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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위키드> 정선아, 그녀가 진짜 디바일 수밖에 없는 이유 [No.122]

글|배경희 | 사진|김호근 2013-11-13 7,857

  “이제 꿈을 다 이뤘어요.” 무대에서 보내온 시간보다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정선아가
벌써 꿈을 다 이뤘다고 말하는 건, 올 연말 그녀의 최종 목표 <위키드>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단서가 붙는다. “만약 대사를 다 외워서 무대에 오른다면요.”
<위키드>에 출연하게 된 건 기쁘지만, 과연 제대로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녀답지 않은 내숭은 알쏭달쏭했지만, 결국 끝은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로 귀결됐다.
“<위키드>에서 박수받을 것 같긴 해요.” 분명 무언가 달라졌는데도, 그런 말에선 정선아의 모습은 여전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올 연말 그녀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스타일리스트 | 연미령

 

 

인내와 오기 <위키드>

“지금 연습하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했으면 하버드 갔을 거예요.” 오후 연습을 마치고 저녁도 거른 채 촬영장에 나타난 정선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연습이 얼마나 ‘빡센지’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거의 성토에 가까운 그 이야기보다 내 관심을 끈 건,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바람이 부쩍 차가워지긴 했지만, 이 계절에 패딩 점퍼라니. “혹시라도 감기가 걸려서 연습에 빠지면 안 되니까요.” 정선아가 이렇게 모범생 타입이었나,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순간에도, 그녀는 연습 상황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우리 연습 독하다고 다른 팀까지 소문났어요”, “일요일에 자진해서 연습실에 나간다니까요”, “생일에도 다음 날 연습을 위해 집에 있었잖아요” 등. “요즘 어딜 가나 대본 들고 다녀요, 제가!” 학구파와는 거리가 먼 그녀의 대본이 수험생 문제집처럼 필기로 채워진 것을 보니 괜한 엄살은 아닌 것 같았지만, 여전히 배우가 으레 하는 인사말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에도 (옥)주현이 언니네서 삼일 합숙을 했어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은 날엔 우리끼리 집에서 그 장면을 해보는 거예요. 서로 ‘빰빠빰빠밤’ 입으로 박자를 맞춰주면서. 제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저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쉴 땐 쉬어야 하는’ 정선아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경주마로 만든 <위키드>. 2003년 개막과 동시에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군 블록버스터. 10년째 브로드웨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전히 핫한 스테디셀러. 인기 대중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는 초록 마녀 엘파바와 하얀 마녀 글린다의 성장담 <위키드>는 그런 명작이다. 이 역사적 히트작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관심 역시 대단했다. 2012년 해외 투어 팀의 내한 공연은 불황 속에서도 유료 관객 점유율 95퍼센트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남자 아이돌 없이도 라이선스 공연의 연말 시즌 티켓은 벌써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위키드>는 무엇보다 배우들이 국내 공연이 성사되길 손꼽아 기다려왔던 작품이다. 물론 정선아도 <위키드>의 라이선스 공연을 기다려온 배우들 중 한 명이었다. “좋은 작품은 배우들이 더 먼저 알잖아요. 노래가 정말 좋은 작품이죠. 주제곡 ‘Defying Gravity’는 오디션 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곡이었어요. 그리고 사실, 여배우 둘을 투톱으로 내세운 뮤지컬이 또 어디 있겠어요. 우리나라엔 언제쯤 들어올까,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빨리 들어왔어요.” 

 

                                

 


<위키드> 첫 라이선스 공연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캐스트가 발표된 것은 지난 9월. 국내 제작사는 사전에 캐스팅 발표 시기를 예고하면서 기대감을 조성했지만, 출연 명단을 확인하고 놀란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지난봄, 전문가와 관객을 대상으로 펼친 <위키드> 가상 캐스팅에서 옥주현과 정선아 둘 다 각각 엘파바와 글린다 역의 베스트 1위에 뽑혔던 대로 모두가 예견했던 결과였으니까. “내정된 캐스팅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건 정말 아니에요. 오디션을 몇 번이나 다시 봤는걸요. 보통 작품을 하고 있을 때는 오디션 준비에 몰두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이다> 하는 중에도 중간 중간 <위키드> 오디션 연습을 했어요.” 정선아는 결국 해외 연출가 리사 리구일로에게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 크리스틴 체노웨스를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선아의 반응은 담담했다. “좋은 이야기지만, 주현이 언니한테는 ‘넌 이디나 멘젤(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엘파바)이야’ 그랬겠죠. (웃음) 사람들의 기대가 워낙 커서 옥주현이나 정선아가 못하면 우린 끝나는 거예요.”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이야기는 글린다에 제격인 정선아가 예상외로 오랫동안 ‘엘파바’를 꿈꿨다는 말이었다. “사실 엘파바 노래가 더 좋아요. 제 창법도 엘파바에 더 가깝고요(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엘파바의 곡은 눈 감고도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엘파바에서 글린다로 마음을 바꾼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2010년 <아이다> 공연 때, 주현 언니하고 <위키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언니가 자긴 엘파바 하고 싶다고 그래서 제가 ‘나도’ 그랬더니, 대뜸 저한테 ‘넌 글린다가 어울리지’ 그러더라고요. ‘왜, 초록 마녀는 언니가 하게?’ 제가 그랬죠. 그랬더니 언니가 제 성격이 딱 글린다래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언니가 초록 마녀하고 내가 하얀 마녀하자, 누가 시켜준다는 말도 안 했는데, 우리끼리 그랬어요. (웃음) 그런데 정말 우리가 오디션에 붙었다는 거!” 짜릿하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이 밉지 않았는데, 옥주현이 왜 정선아를 두고 ‘넌 딱 글린다’라고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처럼 마음을 바꾸게 된 진짜 이유는 당시에 사랑스러운 이집트 공주님 암네리스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네리스를 하면서 재미있었거든요. 명랑 쾌활하고 밝은 느낌이 참 괜찮더라고요.”
정선아가 보여줄 글린다는 어떤 모습일까? “얄미워서 한 대 콩 쥐어박고 싶은데,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공주병. 또 쿨할 땐 쿨한 블로온드! 글린다가 엘파바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변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위키드>에선 두 사람의 우정이 중요하니까.” 그녀가 <위키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로 엘파바와 글린다의 듀엣곡 ‘For Good’을 꼽는 순간, 이번 무대를 기대해 봐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For Good’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이 너로 인해 지금의 달라진 내가 있다고 고백하는, <위키드>에서 아주 중요한 노래니까.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건 아니에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각도 조금씩 변한 거죠.
사람이 나이를 괜히 먹는 게 아니더라고요.
뮤지컬 배우로서 정체성도 분명해졌어요.”

 

 

정상에 선 디바

“네, 제가 삼재가 끝났어요.”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정선아의 수상 소감 첫 마디에 시상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정말 제가 상을 받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이 말이 사실이란 건, 그날 카메라에 포착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시상식 무대에 오르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삼재를 운운하는 이야기는 경황이 없어서 나온 조크였다고 했지만, 백퍼센트 농담은 아니었을 게다. “제가 정말 상을 받길 바랐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땐 안 주더라고요. 상을 받으면 물론 기쁘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상을 위해서 공연하는 건 아니니까. 그때 ‘내려놓음’이 뭔지 알게 됐죠. 어쨌든 한 해에 이렇게 큰 상을 두 개나 받으니 막중한 책임을 느껴요.”
2010년에 이어 두 번째 출연한 <아이다>에서 철부지 공주님에서 한층 성숙해진 암네리스를 연기해 두 개의 상을 거머쥔 정선아, 그동안 무엇이 그녀를 성장하게 했는지 궁금했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건 아니에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각도 조금씩 변한 거죠. 사람이 나이를 괜히 먹는 게 아니더라고요. 뮤지컬 배우로서 정체성도 분명해졌어요.” 그녀가 겪고 있는 생각의 변화들은 작품 선택에도 영향을 끼쳤을까. 좀처럼 창작뮤지컬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그녀가 지난 한 해 <광화문 연가>와 <쌍화별곡>에 출연한 것은 주연 배우로서 어떤 의무나 책임감 같은 걸 느껴서가 아닐까 궁금했다. 특히 <쌍화별곡>은 ‘루시’나 ‘디나’ 같은 이국적인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리는 정선아가 한복을 입어야 하는, 그녀의 첫 번째 사극이었다. “예전엔 그냥 하고 싶어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작품을 선택했어요. 요즘엔 이 작품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봐요. 돈인지, 유명세인지,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해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선아의 출연작이 한 해에 두세 편을 넘겼던 적이 없다. <위키드> 역시 지난 6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마친 뒤 다섯 달 만에 참여하는 작품이다.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다섯 작품을 고사했다는 매니지먼트 대표의 말에, 여러 작품을 놓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전 무대를 독식하고 싶지 않아요. 작품마다 계속 제가 있으면 지겹잖아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싶지도 않고요. 그건 열정과 노력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스무 살, 화려한 데뷔 이후 늘 중심에 있었지만, 어쩐지 받아야 할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정선아.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전성기다. “여배우로서 정상을 지켜야겠어, 그런 욕심은 없어요. 욕심 있어 보이나요? 전혀 없죠. 관심도 없다구, 명예 따위!” 정선아는 특유의 쨍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위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제가 스무 살에 <렌트>의 미미를 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혜성같이 등장해서 저를 자극해 줬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정선아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지나치게 편해 보이냐고 물었다. 물론. 지금 그 모습이 훨씬 좋으며, 그렇기에 그녀의 한 달, 일 년, 십 년 후가 더욱더 기대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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