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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이석준·고영빈 [No.146]

글 | 송준호 사진 | 배임석 스타일링 | 백지혜 헤어·메이크업 | 김민경 2015-12-02 8,853

잉크 묻은 손편지의 힘



매년 라인업이 발표될 때마다 마니아들의 위시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도 그중 하나다.  초연부터 많은 팬들을 양산한 이 작품의 힘은 곧  앨빈과 토마스라는 두 인물의 매력에서 나온다.  3년 만에 돌아온 이번 공연에서는 초연 때부터 출연하며  최고의 앨빈으로 꼽히는 이석준과,  그와 가장 좋은 호흡을  보여주는 토마스 고영빈에 거는 기대가 크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와  ‘스토리 오브 데어 라이프’를 함께 담아봤다.




아날로그 감성에 더해진 연륜 
이석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던 7월부터 지난달까지, 이석준은 일곱 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렸다. 조금만 다가서면 관객들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작은 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때문이다. 비좁은 공간 탓에 관객이 부상을 입거나 소품이 망가지는 등 크고 작은 사고로 공연이 잠시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석준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오히려 연극의 진수를 느꼈다. 작은 극장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관객 앞에 노출된 만큼, 다양한 연기의 소스를 고루 실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벌써 세 번째로 참여하는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이와는 반대의 작품이다. <카포네 트릴로지>가 잦은 암전과 등퇴장으로 짧고 굵은 호흡을 선보인다면, 이 작품은 등퇴장 없이 두 배우가 계속해서 연결된 채 감정의 끈을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석준은 연기 면에서는 두 작품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카포네 트릴로지>에서는 관객과의 ‘밀당’에 치중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인물의 이미지를 그리는 데 집중할 뿐이다. 결국 관객을 염두에 둔 연기에서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석준의 앨빈이 처음부터 관객 친화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2010년 초연 전 대본을 통해 처음 접한 앨빈은 ‘돌아이’에 가까운 순수함 때문에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영화 <레인맨>의 자폐아 형 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의 코난이 연상되기도 했어요. 한마디로 비현실적이고 신파성이 강한 인물이었죠.” 나름대로 구축한 앨빈으로 무대에 섰던 이석준은 회를 거듭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흐름에 따라 앨빈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렇게 두 시즌을 보낸 이석준의 앨빈은 시나브로 토마스의 뮤즈에서 관객의 뮤즈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역대 최고의 앨빈을 뽑는 한 설문 조사에서 이석준의 이름이 제일 위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관객들을 매료시킨 이석준표 앨빈의 매력은 뭘까. 그는 그것을 ‘아날로그성’이라고 본다. “손편지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아주 오래된 편지지에 잉크로 쓴 편지를 받은 느낌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그런 예스러운 느낌을 살리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이석준은 이 손편지의 느낌을 무대에서도 구체화하기 위해 정승호 무대디자이너에게 갱지 느낌의 종이를 요청했고, 정 디자이너는 이에 부응하듯 마치 커피를 쏟은 듯한 낡은 느낌의 종이를 만들어왔다. 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배우들은 원래 대본에도 없던 종이를 날리는 신을 추가해 한국 프로덕션만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이석준은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이성적인 배우이기도 하다. 특히 표정이나 외모에서 그 인물의 특징을 잘 잡은 후 내면을 동화시키는 작업을 늘 노련하게 수행한다. “가령 커피콩을 정한 뒤 가는 방법과 시간을 선택해서 드립하면 커피 맛은 저절로 나온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외형적 모습과 움직임을 구축한 뒤 그걸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면 훨씬 그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거죠.” 그는 4년 만의 재연이라 설정을 다 잊어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예전에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이제는 납득이 된다며 업그레이드된 앨빈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린다. 


10년 넘게 자기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했을 정도로 이석준은 대화를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비록 토크쇼는 막을 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인다. 그건 배우가 아닌 ‘인간 이석준’의 천성이다.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컸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는 배우가 공연의 전부가 아니라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성찰을 흔히 연륜이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그렇게 더 큰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어떤 존재 
고영빈

분위기 있는 얼굴과 긴 팔다리,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진중한 눈빛. 고영빈의 장점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캐릭터는 오랫동안 <바람의 나라>의 무휼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볍지 않고 진지한 이미지의 고영빈을 담기에 무휼은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의 프로필은 일견 ‘고영빈스럽지 않은’ 작품들로만 채워졌다. <프리실라>, <라카지>, <마마, 돈 크라이> 등 섹슈얼리티가 강조되는 작품들과 고영빈의 조합은 좀 낯설어 보였다. 그 자신도 처음엔 그 작품들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무대에서 변하는 자신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단순히 망가지는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특히 <프리실라> 때는 제가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내 안에 이런 에너지가 있다는 게 놀랍더군요.” 


그에 비하면 3년 만에 다시 맡게 되는 토마스는 고영빈의 제멋을 자연스럽게 내비칠 수 있는 캐릭터다. 자신을 닮은 역을 맡아 오랜만에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겠다고 말하자, 고영빈은 오히려 이런 인물이 더 표현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젓는다. “캐릭터가 강하면 부담이 많지 않아요. 가령 뱀파이어나 드래그퀸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이미 익숙하기 때문에 뚜렷한 롤모델이 있거든요. 반대로 토마스처럼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보편적인 인물은 밑바닥부터 세심하게 만들어내야 하니까 더 어려워요.” 


그런데 고영빈이 지난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에 참여하게 된 건 이런 캐릭터와의 부합성을 고려해서가 아니었다. 2010년 초연에서 이석준의 앨빈이 강렬한 인상으로 마음에 남았던 고영빈은 그가 재연에도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본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최고의 앨빈과 토마스로 자신들이 꼽히는 이유도 이석준 덕분이라고 공을 돌린다. “처음 토마스를 연기할 때는 매번 표현되는 게 달랐어요. (웃음) 감정들이 격하게 올라왔는데 그걸 숨기지 않고 다 표현했어요. 그렇게 무대에서 마음껏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초연부터 앨빈을 완성했던 석준이 형이 든든하게 버텨줬기 때문이었죠.” 


이런 두 사람의 노련한 호흡은 이인극이라는 형식 안에서 자연스레 장점으로 승화된다. <조지 엠 코핸 투나잇!>과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로 일인극과 이인극을 모두 경험한 고영빈은 극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수 인원이 출연하는 극을 선호한다. 그중 더 희열을 느끼는 것은 극에 대한 몰입과 연기 호흡을 다 느낄 수 있는 이인극이다. “일인극은 돌발 상황에서 누구도 못 도와준다는 공포가 있잖아요? 반면 이인극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와 연습을 많이 해서 올라간다면 공연 도중 실수를 해도 재밌어요.” 


그런 이인극 안에서 고영빈의 토마스에 대한 해석도 자연스레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처음에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평범해서 표현에 애를 먹었지만, 적당히 비겁하고 타협적인 소시민 토마스의 모습에서 그는 점차 동질감도 느끼게 됐다. 이석준은 오히려 고영빈의 성품이 앨빈을 닮았고 자신이 토마스에 가깝다고 귀띔을 해줬지만, 고영빈은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앨빈 같은 성격을 갖고 싶죠.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매번 의미를 갖고 인간관계를 맺는 성격.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잘 안 돼요. 그래도 늘 행복하고 여유롭게 살려고 하는 제 모습에서 석준이 형이 앨빈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네요.” 


앨빈을 지향하는 토마스인 고영빈은 그래서 얼마 전 뉴욕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나이가 들면서 불안하고 흔들릴 때마다 생각을 재정비하고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다. 신기한 건 지난 2011년 공연 전에도 고영빈은 똑같은 이유로 뉴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휴식이 끝나갈 무렵 첫 번째로 연락이 온 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였다. 이 작품이 고영빈에게 운명적인 무언가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자신의 송덕문을 스스로 쓸 수 있다면 


이석준 

어떤 말보다는 이런 마음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워낙 술을 좋아하셨던 어떤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이만 한 위스키를 장례식장에 놓고 

방문객들에게  한 잔씩 들고 가라는 손편지를 써놓고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상갓집에서 사람들이 울면서 한 잔씩 마셨대요. 

그런 마음이면 될 것 같아요.

고영빈 

송덕문은 잊힐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겨주는 거잖아요. 

배우 고영빈으로는 늘 선택이 옳았던, 인생을 잘 살다 갔던  사람이고 싶고, 

인간 고영빈으로는 늘 바른 길을 갔던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음, 말하고 보니 비슷한 내용이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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