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으로 재탄생한 근대사
조선 말은 창작자들의 보고(寶庫) 같은 시기지만, 지난 10여 년간은 그 관심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황실사에만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
반면 <손탁호텔>은 황실의 주변부에 있던 ‘손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이상훈 작가와 민유경 작곡가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지만 정작 기록으로는 많이 남아있지 않았던 손탁을 미스터리한 인물로 되살려냈다.
손탁호텔이라는 근대의 상징도 이들의 변주를 통해 매력적인 판타지로 재탄생한다.
{작품 소개}
개화기 조선에 서양식 호텔이 들어선다. 호텔 주인은 미지의 서양 여인, 미스 손탁. 그녀의 이름을 딴 손탁호텔에 어느 날 보석 목걸이를 갖고 도망친 소년이 쫓기듯 들어온다. 손탁은 그를 숨겨주고 호텔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렇게 소년은 과거를 지우고 조선 최초의 호텔 보이 ‘준’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준이 가진 보물을 빼앗기 위해 정체불명의 사내가 손탁호텔에 나타난다. 과연 준과 손탁은 위기를 넘어 각자의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까.
역사의 작은 흔적에서 팩션으로
작품의 시작은 손탁호텔에 관한 짧은 기록이라고 들었다.
이상훈 조선 개화기에 관한 한두 줄 정도의 기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최초로 판매한 곳이 어디냐는 내용이었는데, 그중 하나로 손탁호텔이 소개되고 있었다. 조선은 왠지 흑백 공간 같은 느낌이었는데, 화려한 서양식 호텔이 있었다는 기록이 흥미로웠다.
민유경 둘 다 이미지로 표현하는 걸 좋아해서 그때도 이상훈 작가는 머릿속에 그린 손탁호텔과 손탁을 이미지로 설명해 줬다. 흰옷 입은 여자가 혼자 빨간 벽돌집에 사는데,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정장이나 턱시도를 입고 있고, 요리하는 풍경이나 음식 냄새는 이국적이라는 묘사였다. 대충 이런 설명이었는데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드물긴 해도 앞서 손탁호텔이라는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있다. 참고한 것들이 있나.
이상훈 차범석 작가의 『손탁호텔』이 있어서 읽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손탁호텔의 이미지와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었다. 호텔 내에서 정치적 관계를 맺는 건 참고가 됐지만 사실 그 작품보다 제목에 호텔이 들어간 고전 작품들을 더 많이 참고했다. 가령 뮤지컬화도 됐던 흑백 영화 <그랜드 호텔>이 그렇다. 호텔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대개 그곳에 오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경우가 많으니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도 했지만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위해서는 캐릭터와 사건에 집중해야 했다.
장르를 떠나 일단 소재가 주는 음악적 영감이 있었을 듯하다.
민유경 그때 떠올렸던 손탁호텔의 이미지를 오프닝 곡 ‘손탁호텔’에 담았다. 처음 이 소재를 들었을 때 생각은 뻔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곡 진행 코드나 화음들이 사실 변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듣기 편한 멜로디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음을 충돌시키면서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음악으로 들려주려 했다.
‘손탁’이라는 인물과 ‘손탁호텔’이라는 장소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데, 주로 미스터리와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상훈 이 이야기를 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했던 원칙은 신인 창작자로서 구한말이 주는 상투성에서 탈피하겠다는 거였다. 실존 인물과 역사의 무게에 눌리면 결국 또 비슷해진다. 그래서 손탁호텔의 사람들도 손탁 외에는 모두 허구의 인물로 설정했고, 역사적 인물이나 큰 사건은 배경으로만 기능하게 했다.
작품의 성격이 이렇게 정해진 후 곡 작업은 수월했나.
민유경 개화기라지만 어쨌든 조선이다. 그래서 음악에 민족적 색깔을 넣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오프닝 곡도 그 색을 넣은 버전이 원래 따로 있었다. 잘 살리긴 했지만 결국 뺐다. 이상훈 작가가 주는 조선 말투의 가사에 내가 쓴 서양의 멜로디를 쓰면 미묘하게 충돌했는데, 이걸 조율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잘 섞고 싶은 욕심이 컸다. 호텔 안의 세계와 바깥인 조선 사회를 대비시키고 싶었던 거다. 결국은 호텔의 느낌에 집중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작품을 가장 잘 반영하는 곡을 꼽아본다면.
이상훈 손탁호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역시 오프닝 곡이다. 처음 떠올렸던 손탁호텔의 이미지와 가장 흡사하다. 하나 더 꼽으면 ‘커피를 내려’다. 작품에서 커피는 단순히 서양의 문물이 아니라 극 전개상 굉장히 중요한 오브제다. 손탁이 커피를 내리는 장면은 ‘커피=손탁=손탁호텔’이라는 등식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비밀이 숨어있는 호텔과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커피는 무언가 숨기기 쉽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유경 난 ‘홈(Home)’이다. 사실 이 곡은 수정 과정에서 한 번 빠졌다가 주제가 바뀌면서 돌아왔다. 엔딩으로는 이 곡이 좋다는 의견이 많았고 반응도 좋았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과 다르게 굉장히 전형적인 곡이다. (웃음) 이 작품은 몇 곡을 빼면 전반적으로 다 어두워서 엔딩 곡만큼은 밝게 가도 될 것 같았다.
시행착오로 확인한 가능성
손탁은 미지의 서양 여인이라고만 설명되고 있는데, 어떤 인물을 참고했나.
이상훈 특정한 롤모델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고증을 치밀하게 하다 보면 자꾸 거시적인 맥락에서 인물을 그리게 된다. 또 고종과 명성황후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고. <손탁호텔>은 호텔과 목걸이라는 두 키워드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기 때문에, 준을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함과 조선에서 호텔을 운영할 정도로 카리스마 있는 여자라는 설정이 중요했다. 또 손탁에 대한 기록 중 재색을 겸비한 사교계 인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핵심적인 역할을 할 손탁이 의외로 별 활약이 없다. 사건은 대부분 준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손탁은 준을 보조하는 데 그치는 인상이다.
이상훈 이번 리딩 공연에서 생략한 부분 중 제일 아쉬운 점이다. 행동하는 주체가 준이다 보니 손탁에게도 비화를 배치하면 밸런스가 안 맞아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대본과 악보 수정 과정에서 준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손탁의 회상이나 준과의 유대 시간이 많이 빠졌다. 이후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손탁이 호텔에 쫓겨온 준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초반부도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사연을 듣기도 전에 준을 맹목적으로 돕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상훈 두 사람의 유대감이 약해진 것과 목걸이의 의미가 생략된 것도 마찬가지로 이번 공연의 시간상 한계였다. 원래 구상이 돼 있었는데 사건 중심으로 리딩 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왜?’의 영역이 대거 생략된 것 같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준을 쫓는 사내(희재)와 대치하는 장면은 관객들의 몰입감이 높았다.
이상훈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다. 특히 커피로 사내를 왜 안 죽였나 하는 의문이 가장 클 텐데, ‘씁쓸한 온기에 악마를 숨겨’라는 가사처럼 사내를 처리할 수 있지만 커피는 준과 손탁의 추억이 담긴 오브제이기 때문에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시점에서 손탁호텔을 자신의 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호텔을 지키려고 한 거다.
민유경 여기서 준-희재-손탁 삼자 간 에너지가 부딪치는 노래가 더 들어가면 좋을 듯하다. 지금은 이 장면에만 노래가 들어가 있는데, 사실은 그 전에도 암묵적인 기 싸움을 보여줄 수 있는 넘버가 삽입돼야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금 장면은 좀 급한 느낌이 있다.
고종에 대한 창작물들 중 유독 커피에 대한 것들이 많아서 특히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
이상훈 사실은 고종의 ‘가비’ 때문에 커피를 활용하는 부분에서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양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커피라고 생각했다. ‘신비한 공기, 서양의 향기’ 같은 가사들에 커피가 주는 느낌을 담았다.
리딩 공연을 해보니 보완할 부분들이 명확히 보이겠다.
민유경 희재의 노래를 의도한 만큼 잘 살리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리딩 공연에서는 오프닝과 단체 신 외에는 대부분 솔로로 진행했는데 다음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두 모여 부르는 합창곡을 넣어보고 싶다. 성비(性比)도 조정하고 싶은데, 이번에는 여자가 두 명밖에 없고 더구나 손탁은 캐릭터 성격상 무리들과 섞이면 안 돼서 합창이 미흡했다. 관객 반응도 웃거나 찡해야 하는 지점에서 담담했는데, 자제한 부분들을 밀어붙여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상훈 손탁호텔이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손탁이 로비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로비스트로서의 손탁과 추적자에게 쫓기고 복수를 해야 하는 준의 사연이 손탁호텔이라는 공간에서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지금 대본에서 보완해야 할 과제다.
두 사람의 첫 작업인데 이번 작업을 통해 느낀 것이 있다면.
민유경 둘 다 좋아하는 것들을 첫 작품에서 많이 했다. 역사적 소재, 미스터리한 장르. 우리 취향에는 그냥 사랑 이야기보다는 이런 게 맞는 것 같다.
이상훈 우리의 호흡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작업할 때 서로의 영역은 믿고 맡기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배우나 스태프, 관객 들의 피드백을 받고 보니 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취향이나 리듬대로만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앞으로는 좀 더 사고를 열어놓고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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