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넘버3일지도 모를 문화 도시 함부르크
공연의 장르를 국한하지 않고 즐기는 필자에겐 런던이나 뉴욕 방문은 늘 설렌다. 그곳에 가면 꽉 찬 공연 관람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다. 최고의 오페라와 발레, 오케스트라 그리고 뮤지컬까지 좋아하는 공연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단과 로열 발레단 그리고 런던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 필하모니아, 로열 필하모닉, BBC 심포니까지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는 런던. 최근 명성이 주춤하긴 하지만 뉴욕 필하모닉과 명실상부 넘버 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그리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를 만날 수 있는 뉴욕.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가득 매운 뮤지컬 극장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공연 문화에 이만큼의 역량을 가진 도시가 또 있을까? 베를린이나 비엔나, 파리도 문화 도시로 손색이 없지만 런던과 뉴욕에 비하면 미미하다. 이들과 견줄 수 있는 도시는 함부르크(Hamburg) 정도일 것이다. 유럽 최고의 명문 교향악단으로 불리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최고의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이끄는 함부르크 발레단, 독일 최초의 상설 오페라단과 극장이 태생한 곳. 그리고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 신작 뮤지컬을 상시 만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함부르크이다. 게다가 브람스와 멘델스존이 이 도시에서 태어났으며 비틀스가 영국에서 알려지기 전부터 이곳 레퍼반에서 활동을 했으니 사실상 함부르크는 비틀스의 음악적 고향인 셈이다.
함부르크는 유럽 최대의 무역항 중 한 곳이자 베를린에 이은 독일 제2의 도시. 한자동맹의 중심지로 14세기 무렵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햄버거(hamburger)는 독일의 지명 함부르크(Hamburg)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여 사실 꽤 익숙한 도시이다.(도시 이름 뒤에 -er를 붙인 햄버거는 “함부르크에서 온 사람이나 물건”을 뜻한다.)
함부르크의 문화유산
함부르크 주립가극장(Hamburg Staatsoper)에는 같은 시즌 오페라단과 발레단의 공연이 병행해서 올라간다. 이런 시스템은 거의 모든 서구의 오페라 극장에서 비슷하게 운용된다. 공연장 이름에 가극장을 붙이는 이유는 대개 오페라단이 간판이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 코펜하겐 등 반대로 발레단이 전면에 나서는 도시들도 몇 있지만 (사실 함부르크도 마찬가지다.) 역시나 작품 횟수로는 발레보다는 오페라가 앞선다. 함부르크의 번화가인 겐제마르크트(Gansemarkt)에 위치한 주립가극장의 외관은 유럽의 전통 오페라 극장과는 다르게 근대적이다. 1678년 독일 최초의 상설 오페라단이 발족하고 이어 상설 오페라 극장이 개관했다. 그 어떤 오페라 극장 못지않은 전통과 역사를 지닌 곳이다. 1844년 바그너가 자신의 첫 오페라인 <리엔치>를 직접 지휘하였으며, 1897년부터는 말러가 이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재임하기도 했다.
여기서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 1942~ )의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미국 출신으로 생존해 있는 당대 최고의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그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부터 지금까지 함부르크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함부르크 발레단을 단시간 내 지금의 명성으로 이끌었다. 2013년 40주년이 되는 해에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존 노이마이어를 곁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 도시와 예술가가 그만큼의 세월을 같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존 노이마이어의 함부르크 발레단이라 명명하고 있다.
사실 함부르크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함부르크 심포니 역시 같이 활동하고 있는데, 두 연주 단체가 상주해 있는 곳이 요하네스 브람스 광장에 위치한 라이스할레(Laeiszhalle) 또는 뮤직할레(Musikhalle)이다. 라이스할레의 대극장(2,025석)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S.프로코피예프, P.힌데미트 같은 작곡가들이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했던 곳이기도 하다. 건물의 파사드는 함부르크의 지정학적 위치답게 북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함부르크는 2017년 1월 완공을 목표로 새로운 비전을 세우고 있다. 바로 하펜시티에 위치한 엘브필하모니아 홀(Elbphilharmonie Hall)을 건립하는 것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수상자인 스위스 출신의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디자인한 이 연주홀의 평면도와 조감도를 봤는데, 이런 입면과 평면을 가진 공연장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혁신적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과 2010년 바젤의 비트라하우스를 설계하기도 한 이들은 시쳇말로 현재 가장 핫한 건축가 중 한 팀이다. 최근 늘어나는 건축 비용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는 등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이 연주홀이 완공되는 날이면 공연장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제3의 뮤지컬 도시
뉴욕과 런던에 이은 제3의 뮤지컬 도시는 어디일까? 두 도시가 으뜸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도쿄일 수도, 어쩌면 서울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어떤 관점에서 충분히 함부르크일 수도 있다. 네덜란드의 다국적 문화 기업 스테이지 엔터테인먼트(Stage Entwertainment)가 함부르크에서 거둔 성공 때문이다. 역사는 오래지 않다. 불과 20년 남짓 동안 <라이온 킹>, <타잔>을 시작으로 최근 <록키>와 <오페라의 유령>의 연이은 성공은 뉴욕이나 런던과 달리 독일어라는 지역에 국한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물론 천만이 넘는 인구의 도쿄와 서울에 비해 인구 이백만 명이 안 되는 함부르크를 수치적으로만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해 전 통계이지만 함부르크의 뮤지컬 시장은 연 매출 2억 유로로 무시 못할 규모다. 연일 매진 행렬인 <라이온 킹>의 전용 극장은 뉴욕 민스코프 극장이나 런던의 리세움 시어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함부르크 항구 건너편에 위치한 극장을 가기 위해서는 노란색 사자 얼굴을 한 전용 배를 타고 엘브 강을 건너야 한다. 공연을 보기 전의 설렘을 안고 강을 건너는 특별한 경험은 잊을 수 없다.
뉴욕, 런던, 파리, 비엔나, 베를린, 밀라노 등의 도시는 문화적으로 적어도 한 분야 혹은 그 이상의 영역에서 최고라고들 한다. 하지만 공연 문화라는 틀만 놓고 넘버3, 세 번째의 도시는 개인적으로 함부르크라고 생각된다. 어느 한 분야도 으뜸은 아니지만 모든 분야의 문화를 일정 수준으로 갖춘 도시이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5호 2015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