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자유라는 인생의 각본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나 주변의 환경, 혹은 유전자의 영향에서 무한정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한다 말하고 안아주기’의 경우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유익한 행동이지만 어색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외면당한다. 반대로 ‘화내고 토라지기’처럼 모두를 힘들게 하는 행동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지. 또한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있더라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실존주의 심리학자와 철학자는 ‘경험적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적으로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경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만들어가기보다는 주어진 경험대로 살아가기에 급급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각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배우와 비슷하다. 배우는 각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극 중 배우에게는 자유의지란 없다. 그저 누군가가 써 놓은 각본대로 움직일 뿐.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배우와 달리 우리는 각본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우는 손에 들린 각본을 따라가지만, 우리는 각본 없는 연극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그의 남자 친구이자 조선 최고의 극작가 김우진도 그렇다. 이름 모를 사내를 통해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키워가지만, 사내의 이간질로 갈등하기도 한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도 하고, 더 많이 싸우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사내의 의도와 계획이다. 사내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뿐만 아니다. 김우진이 쓰는 연극 각본 역시 사내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다. 그 내용은 윤심덕과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다.
자신의 삶과 사랑이 모두 사내의 의도였다는 사실을 간파한 김우진은 비극으로 끝나는 각본의 결말을 바꾸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물론 일본 유학까지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었던 김우진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중대한 결심을 한다. 모든 상황이 불리하게만 전개되었지만, 김우진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내와 대립하고, 윤심덕의 마음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녹록지 않다. 사내는 고압적인 태도로 과거의 약속을 들먹이거나 때로는 총으로 위협을 하면서 김우진을 압박한다. 윤심덕은 김우진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일을 언급하며 신뢰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불변의 사실이 있다. 사내가 쓰라고 하는 연극 각본을 손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김우진이라는 것이다. 사내는 요구하고, 강요하고, 협박할 뿐 직접 각본을 쓰지 못한다.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김우진은 불안과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만의 각본을 포기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능동적인 자세
의사교류분석이라는 심리치료 이론을 만든 심리학자 에릭 번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삶의 줄거리를 인생 각본(Life Script)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평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사람은 친구나 연인과의 헤어짐을 ‘버려짐’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영향을 미쳐서 결국 버려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결국 현실 세계를 인생 각본에 맞춰서 다시 정의하고, 평가절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릭 번이 인생 각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것이 운명처럼 결정돼 있으니 무력하게 순응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영향을 분명히 인식하고 분석한 후, 자신의 각본을 다시 쓸 수 있도록 재결단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자신은 삶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이자 각본을 고쳐 쓸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저 바다의 물결은 누가 움직이나?
내 인생의 파도는 누가 잠재우나?
이 어둠의 공포를 누가 이겨내나?
정해진 결말은 누가 바꾸나?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아 그건 나의 몫일 뿐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아 스스로 감당해야 해
저 하늘에 쓴다 새로운 결말 적막 속에서
생명을 노래하라
나를 둘러싼 저 수많은 별들에 내 삶을 기록하라
저 바다에 쓴다 내 생의 결말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라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바다에 내 삶을 던지리라
내 삶을 저 바다에 던지리라
김우진 역시 윤심덕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각본을 고쳐 쓰겠다는, 자신의 삶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단을 했다. 또 윤심덕은 과거와 배경뿐 아니라 무엇보다 사내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는 김우진의 결단을 지지했고, 그 것에 참여했다. 인생 각본을 바꿔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의 반대는 물론이고 내면의 갈등, 두려움이나 불안과 싸워야 한다. 마치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삶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2호 2015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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