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가장 소중한 작품은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 <브루클린>이죠.”
당당한 싱글 여성의 상징에서 결혼 예찬론자가 된 이영미는 인생의 작품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브루클린>을 외쳤다.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세계를 경험하면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감정의 깊이를 깨달아가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렇기에 지금 이때
<벽을 뚫는 남자>에서 아픔을 간직한 캐릭터를 만난 게 행운이라는 그녀는 어떤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을까.
영원한 대표작 <헤드윅>
“<헤드윅>은 공연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만, 관객들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기는 초연 때 같아요. 그때는 공연이 끝나면 저희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들로 극장 앞이 꽉 차서 밖으로 나가질 못했거든요. 트랜스젠더 록커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잘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는데, 초연 흥행 효과로 거의 매해 재공연되면서 저도 오랜 기간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으로 살게 됐죠. 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횟수를 공연한 캐릭터가 이츠학이거든요. 어떻게 한 역할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츠학은 여장 남자라는 독특한 캐릭터인데도 처음부터 제 옷처럼 편했던 것 같아요. 무대에서 강렬한 록 뮤지컬 넘버를 부르면서 어렸을 적 꿈이었던 가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좋기도 했고요. 작년에 10주년 공연을 마치면서 이제 이츠학은 그만 보내주자고 마음먹었는데, 또 모르죠. 은퇴라는 말은 하는 게 아니래요.”
좋은 추억 <지킬 앤 하이드>
“<지킬 앤 하이드>의 섹시한 클럽 쇼걸 루시는 제가 참 좋아하는 역할이에요. 거칠어 보이지만 내면은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 사랑에 빠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이 좋아서요. 제가 보기엔 터프해 보여도, 의외로 신파적인 캐릭터를 좋아해요. 또 대극장에서 클럽 쇼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고, 파워풀한 솔로곡이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배우로서 욕심났던 역할이죠. 루시가 부르는 뮤지컬 넘버도 무척 좋아해서 뮤지컬 행사 같은 데서 종종 부르곤 하는데, 루시의 대표곡 ‘Someone Like You’나 ‘A New Life’는 언제 불러도 좋은 것 같아요. 반응도 항상 좋고요. <지킬 앤 하이드>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던 시기에 루시를 해서, 나중에 마흔이 되기 전에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그게 참 아쉬워요.”
마음에 새긴 명작 <맨 오브 라만차>
“정확한 시즌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예전에 알돈자로 <맨 오브 라만차> 오디션을 본 적이 있어요. 사실 그땐 작품에 대해 잘 몰랐는데, 거리 여자 알돈자가 자기 신세를 노래하는 ‘알돈자’란 오디션 곡이 유난히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러다 나중에 공연을 보게 됐는데, 저 역할은 언젠간 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어요. 공연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이따금 있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알돈자를 하게 됐을 때, 당시 제 개인적인 삶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알돈자에 몰입이 돼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남자들하고 부딪치는 장면이 많아 몸도 힘들었고요. 알돈자를 하기 전엔 항상 알돈자를 보러 <맨 오브 라만차>을 보러 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작품 전체 캐릭터를 보면서 새삼 이 작품이 얼마나 명작인지 느꼈어요. 현실에 짓밟히지 말자는 내용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깊어진 마음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마리아는 임신 중에 출연 제의를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출산 백 일 뒤가 공연이었는데, 첫 임신이라 출산 후 제 몸 상태가 어떨지 전혀 감이 안 잡혔거든요. 그런데 오래 공연을 쉬다 보니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출연을 결심하게 됐죠. 출산이란 경험이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일깨워줘서 그런지 연습실에서 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는데, 특히 첫 주 연습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향해 노래하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불렀던 때를 잊을 수 없어요. ‘이 맘을 어찌 하나, 이것이 사랑일까’ 하는 첫 소절 가사에서 이 여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는 감정이 확 몰려오는데, 눈물이 왈칵 났죠. 이지나 연출님과 여러 작품을 작업하는 동안 백 점이란 말은 그때 처음 들었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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