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헤드윅>, <노트르담 드 파리>, <남한산성> 등 한동안 크고 무게가 있는 작품에 주로 출연한 배우 김수용의 발걸음이 지난 연말부터 조금 가벼워졌다. 올해 초까지 공연한 <금발이 너무해>의 에밋 역에 이어, 현재 공연하고 있는 <환상의 커플>의 장철수 역까지 그는, 발랄한 작품에서 현재 자신과 가장 닮은 모습으로 관객에 한층 친근하게 다가왔다. 첫 공연을 올린 후 휴식을 가졌던 날, 그와 명동의 오래된 중화요리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2006년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나상실(안나 조)과 장철수 가족이 매우 좋아했던 자장면을 먹기 위해.
“아주 좋죠. 자장면!” 자장면을 먹으러 가자는 제의에 아주 흔쾌히 답한 김수용,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주위에 있는 화교학교와 해외 도서를 판매하는 책방을 보고 반가워한다. “아, 여기 기억이 나요. 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일본 잡지, 만화책 사러 왔던 골목이에요. 일본 문화 개방 전이었는데, 이쪽에 수입 책방이 많았죠. 그땐 근처에 중국 대사관이 있었는데, 이젠 옮겨 갔나 봐요.” 오랜만에 기억의 한구석에 있는 곳을 찾으니 감회가 새로운 눈치다.
20년 전 한 소년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전달해주었던 화교 골목에 이어 우리가 찾은 ‘개화’는 화교 상권이 활발하던 60년 전부터 지금까지 명동의 중국집 거리의 초입을 지켜 온 중화요리 집이다. 어린 시절에 단골이 된 사람부터 쇼핑하다 지쳐 우연히 찾는 사람들까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집이라면 ‘한자’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리 크고 멋지게 해놔도 한자가 없으면 이상하게 중국집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입구의 ‘발’! 차르르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때 정말 중국집에 왔다고 생각이 들죠.” 안타깝게도 발에서 나는 청량한 구슬 소리는 없었지만, 종업원들 사이 조용히 오가는 중국어가 우리가 중국집에 왔음을 실감케 했다.
홀에 들어서니 벌써 식향이 예사롭지 않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얼른 멈추기 위해 한 목소리를 높여 자장면을 주문했다. “제게 자장면은 돈가스와 더불어 어린이날 2대 외식 메뉴예요. 제 어린 시절에는 이 두 가지가 지금의 뷔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의 느낌과 비슷해요. 첫 경험이 무서운 건지 중화요리 집에 가면 무조건 자장면만 시키게 돼요. 그리고 미식가도 아닌데, 괜히 가장 기본적인 자장을 먹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바로 나온 자장면은 캐러맬 소스가 덜 들어가 춘장의 자연스런 색이 그대로 전해지는, 고기 향이 듬뿍 담긴 구수하고 편안한 맛이었다. 소스가 촉촉해 텁텁함 없이 끝까지 면이 뭉치지 않는 그런 깔끔한 맛.
자장면, 밥을 먹기엔 지겹고 나가긴 귀찮은 주말 오후처럼 특별하지 않은 날에도, 이사하는 날이나 한 가족이 모이게 되는 날처럼 특별한 날에도 편하고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서민의 먹거리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도도하고 새침한 부동산 재벌 안나 조가 기억을 잃고 나상실이 된 다음 자장면에 반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을까. “안나 조에게 자장면은 잊을 수 없는 문화적 충격이자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열두 살부터 혼자된 안나 조(나상실)는 외로움이 심한 인물이었어요. 그녀의 대사 속에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잠글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내가 돈을 풀었을 땐 내게 아부를 하더니,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땐 다 떠나갔다. 내 진정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환경만 보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걸 안 다음부터 나는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안나 조가 나상실이 되면서 자신을 압박하던 굴레를 벗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자기가 누군지, 누가 착한지 악한지도 모르고, 이런 백지 같은 상황에 유일하게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건 옆에 있는 장철수와 아이들, 그리고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집. 하지만 훨씬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고 홀가분할 수 있는 환경인 거죠. 기억상실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소중한 것을 찾게 되는 셈이에요. 나중에 기억이 돌아와도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런 강렬하고 소중한 경험, 그게 자장면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장철수는 기억을 상실한 안나 조에게 이전에 당한 억울한 일들을 되갚아주려고 나상실이란 이름으로 집에 데려와 밥, 빨래, 청소 등 거침없이 노동을 시키며 고소해한다. 그러다 어떻게 안하무인이던 안나 조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묻자 그는 답한다. “예상치 못한 순수함이 철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해요. 철수는 매 순간에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이니까요. 저도 철수처럼 무대에서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난 후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한 그릇을 더 먹어야 했다. 배가 부른 상황에서도 맛있어 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문득 자장면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궁금해져 물었더니 눈을 부릅뜨며 답한다. “아마 오늘의 인터뷰일 것 같은데요?!” 이 또한 진심일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3호 2011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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