에 좀 더 마음을 쓰면서 살고자 했던 오랜 다짐을 실천하려 하고요.


오늘 ‘나답다’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아마 그것이 지금의 윤석화를 만든 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그게 내 인생의 신조예요. 그래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거든요. 내 안에 내가 키운 생각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를 속이는 건 불가능해요.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죠. 나는 무대라는 땅을 딛고 평생토록 이런 것들을 배우며 살았어요. 너무 고통스럽고 지겹고, 그래서 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요. 더 많은 사람들과 단단한 관계를 맺고 계속 이렇게 무대를 지키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