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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INTERVIEW] <마돈나> 김영민 [No.143]

글 | 송준호 사진 | 김수홍 2015-09-09 5,891

‘김영민’이라는 우주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고 마음껏 사악한 행동을 일삼아도 왠지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이 있다.  최근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마돈나> 속 김영민이 그렇다. 이 영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당해야 했던 ‘마돈나’라는 여성을 비추며 비열하고 이기적인 남성 사회를 고발한다. 김영민은 마돈나의 목숨을 노리는 ‘갑 중 갑’ 재벌 2세 상우 역을 맡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박는 차가운 독설을 내뱉어도, 정작 그의 눈빛은 공허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한 표정과 눈빛.  이 사람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이유 있는 악한의 존재감
                     
칸은 잘 다녀오셨나요? 해외 영화제 방문 경험이 처음은 아니죠?
제가 김기덕 감독님과 작업을 많이 해서 다들 그런 줄 아는데, 이번이 처음이에요. 작년에 <일대일>로 드디어 베니스에 갈 뻔했는데 작업 일정이 겹쳐서 못 갔어요. (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즐겨보려고 했는데, 비행 시간도 길고 영화 상영하고 인터뷰하고 나니까 일정이 다 채워지더라고요. 영화계 관계자나 배우들과도 대화하고 싶어도 각자 너무 바쁘다 보니까 눈인사밖에 못하겠더라고요. 아무튼 재미난 경험이었어요. 


반응도 좋았다고 들었어요.
물론 상은 못 받았지만 기분 좋게 하는 말들이 있어요. 레드 카펫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을 총괄하는 여성분이 저에게 반갑게 인사하면서 ‘영화 봤는데 당신 나올 때마다 화가 나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고 웃더라고요.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웃음)


해외 영화제에 선다는 건 분명 큰 영광이지만, 배우로서 최고의 순간은 따로 있을 듯해요. 
상 받는 건 어찌됐든 기분 좋은 일이죠. 부담감도 있지만 저를 채찍질하게 하는 계기도 되니까요. 상도 좋지만 말씀대로 내가 생각하는 연기를 잘했을 때나 감독이나 스태프, 상대 배우와 호흡이 잘 맞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쾌감 같은 걸 느껴요. 연극이든 영화든 배우는 결국 내면의 변화로 상대방과 소통하는 건데, 그게 잘 맞아떨어지면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예전에 영화 <경축! 우리 사랑>에서 김해숙 선생님과 연기할 때 그런 느낌을 받았죠. 


그런 순간은 뛰어난 배우들끼리 작업해도 항상 오는 건 아니라더군요. 
맞아요. 세계 일류, 아무리 유명한 배우가 오더라도 항상 있을 순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순간이 올 때를 대비해 계속 갈고닦는 게 배우가 할 일인 듯해요. 물론 배우마다 그 순간에 임하는 스타일은 다 다른 것 같긴 해요. 치밀한 준비보다는 즉흥적으로 해야 뭔가 나오는 사람도 있고, 정석적으로 사전에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본인은 둘 중 어느 쪽이에요?
전 둘 다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좀 아카데믹한 편이었죠. 대본 받으면 무조건 도서관 가서 관련 자료들 읽고 철저히 분석하는. 그런데 여러 제작 팀들을 만나면서 즉흥적인 연기도 해보니까 이제 두 가지 방식이 내 안에 녹아든 것 같아요. 물론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고민이나 연구가 있지 않으면 감독이나 다른 배우와 소통이 잘되지 못하겠죠.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눈물이 났다고 했는데, 그런 상황을 만든 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상우)이죠. 어찌 보면 악인의 전형인데, 입체적인 인물로 만드는 데 고민을 많이 했겠어요.
배우가 작품의 느낌에 휘둘리면 안 되겠죠. 그 느낌을 떨쳐내고 객관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어요. 또 감독님도 상우에게서 선과 악이 다 보였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하셔서 더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상우는 겉으로는 악인이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했어요. <배트맨>의 조커가 자신을 악이라고 여기진 않듯이요. 상우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자본주의 권력을 대표하는 상우가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결국 상우도 그 체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에서도 상우가 악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의 공허하고 헛헛한 눈빛을 카메라가 자주 클로즈업하는데, 바로 그런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시선이었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웃음) 사실 자본의 욕망과 논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거거든요. 하루를 살면서도 갑이 될 때도 있고, 을이 될 때도 있고. 상우가 자신의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는 간호조무사 해림에게 “당신 같은 눈을 갖게 될까봐 두려워”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녀는 정말 텅 빈 내면을 지닌 여자예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상우는 그런 게 두려운 거죠.


영화의 주제를 감안하더라도 <마돈나>에 나오는 남자들은 다 인간말짜처럼 그려지죠. 연기를 하면서 남자를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던가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선진국 중에도 여성의 지위가 낮은 곳이 여전히 많잖아요. 우리가 소수자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 영화가 그저 픽션만은 아닌 이유는 이런 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거죠. 자기 가족을 살리려고 남을 죽이는 일이 안 벌어진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사회 복지 기금을 받으려고 부모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우리는 돈이라는 권력 앞에서 잔인해져요. 그리고 그 권력을 쥔 자들은 대부분 남성이고요. 영화는 그 부분을 잘 건드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감독님께 그런 메시지도 보냈어요. ‘정신 못 차리는 남자들이 보고 정신 차렸으면 좋겠다’고. 


그 말대로 이 작품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죠. 그동안 연극이나 아트하우스 영화를 주로 해온 만큼 그런 메시지가 더 절절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정말 답이 없더라고요. (웃음) 예술이 뭔지도 모르겠고. 연극이 예술인지, 영화가 예술인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연극이든 영화든 그걸 보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예술의 사회적 기능 같아요. 



연극보다, 영화보다, 연기
                       
10년 넘게 연극을 하다 영화 <수취인불명>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으로 김기덕 감독과 다시 작업하며 자신만의 날선 눈빛을 세상에 알렸다. 그가 늘 상처받은 짐승 같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경축! 우리 사랑>에서는 여자 친구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순박한 세탁소 남자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는 ‘똘기’ 넘치는 형사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넓은 간극의 캐릭터 소화가 가능한 건 그의 뿌리이자 지금까지도 줄기 역할을 하고 있는 연극 무대에서의 풍부한 경험 덕분이다. <햄릿>, <에쿠우스>, <칼집 속에 아버지>, 등 김영민은 내로라하는 연출가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 배우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수취인불명>과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김영민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연기 면에서 어떻게 발전했다고 생각하나요? 
꾸준히 변화했을 것 같아요. 당시는 뭔가 안 풀리면 열심히 한 만큼 실력이 늘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웃음) <수취인불명>이 2001년 작이니까 14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죠.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세월을 겪는 것 또한 배우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빨리 잘되고 싶은 욕망이야 다 있겠죠. 하지만 작품이 없을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으니, 결국 세월을 어떻게 잘 겪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세월 동안 연륜이 생길 수도 있고 연기의 방식이 변할 수도 있는데, 그게 마침 세상과 잘 만나면 좋겠죠. 


얼마 전 오랜만에 로 다시 무대에 섰죠. 초연 때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을 이번에 완성하고 싶다 했는데 만족했어요?
그런 게 있어요. 어느 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이미 작업을 마친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는 거예요. ‘아! 그때 그렇게 할걸!’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2~3년 지난 대본을 다시 볼 때도 새로운 게 보이곤 해요. 그래서 는 초연 때 엄청나게 파고들었어요. 일단 정신없이 한 번 하고 나면 다음에는 좀 더 여유있게 디테일에 매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재연이 오히려 초연과 비슷해지더라고요. 그때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무대 예술은 보완을 계속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신인 때부터 무대와 스크린 작업을 쭉 병행해 왔는데, 대개 영화로 이름을 알리면 무대에 서지 않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것 같아요.
영화 할 때는 연극하고 싶고 연극할 때는 영화 하고 싶고.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요. 이번 연극도 ‘왜 3년 만에 하느냐’는 말도 들었는데, 오랜만이긴 해도 연극을 놓은 건 아니거든요. 앞으로도 둘 다 같이한다는 생각은 변함없고요. 지금은 연극과와 영화과로 나뉘었지만 저는 ‘연극영화과’를 다녀서 그런지 두 장르를 병행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많은 작품들을 해오면서 돌파구가 안 보여서 어려웠던 적도 있겠죠?
매 작품이 그런 편이에요. 특히 <햄릿>을 할 땐 제가 분석 스타일이어서 도서관에 갔는데 자료만 평생 보겠더라고요. (웃음) 정말 답이 안 보여서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왔죠. 그런데 아마 햄릿을 맡은 분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적당한 긴장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그게 자신을 압박하게 되면 연기에 도움은 안 되는 듯해요. 결국 다 내가 하는 거니까 자신을 믿고 여유를 가져야 표현도 풍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팠다면 이제는 직관의 힘도 커졌을 듯해요.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대본을 깊숙이 안 파는 건 아니지만, 말씀대로 직관도 생기고 주변의 호흡을 느끼면서 자동적으로 되는 것들이 있어요. 특히 연출님이나 감독님과의 소통이 중요해요. 이번 <마돈나>에서도 감독님께 받은 대본에 뭉크의 마돈나 그림이 있어서 물었더니 ‘마돈나는 섹시한 팝가수도 있지만 성모 마리아도 있다’고 설명해 주시더라고요. 그 그림에서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괴로움인지 쾌락인지 모르는 여자의 주변 공기가 문득 상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해림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주변 공기를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그간 작업을 많이 해온 박근형, 김광보 등 최고의 연출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겠네요.
제 연기 인생에서 박근형, 김광보, 이성열, 최용훈, 양정웅 선배님, (고)선웅이 형, 이런 분들을 만나면서 연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분들의 말을 이해하고 배우로서 해결해야 했거든요. 그렇게 고민하면서 많은 공부가 됐던 게 사실이에요. 영화를 찍을 때 감독마다 철학이 다른 경우가 많거든요. 심지어 같은 장면을 주문해도 다 다르게 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땐 배우가 감독의 의도를 빨리 파악해서 해내야 하는데, 그런 순발력의 자양분이 그 연출가 선배님들과 함께한 시간이에요. 그게 없었다면 저는 좀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돌이켜 보면 그분들을 만났다는 건 제 인생에서 굉장히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이걸 어떻게 전달할 수 없어서 늘 혼자 속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웃음) 


그런 분들이 배우를 나눌 때 보통 뜨거운 배우와 차가운 배우로 나누는데, 제가 느끼기에 김영민이라는 배우는 차가움 속에 뜨거움도 지닌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분들한테 배웠던 것 중 하나예요. 술을 마시다가 “야, 네 안에 우주가 있어” 이러시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답을 주는 연출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그 의미를 고민하면서 발전하게 되는 거죠. 그 말대로 제 안에는 우주처럼 많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이번 달에는 새 영화 <협녀, 칼의 기억>도 개봉하죠?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왕 역을 맡았어요. 그런데 두 번 다 정상적인 역은 아니네요. (웃음) 왕으로서 체통과 위엄이 없어요. 


벌써 40대 중반이에요. 50이라는 나이엔 어떤 배우가 돼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쉰 살인데 그때도 이 얼굴이면 어쩌지?’ 예전에는 동안이 걱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평범한 얼굴이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를 믿고 티켓을 기꺼이 살 수 있는 배우가 돼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걸 떠나서, 연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게 사는 배우가 되면 좋겠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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