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만난 현대 예술
어느 시대든 너무나 앞선 감각을 지녀서 그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들이 있다. 에릭 사티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금도 TV 광고나 카페 배경음악으로 종종 사용되는 ‘짐노페디(Gymnopedie)’를 들으면 1800년대에 작곡된 곡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이는 반대로 그 시대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실제로도 사티는 음악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2011년 초연된 후 몇 번의 재연을 거쳐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에릭사티>는 이런 그의 삶을 ‘타임 슬립’ 형식의 드라마로 담아낸 음악극이다. 타임 슬립 컨셉의 픽션들은 대개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과거로 건너가 명사들의 삶에서 영감을 얻고 현재로 돌아와 잘 살게 된다는 플롯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대표적이고, 지난달 개막한 뮤지컬 <명동로망스>도 같은 구성이었다. 두 작품보다 먼저 선보였던 <에릭사티>도 비슷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예술가로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영화감독 지망생이 에릭 사티의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며 그의 삶을 공유한다. 대중 영화보다는 자신의 세계관이 뚜렷한 작품을 쓰고 싶은 영화감독 태한은 상업성을 강조하는 제작자의 압박에 괴로워한다.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고뇌를 담은 이런 설정은 곧 대중과 평단에 환영받지 못했던 에릭 사티와 연결해 주는 시발점이 된다. 태한이 글을 쓸 때마다 습관처럼 틀어놓는 사티의 음악은 태한을 마법처럼 20세기 초의 파리로 끌어들인다. 거기서 태한은 에릭 사티가 살아가는 방식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목격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와 다른 점은 이 부분이다. 영화는 작가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과거의 명사들을 밤마다 만나는 에피소드가 양념처럼 가미되지만, <에릭사티>는 주인공 태한이 사티의 시대로 간 후엔 극의 초점이 아예 사티의 삶으로 옮겨간다. 즉 영화는 작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지만, 음악극의 목적은 에릭 사티의 삶을 조명하는 데 있다. 이에 따라 현재에서 사티의 시대로 간 영화감독은 주인공보다는 관찰자로서 관객의 시선을 대신한다.
이 극만의 재미는 19세기의 괴짜 음악가로만 알려져 있던 사티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는 데 있다. 오늘날 그는 ‘3개의 짐노페디’로 유명하지만 실제 삶은 베일에 싸여 있다. 드뷔시나 라벨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들과 달리 비주류의 길을 갔던 정도로만 알려졌다. <에릭사티>는 그의 삶 중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의 협업과 연인 수잔 발라동과의 강렬한 사랑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특히 사티만의 예술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발레극 <파라드>의 공연 장면은 동료로 등장하는 장 콕토와 파블로 피카소와의 협업작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극 전개와는 별개로 여겨질 만큼 긴 시간 진행되는 발레극 장면은 이들에 대한 연출진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짐노페디’를 비롯해 ‘그노시엔느(Gnossiennes)’, ‘쥬뜨부(Je Te Veux)’, ‘벡사시옹(Vexations)’ 등 실내악 원곡을 그대로 살린 라이브 연주도 음악극의 특징을 살려 곳곳에 배치됐다. 초연부터 꾸준히 작품에 참여해 온 박호산이 이번에도 에릭 사티 역을 맡았다. 태한과 수잔 발라동 역도 지난 2013년 공연에 이어 김태한과 배해선이 캐스팅됐다.
11월 6~8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11월 27~29일 안산문화예술의 전당 달맞이극장
1544-1555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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