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채우는 그 목소리
치명적인 존재감을 지닌 그녀, 다시 ‘레베카’가 돌아왔다. 이번 시즌 <레베카>에서 묵직한 에너지를 쏟아낼 새로운 배우는 누구일까? 막심 드 윈터 역의 송창의와 댄버스 부인 역의 차지연. 그동안 무대에서 쌓아올린 이들의 신뢰감은 그들의 새로운 도전에 강한 힘을 실어준다. 송창의와 차지연, 막심과 댄버스로 무대 위에서는 X축과 Y축처럼 서로 다른 노선을 걷는 이들이지만, 무대 밖에서 이들은 그저 허물없이 즐거운 교감을 나누는 사이였다. 이렇듯 두 사람이 함께 만나 빚어내는 시너지를 보니, 무대 위 두 배우의 활약이 ‘레베카’의 존재감만큼이나 매력적일 것 같다.
순수함을 향한 믿음 송창의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는 건 그만큼 그가 믿음을 주는 사람이란 의미다. 실제로 만난 송창의가 그랬다. 궂은 날씨에 오래 이어지는 촬영에도 불구하고, 그는 싫은 기색 한 번 없었다. 이런 믿음직한 모습 덕분에 그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새삼 그런 그와 <레베카>의 막심 드 윈터의 만남을 떠올리니 왠지 묘했다. 그의 부드러운 이미지만 놓고 보면 다소 무뚝뚝한 막심과 정반대의 성향일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정작 그에게 막심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사랑의 상처를 지닌 인물로 느껴졌어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어요. 다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가 찾으려고 한 것은 결국 평범한 삶이었던 것 같았죠.”
이번 시즌 <레베카>의 새로운 캐스트로 이름을 올리게 된 송창의. 과연 그를 <레베카>의 무대로 끌어당긴 힘은 무엇이었을까? “<레베카>의 특별한 힘은 바로 밀도감이에요. 우선 음악이 그래요. 음악 자체만으로도 캐릭터의 깊은 감성이 느껴져요. 막심의 ‘칼날 같은 그 미소’나 ‘신이여’만 봐도, 노래 안에서 모든 게 표현되거든요. 또한 드라마도 결코 가볍게 흘릴 수 없는 부분이에요. 이 작품은 유독 인물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뮤지컬 넘버가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느낌이거든요. 좀 더 감성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죠. 더욱 집중해서 한 장면 한 장면을 관객들과 교감해 나가야 해요. 그만큼 어렵고, 또 매력적이죠.”
영국의 상류층 신사인 막심은 아내 레베카의 베일에 싸인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입지만, 순수한 여인 ‘나(I)’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아픔을 극복해나가는 인물이다. 이런 막심에게서 송창의가 발견한 감성은 다름 아닌 ‘순수함’이었다. “막심은 순수한 사랑을 꿈꿨던 남자 같아요. 그래서 나에게 기대를 걸었을 거예요. 첫 느낌부터 사랑이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사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 차이인데, 전 개인적으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관점에서 막심을 들여다보면 나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져요. 그래서 막심이란 인물을 통해 순수성을 알리고 싶어요. 저 남자도 사랑을 찾았으니, 우리도 사랑을 찾을 수 있어! 사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옆에서 믿어준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우리는 ‘당신이 무슨 일을 겪어도 옆에 있겠다’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원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통해 그런 순수한 사랑이 있다는 걸 전해주고 싶어요. 그런 온기를요.”
한편, 흥미롭게도 막심이 꿈꾸는 행복은 배우 송창의가 이야기하는 행복과도 맞닿아 있어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인터뷰 말미, 송창의에게 물었다. 미래에 가장 행복한 한 장면을 떠올려달라고. 그러자 그는 이런 답변을 내놓으며 막심이 그러했듯 평범함이 빚어내는 순수한 행복을 그려보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왜 행복이야? 반문하실 수도 있어요. 저의 행복은 좋은 가정을 꾸리는 거예요. 너무 별게 아니죠? (웃음) 결혼을 해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김치찌개를 끓여놓고선 ‘당신 오늘 힘들었지?’ 하고 제 마음을 이해해준다면…. 스프링처럼 탄력을 받아 밖에서 더욱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것 같아요. 제 미래의 행복은 좋은 가정이고, 그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가고 싶어요. 저는 항상 행복을 소소한 것에서 찾거든요. 좋은 남편이 되고 싶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 이를 통해 좋은 배우,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확신합니다! 그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이 되지 않을까요? ”
강하고 신비로운 에너지 차지연
무대에서 느낀 차지연의 에너지는 일상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시원시원’, 무대 밖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장기인 시원한 고음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날따라 그녀의 강렬한 에너지에 밝음이 더욱 묻어났던 건 얼마 전 ‘결혼’이란 중대사를 행복하게 치러낸 이유가 컸다. “제 인생 통틀어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아요.(웃음) 정말 행복했어요. 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죠.” 그녀의 행복을 마주하니 왠지 기대가 됐다. 그녀의 기분 좋은 변화들이 고스란히 무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결혼식 당일에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느꼈어요. 그런데 다음 날 자고 일어나니 제 삶 깊은 곳에 어떤 묵직한 책임감이 장착된 것 같았어요. 굉장히 기분 좋은 책임감이랄까. 반갑고, 기대되고, 잘 지켜 나가고 싶은 그런 변화예요. 이 좋은 기운을 받아서 지금 무대에 쏟아내야죠!”
결혼 후 그녀의 첫 무대는 <레베카>. 강렬한 에너지의 끝판왕 댄버스 부인 역에 차지연이 이름을 올렸을 때, 조금의 이견 없이 ‘드디어!’란 기대가 먼저 들었다. “계속 강한 캐릭터를 맡는 거요? 저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생긴 것 자체가 그런 역할을 거부할 수 없고, 저 역시 딱히 거부하고 싶지도 않아요. (웃음) 그래서 생각해요. 작품은 운명이다! 겸허히, 그리고 감사히 받아들이며, 이 장점을 극대화하려고요. 정말 멋지고 강한 여성으로, 하지만 그 안에 감성만큼은 여린 캐릭터로요. 하하하.” 물론 댄버스 부인은 차지연이 기존에 맡았던 강한 역할들과 비슷한 선상에 있지만, 차별화되는 부분도 있을 법하다. “사실 다른 캐릭터들은 이럴 법하게, 그럴 싸하게, 혹은 너무나 사실적인 역사들을 표현하잖아요. 예를 들어 <서편제>의 송화라면 소리를 향한 진실된 마음을 반영해야 하듯이요. 반면 댄버스 부인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감정을 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그만큼 배우의 색깔이 정말 잘 드러나는 역할이에요. 배우가 어떤 해석으로, 같은 재료를 어떤 비율로 섞어서 요리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손맛이 나올 것 같아요. 그래서 재밌고, 구미가 당겨요. 빨리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역할이죠.”
댄버스 부인이란 매력적인 역할을 앞둔 차지연, 그렇다면 그녀가 해석하는 댄버스 부인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그녀가 생각하는 댄버스 부인의 색깔이 궁금해졌다. “새벽 네 시 반 정도의 검보랏빛 스모그 같았으면 좋겠어요. 멀리서 보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허우적거리며 헤매게 되는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한편, 댄버스 부인은 옥주현, 신영숙, 기존의 캐스트들이 이미 각자의 노선을 만들어놓은 역할이기에 새로운 캐스트로 참여하는 차지연의 부담이 클 법도 하다. 그런 만큼 그녀는 차지연만의 댄버스 부인을 창조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일단 많은 걸 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포인트를 줘야 할 부분에서는 힘을 강하게 실어요. 사실 매 장면이 ‘강강강’이라면 보는 분들이 힘드실 거예요. ‘강약중간약’ 이런 식으로 포인트를 줘야 할 부분을 계산하면서, 강해야 할 부분에선 자유롭게 표현하되 그 외 부분에서는 굉장히 자제하고 있어요. 표현을 절제하고 있는 댄버스 부인. 그걸 극대화시켜서 댄버스 부인의 기운이 계속 극 안에 스며들 수 있게끔 하고 싶어요. 제가 무대 밖에 있을 때도 댄버스 부인의 에너지가 계속 무대 안에 흐를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에요. 제가 없을 때도 그 존재감을 끊임없이 표현해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댄버스 부인에게로 향해 있는 차지연의 감성. 그녀는 <레베카>가 막이 내릴 무렵 관객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다는 바람을 남기며, 앞으로의 무대를 더욱 주목하게 만들었다. “2막 말미에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 리프라이즈’를 부르거든요. 저는 이 곡이 댄버스 부인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이전에 댄버스 부인이 불렀던 곡들이 모두 레베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 곡에선 댄버스 부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롯이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거든요. 작품이 막을 내렸을 때, 이 노래를 부르는 댄버스 부인으로서 관객들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아, 저런 감정은 차지연만이 표현할 수 있겠다!’ 그만큼 이 곡이 제게 특별한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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