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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아가씨와 건달들> 이율,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No.96]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2011-09-05 6,099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이율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네이슨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로 지난 60여 년간 극 중 최고 연장자로서 중후한 매력을 뽐내던 중년의 도박꾼 네이슨 대신, 넉살 좋고 두둑한 배짱을 지닌 데다 능청스럽다 못해 귀엽기까지 한 막내 도박꾼이 되어 우리 앞에 나선 것. 거기에 14년째 약혼 중인 연상의 연인 아들레이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보여주는 그의 필살 애교는 객석 내 누나들의 마음까지 사르르 녹여낸다. <쓰릴 미>로 강렬한 데뷔 무대를 치른 후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부지런히 오가며 연기 폭을 넓히고 있는 5년 차 배우 이율. 그는 지금 무대 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인터뷰로 만나는 거 오랜만이죠?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나요?

음, 늙은 거? 요즘 나이 들었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요. 특히 달력을 볼 때.

 

보통은 거울을 보면서 그런 생각하던데. 나이 들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 기분은 어때요?

반반이에요. 어려서 용서가 될 때가 있었던 반면에, 이제는 그런 실수조차 하면 안 되는 나이가 됐으니까 책임감이 더 커졌죠. 하지만 무대에서는 좀 더 편해진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는 거죠. 전에는 굉장히 많이 떨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떨림이 설렘으로 바뀌는 것 같아 기분 좋아요. 특히 <아가씨와 건달들>은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에 제일 편하고 신나게,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고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잘 맞는 옷을 입어서 더 그런 기분이 든 건 아니고요?

전 작품 할 때마다 옷은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남들 눈에 얼마나 발전되어 보이는지가 궁금할 뿐이지. <아가씨와 건달들>은 연출님이 아예 처음부터 네이슨과 아들레이드의 관계를 연상연하 커플로 바꿔 주셔서 제가 접근하기가 편했어요. 원작대로 했다면 과연 제가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어쨌거나 평가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에요. 저 스스로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커서 다행이고.

 

아들레이드뿐만 아니라 나이슬리, 베니와의 호흡도 중요하잖아요. 김태한, 임춘길 씨가 워낙 순발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라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많이 배울 것 같아요.

 정말 많은 것을 느껴요. 특히 책임감. 선후배 관계를 따지지 않고 당신들의 할 일을 다한 후에 제안을 하세요. 난 이렇게 할 건데 넌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하고. 그러면 후배 입장이 아니더라도 그걸 따르게 돼요. 그리고 순발력도 배워요. 사실 네이슨은 얹혀가는 인물이거든요. 두 분의 호흡에 동조만 할 뿐인데도 워낙에 베테랑이고 잘하시니까 재밌어요. 연습도 많이 안 했어요. 무대 위에서의 즉흥성을 믿었고, 그 시너지 효과가 지금도 나타나는 것 같아요. 매 공연이 설레는 이유 중 하나가 그분들과의 새로운 호흡이 기대되기 때문이에요.


최근 1년 사이의 출연작 <트루 웨스트>와 <동 주앙>이 모두 연극이에요. 뮤지컬 섭외가 없지도 않았을 텐데요.

작품이 좋았어요. 일생에 한 번 할 수 있을까 하는 작품들이었죠. 선택에 대한 후회도 없고 그걸 했기 때문에 조금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나 싶어요. 두 작품을 하면서 책임감이 많이 생겼거든요.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전까지는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은 다른 분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린 마음에 내가 못해도 누군가,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연기 맛깔나게 하는 선배들이 채워주지 않을까 했던 거죠. <아가씨와 건달들>을 하면서 제 첫 번째 목표가 제가 해야 할 몫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근데 첫 공연에서 실수를 범해서 자책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음,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가 실수를 해도 유연하게 잘 받아서 수습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 구애의 눈빛을 보내는데도 내 거 생각한다고 그걸 보지 못한 거죠. 그래서 상대 배우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고 나는 나대로 자책하고.

 

<아가씨와 건달들>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분명한 건 스카이 역을 제안 받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네이슨을 통해 뭔가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네이슨은 굉장히 많은 인간 군상들과 다 만나잖아요. 형들, 약혼녀, 형사, 도박꾼들…. 이 캐릭터라면 하면서도 재밌고 각자의 호흡들을 다 느끼면서 연기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많이 안 하는 게 최고의 연기라고 배웠지만, 가장 대중적인 작품 안에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뭔가를 많이 하는 역할인 것 같더라고요. 또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얼마나 대중성 있는 작품인지도 궁금했어요. 스토리 구조나 캐릭터가 가장 대중적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 예술 작품으로는 그 틀 안에 정확히 들어맞는 작품이더라고요.

 

이지나 연출과의 작업은 처음이었죠? 그동안 만났던 분들과 작업 방식이 많이 다르지 않았어요?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대부분의 연출님들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연기하기를 원하셨거든요. <동 주앙> 연출하셨던 최용훈 연출님은 시선의 각도까지도 다 정해주셨죠. 물론 나중에 보면 그게 다 정답이었지만. 근데 이지나 연출님은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사도 너한테 편하게 써봐, 다 고쳐도 돼’ 하시는 거예요. 목적지를 정해주시고는 자유롭게 찾아가도록 두셨는데, 그게 굉장히 재밌었어요. 만들어가는 기쁨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누나’라는 가사도 연습하다 우연히 나온 거예요. 정말 신나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네이슨의 캐릭터를 잡을 때 연출님과 어떤 대화를 많이 했나요.

심플하게 가자, 유치함을 버리자. 안 웃겨도 좋으니 심플하고 신선하게 가자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만든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요?) 불만은 없지만 아쉬움은 있죠. 제 것을 다 못 버렸다는 거? 원작의 네이슨이었다면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깨지면서 배우는 것들이 있잖아요. 근데 지금 캐릭터는 제가 갖고 있는 부분을 다듬는 정도인 것 같아요. 나이든 캐릭터, 중후한 매력이 있는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는데 만약 내가 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어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거죠. 지금은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네이슨은 이율 씨가 갖고 있는 어떤 부분을 다듬어 나온 캐릭터예요?

연상을 만난다면 그렇게 연애할 것 같아요. 풀어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도박은 아니지만 일에 대한 끈도 놓지 않으려 할 것 같고요. 싱크로율 90퍼센트! (장기 연애도?) 그게 안 맞는 10퍼센트예요. 1년 정도가 제일 긴 연애 기간이었는데 그것도 일 때문에 헤어졌어요.(관심을 안 보여준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는 제게 4순위거든요. 일, 가족, 친구가 먼저죠. 다들 기분 나빠 했지만.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요?

그럼요. (김)무열이 형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멋있는지를 알아요. 제가 앞에서 재롱떨고 열심히 해도 스카이가 나와서 눈빛 한 번 주면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저는 사라지는 거예요. 표현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죠.(웃음) 제가 생각하는 아저씨 마인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가고 있는 양반 중 한 명인 진구 형은 호흡이 참 재밌어요. 긍정적이고 낙천주의자라 무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굉장히 열려 있어요. ‘느낌’을 중요시하고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요. 그런데요, 간사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용기도 얻어요. 저들은 왜 연기를 저렇게 할까, 저건 정답이 아닐 텐데.  그나마 내가 저들보다 저런 연기는 더 느낌 있게 하는구나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기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르고 지나가는 연기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스타일리시한 연기, 자연스러운 연기 다 좋죠. 무대 위에서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연기가 100퍼센트 잘하는 연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물 흐르듯이 하는 연기가 최고인 것 같아요.

 

이율 씨가 연기하는 네이슨을 평가한다면?

잘 맞는 옷을 입고 하는 연기죠. 가장 좋은 건 옷을 입지 않고 연기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내공이 부족하니까 나한테 맞는 옷을 찾아서 감춰야 해요. 언젠가 제가 경력을 더 쌓으면 옷을 다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연기가 나오겠죠. 그럴 땐 정말 최고라는 얘기를 들을 거예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런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거 보기 좋은데요. 올해로 벌써 데뷔 5년 차예요. 돌아보면 어떤가요. 잘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어요?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눈에 띄게 빠른 발전은 없지만 부끄럽지 않게 가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아쉽다면 저는 그동안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피해 받지 않고 연기를 해왔다는 거? 항상 혼자 연기 잘해, 혼자 실수하면 안 돼, 나만 잘하면 돼 하는 마인드가 팽배해 있었는데, <아가씨와 건달들>을 계기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정말 어른이 되어가고 있군요. 언젠가 서보고 싶은 무대가 있어요?

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다시 안 한대요? 서른 넘기면 더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힘 있을 때 해야 하거든요.(웃음) 혼자 하는 무대에도 서고 싶어요. 1인극이 뭐가 있을까요. 능글맞게도 해보고 강하게도 해보고 모두 다 섭렵할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굉장히 아름답게 포장해서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영화 작업도 계속 하겠죠? <페이스 메이커> 개봉이 언제예요? 11월 중순쯤이 될 것 같아요. 근데 별로 많이 안 나와요. 군중 속에서 뛰고 있어서.(웃음) 악역이었다가 (김)명민이 형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로 바뀌는 인물인데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양쪽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제대로 열심히 뛰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처음이라는 걸 감안하고 보시면…. 어떤 작품이 될지 모르지만 다음 작품이 더 기대가 돼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6호 2011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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