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명랑을 찾아서
영화 <핸드폰>의 박용우는 언제나 친절한 점원이지만 그 내면에는 무시무시한 악마를 키운다.
뮤지컬 <명랑경성>은 박용우의 캐릭터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명랑한 것이 반드시 유쾌한 것은 아니다.
이은혜 작가와 남궁유진 작곡가는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명랑함을 강요했던 경성 시대에 주목한다.
웃음 검열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진정한 명랑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아직 그 질문은 성글었지만 두 창작자의 첫걸음은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작품 소개}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일제는 조선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웃음 검열을 시행한다. 데파트걸 혜심은 별다른 인식 없이 웃음 검열을 받아들이고, 잠시 마음을 나누었던 선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웃음 홍보 모델에 나선다. 그런데 약속과 달리 그 사진이 군인을 동원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 순응해서 암묵적으로 동조해 온 선우 역시 자신의 명성과 글이 도용되는 상황에서 세상에 반기를 든다. 혜심과 선우는 세상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워가며 진정한 명랑함을 되찾는다.
웃음을 강요하는 시대
한예종 음악극창작과 동기이다. 어떤 계기로 뮤지컬 창작을 하게 됐나?
이은혜 대학교 때 전공은 아니었지만 뮤지컬 작법 공부를 했는데 재밌었다. 그때만 해도 글 쓰는 사람이 될 줄 몰랐다. 북한에 관심이 많아서 북한이탈자지원재단에서 일하기도 하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해봤다. 그래도 글을 쓸 때 가장 칭찬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예종에 들어오게 됐다.
남궁유진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그게 뮤지컬인 줄 모르고 막연하게 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때 작곡을 전공하면서도 뮤지컬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교육대학원에 가서도 고등학교 선생님이 뮤지컬을 하면 잘할 것 같다는 말과, 악기론 교수님이 내 음악이 뮤지컬 같다던 말이 맴돌더라. 그러다 한예종 음악극창작과를 알게 됐고 그해 시험을 봤다.
이 작품은 한예종에서 발표한 20분 뮤지컬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때와 어떤 점이 달라졌나?
이은혜 학교 공연에서는 남자 주인공 선우가 지금처럼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이미 성장한 사람이었는데 이번 리딩에서는 서로 영향을 받아 성장하는 관계로 만들었다. 이들 사이에 월화라는 캐릭터를 추가해서 이 시대의 다양한 청년들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했다.
남궁유진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웃음 검열’을 설정한 것이다.
소래섭의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다』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들었다.
이은혜 이 책은 단순히 일제시대에 명랑 정책을 펴 당시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를 잊게 했다는 사실에서 더 나아가 , 진정한 명랑이 뭘까 하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책 내용 중 당시 지식인 중 한 명은 진실을 알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지만 진실로 명랑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가 나에게 크게 와 닿았다.
경성 시대라는 타이틀은 있지만 판타지 같기도 하고, 로맨스 같으면서 사회 비판적인 블랙 코미디도 다룬다.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나?
이은혜 애초 경성을 시대 배경으로 했지만 리얼하게 그릴 생각은 없었다. 스타일은 만화나 웹툰처럼 가볍게 가는 게 좋겠다는 조언도 들었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웃음 검열’을 우화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장치로 넣은 것이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따라가다 보면 어두운 시대가 느껴지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로맨스와 시대 배경이 시너지를 내지 못한 것 같다.
다양한 스타일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전체 음악의 컨셉을 잡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남궁유진 처음에는 음악적으로 시대를 어떻게 담아낼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시대는 의상이나 말투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편곡 때 아코디언을 추가한 것 이외에 시대적인 느낌을 살리지 않았다. 전체 컨셉을 아이러니로 잡았다. 이들은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잖나. 극 초반에는 백화점의 화려함에 주목해서 음악으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그런데 (총 16곡 중) 9번 뮤지컬 넘버를 중심으로 톤이 확 바뀐다. 후반부에는 드라마에 비중을 두려고 했다.
작품의 컨셉이 가장 잘 드러나는 노래는 어떤 곡인가?
남궁유진 이치로가 웃음 홍보 모델 이면의 진실을 노래하는 ‘웃음 홍보 모델’도 아이러니한 곡이지만, 가장 아이러니한 곡은 ‘루머는 루머일 뿐’이다. 혜심의 말을 믿지 않는 백화점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곡인데 부정적인 단어나 내용도 아니고 그들은 명랑하게 웃지만 결코 밝지만은 않은 느낌을 주어야 했다.
젊은 창작자들의 첫걸음
웃음을 강요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혜심은 데파트걸(백화점 점원)이다. 그 시대가 아니더라도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직업인데, 오히려 웃어서는 안 될 직업이어야 아이러니가 더 부각되지 않을까?
이은혜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이를 깨닫고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당시 가장 발랄하고 명랑한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명랑화 정책을 내세우는데 ‘눈물 금지, 거리 청결, 웃음 서비스’ 그리고 ‘키스 금지’도 있다. ‘키스 금지’는 왜 여기에 포함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명랑해지려면 더 강조해야 하지 않나?
이은혜 일제 시대에 ‘명랑’이라는 의미는 지금하고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당시 명랑은 모범적인 것을 의미했다. 잘 웃고, 순수하고, 건전한 것. 불온하지 않은 것을 명랑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에는 키스가 불온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실제 일제시대에는 키스를 금지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타지 요소가 있고, 관객들이 그런 가치관과 상관없는 현대인인데 굳이 일제시대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넣어야 했을까?
이은혜 고집한 면이 있는데 올리고 보니까 지금의 관객들에게 명랑화 정책을 헷갈리게 하는 요소가 있더라. 명랑화 정책의 개념을 관객들에게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전해 줄 필요를 느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곳은 명랑경성’은 사회의식이 약하고 명랑한 혜심과 이에 반해 부정적인 사회를 인식하고 있는 선우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가사는 대조적인데 같은 멜로디로 진행했더라. 고민을 했을 것 같다.
남궁유진 다른 멜로디를 줄까도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의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다른 멜로디를 주니까 지금까지 쌓아왔던 에너지가 분산되어 버리더라. 오프닝을 시작하고 4분 정도가 지난 시점인데 이 시점에서는 에너지를 쌓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혜심이 선우를 오해하는 상황에서 둘이 만나 부르는 ‘자꾸 생각나는 사람’에서는 혜심은 ‘네’라고만 대답하면서 노래를 전개한다. 이 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은혜 혜심이 뚱해서 ‘네’라고만 하는 상황으로 노래를 만들자는 컨셉을 미리 잡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가사가 나온 것은 아니고, 대사처럼 쓰다가 노래를 만들면서 가사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리딩에서 특히 맘에 드는 곡이 있었나?
남궁유진 리딩하기 전까지는 ‘누굴 위한 명랑경성’, ‘언제쯤 오려나’ 같은 합창곡들이 좋았다. 그런데 막상 리딩을 하니까 웃음 검열을 피해 다니는 사람들을 표현한 ‘꼭꼭 숨어라’가 맘에 들더라. 사람들이 숨는 행동을 상상하면서 썼는데, 조연출이 그것을 알아채 주었고 배우들이 그 장면을 부를 때 보면대 위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며 불렀다. 내 생각을 이해해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 것이 협업의 묘미인 것 같다. 이번 리딩에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은혜 작업을 하면 확신이 없을 때가 많았다.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이 글이 나 혼자만의 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모두의 글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을 두려워하면 여러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알았다. 글만 쓰면 되는지 알았는데 수많은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과정을 겪다 보니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경험했다. 큰 그림을 봤던 것 같다.
남궁유진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어서 기쁘다. 만드는 동안은 혼자와의 싸움이다. 열몇 시간씩 노트북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이 힘들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리딩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흔들림은 없을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1호 2015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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