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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S] <넥스트 투 노멀> 속 전기 충격 요법 [No.147]

글 |안세영 2016-01-14 7,355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 환자들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던 극작가 브라이언 요키는 정신질환 환자에게 아직도 전기충격 요법이 쓰이고 있으며, 그 환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조울증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이다. 뮤지컬에는 주인공 다이애나가 전기충격 요법을 권하는 의사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전에 본 영화 같아’다.



왠지 익숙한 장면 전에 본 영화 같아
침울한 정신병원 맞아 뻐꾸기 둥지 

멀쩡한 사람 결국 병신 만들었었지
그때 그 영화 보며 나 울었었지

넌 왜 날 미친년 취급하니
남은 안 해쳐 실비아 플라스도 아냐

난 니가 찾던 프란시스 파머가 아냐 
나를 건들지 마 사람 잘못 봤어



이 노래에서 다이애나가 열거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전기충격 요법의 유명한 피해자들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머피와 시인 실비아 플라스, 그리고 배우 프란시스 파머. 이들은 모두 주변 세계에 녹아들지 못한 이질적 존재였고 바로 그 때문에 정신적 치료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되묻는다. ‘진짜 미친 것은 누구인가’라고. 타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보수적인 시스템 안에서 이들의 병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스템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장치가 된다. <넥스트 투 노멀>에서 다이애나는 전기충격요법의 부작용으로 부분기억상실증을 겪고, 이를 계기로 자신을 억압해온 ‘평범한 가족’이라는 강박적 이상을 돌아본다. 때문에 다이애나가 이 노래에서 거리를 두려했던 세 인물은 사실 그녀와 가장 친밀한 존재들이다. 비정상을 대변하고 정상의 경계를 뚫고 나가려 했던 세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자.




 맥머피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977년 개봉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비정상인 틈에 끼어들어간 정상인의 이야기다. 교도소 작업농장에서 일하던 범죄자 맥머피는 편안한 생활을 위해 일부러 미친 척을 해서 정신병원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맥머피가 발견한 것은 병원의 압력에 짓눌려 감옥보다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환자들이다. 특히 병원의 절대 권력자인 수간호사는 치료를 명목으로 환자들을 더욱 병적인 상태로 몰아간다. 분개한 맥머피는 병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만, 그 대가로 강제적인 전기치료와 전두엽 절제술(Lobotomy)을 받고 폐인이 되어 인격을 상실한다.


맥머피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정상인조차 비정상인으로 만들어버리는 획일적인 체제를 비판한다. 맥머피와 환자들이 보여준 서로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밝고 즐거운 커뮤니티는 체제가 만든 차가운 병원 시설과 대조되어 소위 ‘정상적인’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원작은 1962년 발간된 켄 케시의 동명 소설이다. 재향군인병원에서 일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과도한 정신과 치료의 폐해를 고발한 이 소설은 실제 60년대 반(反)정신의학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실비아 플라스와  『벨 자』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극적인 삶으로 미국 문학계의 신화가 된 인물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그녀는 이때 만난 영국의 계관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했는데, 휴즈의 외도로 결국 파경을 맞는다. 이후 시작에 몰두한 그녀는 짧은 기간 동안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쏟아냈으나, 일생 동안 따라다닌 우울증을 떨쳐내지 못하고 두 아이를 옆방에 남겨둔 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서른 하나였다.


드라마 같은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그녀의 글보다 더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깊히 들여다 보고자 한다면 결국 그녀의 글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3년 자살 한 달 전에 가명으로 자전 소설 『벨 자』를 출간했다. 그녀 자신의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입원 경험을 토대로 젊은 여성 에스더가 우울증에 빠져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더가 겪는 우울증은 1950년대 미국 사회의 주류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소설은 소련에 원자 기술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전기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뉴스로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냉전 시대 미국의 반공 정서가 광적인 마녀사냥으로 번졌던 대표적인 사례다. 이 전기 처형은 체제에 반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말살하는 상징적 장치로 훗날 에스더가 겪게 되는(그리고 실비아 플라스가 직접 겪었던) 전기 충격 요법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타자를 불허하는 사회는 에스더의 자유로운 영혼을 유리 뚜껑(벨 자) 안에 가두어 버린다. 소설 속에서 에스더를 특히 옭아매는 것은 보수적인 가정 이데올로기다. 여성의 역할을 한정짓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감과 그러한 규준을 그대로 내면화해 온 자신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에스더는 결국 피임 시술을 받고 비혼(非婚)을 선언하는 등 강요된 여성성을 과감히 탈피하면서 마침내 정신 건강을 회복한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시인으로서 참된 자아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 <실비아>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사랑과 결혼, 죽음을 집중 조명한다. 영화 속에서 실비아는 결혼 이후 자신의 시를 포기하고 남편의 뒷바라지와 육아에 전념하지만, 시에 대한 열망과 시인으로 성공해가는 남편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프란시스 파머와  ‘프란시스 파머는 시애틀에  복수할 것이다’    

프란시스 파머는 눈부신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불운한 삶을 살다간 배우다. 1913년 시애틀에서 태어난 프란시스는 대학에서 연기와 함께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신문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명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1935년 할리우드에 데뷔하자마자 금세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할리우드의 시스템은 배우의 사생활을 날조해 가십을 양산하고 외모를 기준으로 배역을 정하는 등 배우를 단순한 재산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이러한 관행에 저항했고, 결국 파라마운트사는 그녀의 음주벽과 난폭한 언행을 이유삼아 1942년 계약을 파기했다. 이후 그녀는 헤드라이트를 켠 채 블랙 아웃 존(2차 대전 당시 헤드라이트가 금지된 지역)을 달리다가 구속됐는데, 벌금을 제때 물지 않은데다 비슷한 시기에 폭행죄로 고소까지 당하면서 1943년 경찰에 연행됐다. 그녀는 자신의 혐의에 강력히 반발했지만 조울증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7년간 그녀는 전기충격을 비롯한 각종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이 시절에 대한 가장 유명한 소문은 그녀가 의학적 명성에 눈이 먼 의사 윌터 프리맨에게 끔찍한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수술은 환자를 알몸으로 얼음 욕조에 장시간 방치한 뒤, 저체온으로 실신하면 머리에 구멍을 내 전두엽을 자극하는 야만적인 수술이었다.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공격성이 줄어드는 대신 수동적이고 무감각해지는 등 부작용이 잇따랐지만, 당시 언론의 과장된 홍보로 미국에서만 4만 명 이상이 이 같은 수술을 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문제가 제기되었고, 수술의 부작용을 폭로한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67년 전두엽 절제술은 전면 금지되었다.


이후 프란시스 파머는 1957년 배우로 복귀했으나 예전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1970년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전두엽 절제술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병원 측은 그녀를 수술한 사실을 부인했는데, 프란시스의 사후 지인들이 발간한 회고록 역시 저마다 다른 사실을 기술하고 있어 진실은 논란에 싸여있다. 그녀의 정신병원 수감 자체가 공권력에 의한 음모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프란시스는 평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배우였는데, 그런 그녀가 인기를 얻자 권력자들이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음모론에 경도된 사람 중 하나가 자살한 천재 뮤지션 커트 코베인이다. 그는 ‘프란시스 파머는 시애틀에 복수할 것이다(Frances Farmer Will Have Her Revenge On Seattle)’라는 노래로 프란시스 파머를 추모하고 자신의 딸에게도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82년에는 그녀의 삶을 통해 당시의 할리우드 시스템을 비판한 영화 <프란시스>가 개봉하면서 프란시스 파머는 단순한 조울증 환자가 아닌 부당한 체제의 희생양으로 기억됐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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