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신과 함께 - 저승편>이 호평 속에 공연을 마쳤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신과 함께 - 저승편>은 사망한 김자홍과 저승 변호사 진기한이 49일 동안 일곱 개의 지옥을 통과하는 이야기.
그런 원작의 무대화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부분은 다름 아닌 지옥의 시각화였다.
그동안 서울예술단과 여러 작품을 함께해 온 정재진 영상디자이너는 LED 스크린을 활용해 모던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지옥의 풍경을 완성했다.
정재진 영상디자이너의 LED 영상 제작기
<신과 함께 - 저승편>에서 영상의 역할은 원작 웹툰이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았던 상상 속 저승의 모습을 무대 위에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코믹한 B급 정서를 살려 연출된 뮤지컬이지만, 영상만은 살벌한 지옥을 보여주는 데 충실하고 싶었다.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무시무시하고 생생한 지옥. 이를 위해 택한 수단이 바로 무대 바닥에 LED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기존 뮤지컬 무대에서는 영상을 사용할 때 대개 세트 위에 빔 프로젝터로 영상 이미지를 투사하는 프로젝션 방식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프로젝션 방식을 사용해 바닥에 영상을 투사하면 배우의 그림자나 핀 조명의 영향을 받아 보이지 않기 십상이다. 반면 LED는 어떤 상황에서나 선명한 영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상이 그리는 지옥의 풍경과 그 안에 있는 배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극의 몰입감을 높일 수 있다. LED는 그 자체로 조명이 되기도 한다. 기존 뮤지컬 무대에서 프로젝션 영상이 이미지를, 조명이 빛을 담당했다면 LED는 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는 셈이다. 여기에 무대 바닥을 형성하는 하드웨어까지 LED는 영상, 조명, 세트 세 가지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LED를 쓰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단 국내 뮤지컬에서 처음 시도되는 일이다 보니 주변에서 모두 우려하며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예산. 무대 바닥에 80제곱미터의 LED를 깔고, 저승열차 창문에 고해상도 LED를 사용하려면 2억 원에 가까운 예산이 필요했는데, 그럴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는 원작 속 지옥을 표현하는 데 LED가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고, 개인적인 인맥을 총동원해서 직접 장비 협조를 받아온 끝에 LED 무대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LED 영상이 큰 주목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 무대 영상에 대한 국내 인식 수준은 매우 낮다. 공연을 보고 바닥 LED를 무대디자이너나 조명디자이너의 작품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상 디자인이라고 하면 대개 이미지를 디자인하는 일만 생각하는데, 무대영상 디자인은 하드웨어 디자인, 즉 영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를 선택하고 공간을 구성하는 일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작 <이른 봄 늦은 겨울> 때는 영상과 무대 세트를 내가 함께 디자인하기도 했다. 영상이 세트에 비쳤을 때의 효과를 가장 잘 이해하고 상상할 줄 아는 것이 영상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2013년 <더뮤지컬>과의 인터뷰에서 무대 영상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향후 2~3년 안에 LED 사용이 늘고, 영상디자이너가 무대 세트까지 책임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올해 작업들을 통해 이를 증명하게 되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무대미술이라고 하면 세트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무대미술은 세트 뿐 아니라 영상, 조명, 배우 등 다양한 요소의 조화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오히려 현재 뮤지컬을 포함한 공연 무대의 패러다임은 물리적 세트에서 영상으로 넘어가고 있다. 앞으로는 물질 공간과 이미지 공간을 넘나드는 영상 매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 많아질 것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빠른 발전 속도로 봤을 때, 뮤지컬 무대에서 홀로그램을 만날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기대한다.
01. 바닥 LED 설치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무대 바닥이 고르지 않아 LED 타일 밑에 각각 다른 높이의 판을 끼워 수평을 맞춰야 했다. LED 타일 위에는 강화유리를 깔았다.
하지만 워낙 여러 배우가 올라가 격한 춤을 추다보니 그 충격을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하루는 공연 중 LED 일부가 깜빡이는 일이 생겼는데, 김다현 배우가 연기인 척 그 위로 점프를 해서 다시 불이 들어오게 만들기도 했다.
02. 저승차사의 아우라
저승차사들이 초인적인 힘을 사용할 때면 배우가 서있는 바닥에 아우라가 퍼진다. 이 장면은 송용진 배우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배우 혼자 포즈만 취하기가 어색하니 영상으로 만화적 효과를 넣자고 한 것.
이를 위해 영상이 배우의 움직임과 실시간 연동되는 ‘리얼타임 인터액션(Real-time Interaction)’ 기법이 활용됐다.
적외선 열감지 카메라가 배우의 위치를 파악하면, 영상이 그 위치 정보를 반영해 배우가 있는 곳에 아우라를 만든다.
03. 저승열차 창문
저승열차 창문에는 3mm 입자의 고해상도 LED를 사용했다. 음악 방송에서 쓰는 고가의 장비로, 역 이름 글씨까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상은 지하철이 대화역에서 출발해 초군문역에 도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화역 장면은 무대 전환 때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잘릴 뻔했으나, 원작 역시 대화역에서 시작한다는 점과 이승과 저승의 연결고리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대화역을 빼고 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출부를 강력하게 설득한 끝에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
04. 지전에 투사된 영상
전면에 투사한 영상은 바닥 유리에 반사된 빛과 지전(紙錢)의 재질 탓에 예상보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셋업 때 이 문제를 발견한 뒤, 아예 영상 컨셉을 수정했다. 전면 영상은 모노톤에 화이트 라인 위주로 은은하게 깔고, 강렬한 색감의 바닥 LED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05. 간판과 업경
간판과 업경에는 대상의 형태를 스캔해서 그에 맞게 영상을 투사하는 ‘3D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 기법이 활용됐다.
간판에는 이승의 각종 브랜드명을 패러디해 넣었는데, 원작의 ‘김밥지옥’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헬벅스’ 등 나머지는 영상 팀이 머리를 굴려 추가했다.
(그중에는 ‘서울예술단’을 패러디한 ‘옥황예술단’과 원작자인 주호민 작가의 이름도 있다.)
업경(業鏡)에 생전에 행한 일을 검색할 때 ‘주글(Joogle)’이라고 뜨는 장면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이때 나오는 김자홍의 사진은 실제 배우의 어릴 적 사진이다.
염라대왕과의 셀카 사진이 업경에 실시간으로 투사되는 장면은 염라대왕 역 금승훈 배우가 직접 낸 아이디어.
06. 한빙지옥
한빙지옥에는 얼음 절벽에 갇힌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음 같아선 절벽에 갇힌 얼굴 하나하나를 모델링해서 할리우드 CG처럼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예산도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택한 방법은 영상 팀원들 얼굴에 늘어나는 천을 대고 촬영하는 것! 아날로그적인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할리우드 CG 못지 않았다.
관객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장면으로 꼽히는 한빙지옥이지만, 영상 팀에서는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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