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찾은 희망
그동안 <시카고>는 여러 명의 록시 하트를 배출했지만 지금 이 캐릭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는 단연 아이비다.
그녀는 최근 1년간 단독 캐스트로 지방 투어에 참여하며 록시 하트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록시 하트를 정복한 그녀가 선택한 다음 목표는 <유린타운>의 호프 클로드웰.
얼마 전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교태를 부렸던 아이비는 민중을 이끄는 부잣집 아가씨로의 변신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귀를 열자 보이는 작품
돌아보면 아이비가 걸었던 뮤지컬 배우의 길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키스 미, 케이트>로 순조롭게 무대에 입성했고, 두 번째 작품인 <시카고>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도 만났다. 이후 <고스트>에서는 연기력과 가창력이 요구됐던 몰리로 표현의 영역을 넓혔다면, 다시 만난 <시카고>에서는 록시 하트를 도맡아 배우로서 매력을 발산하는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이런 지점에서 그녀가 선택한 차기작은 <유린타운>. 이제까지 처음 만난 작품들이 그랬듯 이번 작품도 그녀에게 새로운 난관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어려운 부분은 의외로 노래다. 자신의 SNS에도 ‘고음 많아서 득음할 판’이라고 그 스트레스를 표현했을 정도다. “사실 제가 부르는 곡은 몇 개 안 되는데 성악 발성이 많아서 너무 힘들어요. 오죽하면 제가 ‘저 잘못 캐스팅하신 것 같은데’라고 했을까요. (웃음)” 그래도 그녀는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걸 잘해 내면 업계 관계자들이 ‘아이비가 이런 발성도 되네!’ 하면서 다른 작품의 캐스팅에도 신경을 써주시지 않을까요?” 엄살과는 달리 그녀의 실력은 매일 일취월장하고 있다. 동료와 스태프 사이에선 벌써 별명도 붙었다. 아이비와 조수미의 합성어인 ‘아수미’다.
아이비와 <유린타운>의 인연은 막연한 호감에서 시작됐다. “사실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재밌고 좋은 작품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는데도 그냥 하고 싶었어요. (웃음) 게다가 <시카고> 동료 배우들이 같이하기 때문에 든든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유린타운>은 아이비에게 아직 낯선 작품일 수밖에 없다. 또 10년 만에 돌아온 작품인 만큼, 기존 버전 외에도 아이비만의 인물 해석도 당연히 요구된다. 호프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곱게 자란 순수한 캐릭터지만, 후반부 진행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 섬세한 톤 조율이 필수적이다. “정말 순수한 인물인데 연기를 잘못하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 순수함을 잘 표현하는 게 중요한데, 저는 실제로 순수하지 않아서 표현이 힘들어요.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으니까요’ 같은 대사를 해야 되니까 낯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아요. (웃음)” 호프는 결국엔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이지만 극 전개상 초반엔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비는 “예쁘고 순수하고 발랄하지만 바보는 아니어야 하니, 표현하기 무척 어려운 캐릭터예요”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유린타운> 작품 자체가 인간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라 고민을 필요로 한다. 제목인 ‘오줌 마을’은 생리적인 욕구마저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은유다. ‘자유’라는 말이 왜곡되고 변질되는 오늘날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는 꼭 필요하지만, 또 그것으로 인해 굉장히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양면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요즘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럼 아이비가 극 중 바비나 호프처럼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떨까. 두 사람처럼 민중과 함께 인권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할까. 아이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저는 리더는 못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더구나 아빠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더더욱 못하겠죠. (웃음)” 이렇게 <유린타운>의 급진적인 내용은 아이비에게 종종 공감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대신 그녀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통해 <유린타운>에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은 클래식한 발성이 어렵긴 하지만 랩이나 가스펠 같은 다양한 음악들이 나와서 재밌어요. 상황에 따라 여러 장르의 음악이 변화무쌍하게 나오는데, 이 극은 메시지를 그런 음악에 녹여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이처럼 작품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 또한 아이비가 네 편의 작품을 거치면서 쌓은 노하우다. 배우로서의 성장이랄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대사를 예전보다 훨씬 빨리 외우게 됐다는 것이다. “원래 저 진짜 늦게 외웠거든요. 2012년 <시카고> 때 윤공주 씨와 더블 캐스트였는데 언니가 경험과 연륜에서 훨씬 앞서니까 전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고스트>를 하면서 연기에 재미를 느꼈어요. <시카고>는 원 캐스트로 하면서 무대에서 재밌게 ‘노는’ 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아이비가 무대에서 놀 수 있게 된 건 이처럼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대사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다. ‘나의 연기’보다 ‘작품의 흐름’을 보게 되면서 생긴 좋은 변화다. “이번 연습 때도 확실히 대본 전체의 진행이 보이니까 확실히 대사도 빨리 외워지더라고요. ‘귀가 열렸다’고 할까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스스로 많이 발전한 부분인 것 같아요.”
뮤지컬이 가져다준 것들
아이비는 지난달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가면을 쓰고 가창력을 뽐냈다. 당시 선곡은 박정현의 ‘나의 하루’. 발라드인 데다 트레이드마크인 섹시함을 감췄기에 처음에는 가면 뒤의 인물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판정단은 ‘앙칼진 백고양이’라는 닉네임과 음색을 감안해 어렵지 않게 그녀의 정체를 밝혀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원래 그런 속성이 있지만, 배우는 특히 캐릭터라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다. 가수에서 배우가 된 지 5년째, 아이비는 뮤지컬 무대에 얼마나 익숙해졌을까.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부담스럽다’였다.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에요. 가요계에 비해 더 냉철하게 평가받는 무대잖아요. 그래서 뮤지컬을 하면서 건강 관리나 목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해요.” 그녀에게 뮤지컬 무대는 무겁게까지 느껴진다. 혼자 하는 무대도 아닐뿐더러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해야 하는 배우 본연의 역할 때문이다. “TV 틀면 공짜로 볼 수 있는 그런 무대가 아니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굉장히 특별한 날일 테고, 비싼 비용을 치르고 보러 오는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제가 그분들의 특별한 날을 망치면 안 되죠. 그래서 항상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대에 올라요.”
뮤지컬은 배우 아이비에게 늘 초심을 다져주는 무대이기도 하다. 무대에서 5분 안팎의 공연을 펼쳐도 반응은 항상 열광적이지만, 뮤지컬은 방송만큼 뜨거운 박수가 나오지 않는다. 배우 각각의 연기력 문제도 있지만 관객들이 굉장히 집중해서 보고 듣기 때문에 반응이 늦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아이비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무 반응이 없을 때죠. (웃음) 솔로곡을 마쳤는데 박수가 안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 것들이 가끔 속상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요. ‘아, 나 배우가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아직도 화려한 박수 소리에 길들여져 있구나.’ 배우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아야죠.”
이렇게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녀가 팝스타에서 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의 증거일 것이다. 대중이 환호하고 열광하던 건 ‘댄스 가수’ 아이비였다. 미디어가 아이비를 소비하는 방식도 언제나 ‘앙칼진 백고양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가 미디어의 속성에 딱 맞는 외모와 직업을 가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이비는 인터뷰 때마다 발라드에 대한 욕심을 내비쳐왔다. <복면가왕>에서 댄스 뮤직 대신 발라드를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저는 가수로서 운이 좀 안 따라줬던 경우예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마음을 비웠는데, 오히려 그러고 나니까 행복해졌어요. (웃음)” 그렇다고 호소력 짙은 발라드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건 아니다. 신 나는 댄스곡이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과 귀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면, 대개 내면의 고통이나 상처를 노래하는 발라드에서 관객들은 더 뭉클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뮤지컬은 이런 그녀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스트> 때 구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면서 그런 허기가 좀 채워졌던 것 같아요.”
가사를 또박또박 섬세하게 짚어서 부르는 습관도 뮤지컬 무대에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습득한 새로운 가창법은 가요를 부를 때에도 영향을 미쳤다. 음반을 녹음할 때 디렉터들에게 창법이 ‘뮤지컬스럽게’ 변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만큼 발성이 좋아졌다는 의미다. “대개 가수들은 박진영 씨 말대로 ‘공기 반 소리 반’ 창법이 많거든요. 그나마 저는 가수들 중에서는 그래도 ‘공기’를 덜 쓰는 창법이었는데, 대신 전달되는 소리가 작았던 것 같아요.” 첫 주연작인 <시카고> 때 아이비는 이런 미흡한 발성 때문에 초반에는 걱정이 많았다. 소리를 극장 뒤까지 전달이 될 만큼 크게, 입 밖으로 내보내야 하기 때문. 다행히 매일 구슬땀 흘려가며 연습하고 공연을 거듭하며 소리를 키울 수 있었다. “처음엔 ‘속삭이냐’고 하던 분들도 이제는 ‘확실히 들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최정원’이라는 또 다른 목표
이제 뮤지컬 경력이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데뷔 때를 돌아보면 배우로서 아이비의 변화는 장족의 발전이다. 가요계 데뷔 때부터 춤과 노래, 무대에서의 카리스마까지 뮤지컬 배우로서도 통할 만한 끼와 재능을 보여줬지만, 실제 뮤지컬 현장에서 아이비는 아무것도 모르고 못하는 ‘초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춤이다. 당시 아이비는 발레나 현대무용, 재즈댄스 같은 뮤지컬 배우의 기본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백업 댄서들이 가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방송 안무에 익숙했던 그녀는 주연 배우도 앙상블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뮤지컬 안무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랬던 신출내기가 이제는 무대에서 여유를 갖고 자신만의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다. 길지 않은 시간에 초고속 성장을 한 데는 스태프와 선배 들의 도움이 컸다. 그중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아이비를 이끈 건 역시 대선배 최정원이다. 데뷔작 <키스 미, 케이트>부터 이번 <유린타운>까지 아이비의 전 출연작을 함께하는 최정원은 아이비에게는 무조건 ‘믿고 가는’ 선배이자 동료다. 지금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 록시 하트도 이 배역을 먼저 거쳐 간 최정원의 개인 레슨이 큰 도움이 됐다. “저는 귀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게 확실히 이해가 빨리 되거든요. 정원 선배님이 직접 몸으로 보여주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시연해 주시는데 정말 감사했죠.” 그래서 아이비의 롤모델은 뮤지컬 배우 데뷔 이후 변함없이 최정원이다. “거의 독보적인 존재잖아요. 40대 여배우들 중에 그렇게 다리 찢으면서 노래하는 배우 없어요. 옆에서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단 생각밖에 안 들어요. 진짜 ‘레전드’죠. 제가 그 뒤를 잇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죠.”
‘최정원’과 함께 아이비에게 붙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신시’다. 팬들 사이에서는 신시컴퍼니의 ‘직원’으로 불리고 있는 아이비에게 욕심나는 신시컴퍼니의 작품을 묻자 단번에 <아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해보고 싶어요. 특히 ‘암네리스’요. 물론 연기, 노래 다 잘해야 하는 어려운 캐릭터죠. 무엇보다 ‘정선아’라는 완벽한 암네리스가 있잖아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욕심나는 캐릭터예요.”
욕심이 난다고 했지만, 사실 아이비는 상당 부분 욕심을 덜어낸 뒤 행복을 찾았다. 데뷔 이후 부침이 많았던 그녀는 인터뷰마다 항상 ‘도인이 다 됐다’는 말을 농담처럼 던지곤 한다. 그녀가 여러 역경을 겪으면서 깨달은 건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것에 충실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살다 보니까 또래에 비해서 덜 늙는 듯해요. (웃음)” 그래서 아이비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소중하다. 그녀가 뮤지컬 무대나 연습실에서 짓는 미소는 연기가 아니다. 다작을 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유가 없는 채로 쫓기는 삶은 그녀에겐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도 아이비는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 “쇼 뮤지컬뿐만 아니라 이렇게 진지한 메시지가 있는 작품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화려한 모습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아이비의 민낯은 이렇듯 소박했다. 그리고 그런 소박함이야말로 ‘스타’의 가면을 벗은 아이비의 진면목에 다름없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0호 2015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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