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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아랑가> 강필석 [No.149]

글 |안세영 사진 |배임석 장소제공 | 카페포엠 (02-512-4440) 2016-03-02 6,283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전달하는 힘


지난해 예그린 앙코르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던 뮤지컬 <아랑가>가 마침내 정식 초연된다. 도미설화를 모티프 삼아 백제의 왕 개로가 꿈속 여인을 닮은 아랑에게 사로잡혀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주인공 개로 역을 연기할 배우는 바로 강필석. 쓸쓸하고 감성적인 사랑 이야기에 유독 잘 어울렸던 그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캐스팅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개로라는 캐릭터 자체에 끌렸어요. 겉으로는 폭군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인간적인 연민을 일으켰죠. 잘 다듬으면 좋은 캐릭터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필석은 <아랑가>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지만 사실 개로를 첫눈에 호감이 가는 캐릭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적국의 첩자에게 휘둘려 백제의 멸망을 초래하고, 충신의 아내를 빼앗으려 드는 그는 자칫하면 그저 못나고 이기적인 인물로 비치기 십상이다. “개로는 역사적으로도 무능력한 왕으로 평가를 받았죠.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 속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우유부단하고 답답해 보이는 사람 속이 사실은 가장 복잡한 법이에요. 게다가 뮤지컬의 개로는 어린 시절부터 네가 왕이 되면 나라가 멸망할 거라는 저주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거든요. 그러니까 왕의 자리가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그 두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애쓰지만, 끝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거예요. 그런 내적 갈등이 비치지 않는다면 개로는 아주 형편없는 인물이 되어버리겠죠. 결국 설화 속에서 단순한 악역으로 그려졌던 개로를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이냐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봐요.”


파멸로 치달으면서도 그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개로. 특히 아랑에 대한 그의 집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로에게 아랑이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인지 이해해야 한다.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와 고구려의 압박, 신하들의 대립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개로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꿈속에서 자신을 돌봐주는 여인뿐. 그 여인을 닮은 아랑에게 개로가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아랑을 향한 개로의 감정은 단순한 사랑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잊게 해주고,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큰 버팀목 같은 존재인 거죠.” 강필석은 그런 개로의 마음속 풍경을 어떻게 관객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말했다. 창작 초연이라 배우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갈 여지가 많은 만큼 책임감도 남다르다. 그래서 연습 중간 시시때때로 ‘잠깐 스톱! 여기 이대로 넘어가도 괜찮아요?’를 외치고 한바탕 토론을 벌인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날도 아랑을 처음 만나는 장면 때문에 연습을 멈추고 30분간 열띤 대화를 펼치다 왔다고 했다. “기원제를 지내는 개로의 귀에 나라가 무너진다는 환청이 들려오고 ‘다들 나를 원망하는구나’하는 생각에 빠져있던 그 순간 아랑과 처음 마주치거든요. 저는 그 순간 어떻게든 공기가 한 번 삭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개로가 아랑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잖아요. 그 장면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나머지 단추도 잘 끼울 수 있으니까요.”





배우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

이렇듯 까다로운 캐릭터를 가장 잘 압축할 수 있는 한 대목을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강필석은 ‘이 긴 생을 모두 살았는데도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라는 개로의 마지막 대사를 꼽았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룬 게 없구나, 아무것도 남은 게 없구나. 그런 공허함을 드러내는 장면이죠. 그 대사가 가장 와 닿아요.” 그 대답을 듣자 배우 강필석이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지 궁금해졌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공허함을 안 느낄 수 없는 직업 같아요. 한 작품을 폭풍같이 몰아치고 탁 끝났을 때의 공허함도 있고, 가끔은 무대 위에서도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어요. 무대에서 내가 공허하게 있었던 것만 같은 순간이. 배우도 사람인지라 공연을 백 번 하면 백 번 다 만족스러울 수 없거든요. 하지만 그런 공허함도 결국은 이 일이 너무 좋아서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순간의 공허함보다 무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크죠.”


그런 마음으로 그가 무대에 서온 지도 어느덧 12년이 흘렀다. 지난 1월 말에는 12년 만의 첫 단독 콘서트도 올렸다. “처음에는 어휴, 내가 가수도 아니고 무슨 콘서트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용신 감독님이 꼭 같이 해보고 싶다고 절 설득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당신이 뮤지컬의 역사다’ 그래 가면서. (웃음) 사실 제가 뮤지컬 시장이 막 커질 때쯤 데뷔를 했거든요. 지난 12년 동안 했던 작품의 노래 한 곡씩만 들려줘도 좋은 콘서트가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결국엔 제가 넘어갔죠.” 처음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 그 스스로 느끼는 변화가 있을까? “사실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도 신인 같아요. 작품을 대할 때마다 항상 이제는 쉬워질 때가 된 것 같은데, 안 쉬워지는 거예요. 고생 고생 해서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이런 작품을 해냈으니 나는 이제 어떤 역경이든 다 이겨낼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없더라고요. 지금은 <아랑가>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웃음), 돌이켜 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작품이 더 소중해지기도 하고요.”


그동안 배우로서 지켜온 좌우명을 묻자 ‘뻥치지 말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웃기지만 그게 가장 기본인 것 같아요. 제가 신인 때 한 선배가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배우는 메신저다. 사람들한테 메시지를 전해주는 사람이다. 그 말이 되게 와 닿았던 게, 그럴듯한 포장, 화려한 테크닉이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동을 주기는 어렵잖아요. 하지만 무대 위에 그저 한 명의 배우만 나와 있어도 그가 어떤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전달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감동을 받는단 말이에요.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주거나 혹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배우의 역할인 것 같아요.” 말을 마친 그는 퍼뜩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이렇게 덧붙였다. “공연 일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더라고요.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작품성으로 인정을 받으면 그건 감당이 된다고요. 그럼 함께했던 사람들도 ‘오케이,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보자!’ 하는 게 있거든요. 하지만 대충 만들었는데 생각 외로 흥행이 잘됐다, 그럼 남는 건 사실 공허함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의 소망은 자신이 참여한 작품이 후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공연을 보는 사람도, 공연에 참여한 사람도 쏟은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 “그게 배우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인터뷰를 마치고도 당장 연습실로 돌아가 하던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그를 보니 관객의 한 명으로서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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