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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로빈훗> [No.138]

글 |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 엠뮤지컬아트 2015-04-01 5,008

대중예술의 미덕과 키치의 허영 그 경계에 선 영웅 활극





한 마디의 대사명작의 필살기. 책에는 한 줄의 문장이 있고 공연에는 한 마디의 대사가 있다. 짧은 한 구절이 책 전체를 뇌리에 심어주는 것처럼 강렬한 대사 한 마디는 작품의 의미를 단번에 드러낸다. 햄릿의 실존적 고민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로 압축되고 마르크스의 도전적인 세계관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선언으로 요약되는 식이다. 책이건 공연이건 ‘어록’을 남긴다는 건, 사람으로 치면 이름을 남기는 것이요, 호랑이로 치면 가죽을 남기는 것과 같은 셈이다.

뮤지컬의 경우에 이 한 방의 ‘어록’이란 곧 노래이겠지만, <로빈훗>은 한 곡의 노래가 아니라 한 줄의 대사에 힘을 싣는 공연이다. 원래 인상 깊은 선율이 돋보이는 작품은 아닌지라 무게 중심을 스토리로 옮긴 것은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면, 음(音)이 아니라 말(言)을 선택한다는 건 감성의 길로 돌아가지 않고 의미의 길로 직진하겠다는 뜻일 게다. 이 작품이 강조할뿐더러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사를 볼 때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대강 기억나는 대사는 이렇다. ‘좋은 왕이 되고 싶거든 정치를 아는 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세상 이치를 아는 자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정직한 자에게 권력을 맡겨라. 우리는 나라를 흔들고 권력을 쥐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 희망을 빼앗지 말라.’

뮤지컬의 대사라기보다는 경전의 가르침처럼 들릴 정도이다. 각각의 이름(名)에는 구별된 역할(分)이 있으니 그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는 것(正)이 정치의 올바른 도(道)인 바, 이것이 곧 명분(名分)이고 정명(正名)이니라. 공자 백. 사람들이 <로빈훗>을 현실을 향해 할 말을 하는 뮤지컬로, 진지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으로, 다른 영웅 활극과 차별되는 공연으로 받아들이는 근거는 바로 이 대사에 있다. 명분도 정의도 없는 부당한 권력은 언제나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에게 몸도 마음도 돈도 뜯겨버린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삶의 공간에서 내쫓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이런 모순을 향해 일갈을 내던지다니. 인상적이다. 물론 그 인상의 풍경은 여러 가지지만 말이다.





변화해온 영웅 활극 

이런 ‘일갈’이 우연히 나온 건 아니다. 그간 엠뮤지컬의 작품 목록, 정확히 말해 연출가 왕용범의 작업을 쭉 살펴보면 이러한 주제의식이 크든 작든 지속해왔음을 알 수 있다. 왕용범은 그림을 잘 만들어내는 연출자로 평가받지만 의외로 그는 보여주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가이다. 대형 뮤지컬 연출가 중에서 왕용범만큼 적극적인 각색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그 과정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내는 사람도 드물다. 어떤 작품이 됐든 왕용범의 손을 거치면, 그 작품은 원작의 느낌을 벗어나 잘 됐든 못 됐든 ‘왕용범’이라는 상표를 덧입는다. 지금껏 그 상표는 전형적이면서도 잘 만들어진 대중적인 스펙터클로 관객들에게 존재감을 명확히 해왔다. 하지만 왕용범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에 있다. 그 이야기의 원형은 데뷔작 <밑바닥에서>로 출발해 <프랑켄슈타인>으로 한 호흡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의 그의 관심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절망하는 인간(<밑바닥에서>)이나 인간 존재가 품은 내면의 모순(<프랑켄슈타인>)같은 진지한 주제에 있다. 이 작품들이 그런 이야기를 충분히 해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자.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무거운 주제의식의 희곡과 소설이 왕용범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라는 점은 그가 작가로서 추구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케 한다.

<로빈훗>에도 이런 세계관은 적잖이 배어있다. <삼총사>, <조로> 등 다른 영웅 활극과 비교해볼 때 <로빈훗>은 전체적인 만듦새나 출연진의 일치율이 90% 이상이지만, 그것들과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다. 정의의 세력이 부당한 권력을 몰아내고 배신과 폭정을 주도했던 악당이 최후를 맞는 장면이 그것인데, 여기서 로빈 후드의 외침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던 걸까!’ 이건 영웅 활극의 주인공이 할 대사가 아니다. 승리의 순간에 회의에 휩싸이는 인간은 영웅 활극이 아닌 비극에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로빈 후드의 최후도 허망하긴 마찬가지다.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게 연인을 빼앗기더니, 그 연인에게는 목숨을 빼앗긴다니. 불의에 맞서 정의를 일궈낸 영웅이 일순간에 부조리한 죽음에 놓이는 거다. 대중적 영웅 서사에 부조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조리란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직면하는 것인 만큼, 이 질문을 부여잡는 영웅은 그 자리를 대중의 자리에서 비극의 자리로 옮길 수밖에 없다.





대중예술과 키치의 경계

그렇다면 로빈 후드를 비극적 주인공으로 키워낼 만한 극적 토양은 무엇으로 설정되었는지 살펴봐야 할 터. 일단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한정 자유로운 각색을 한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관심이 로빈 후드의 전통적 재현에 있지 않음은 확실해 보인다. 불의에 맞서는 로빈 후드를 강조하지만 그 불의의 구체적인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다. 막연하지만 또한 분명한 이분법, ‘좋은 놈과 나쁜 놈’. 이 작품은 전형적인 영웅 활극의 문법에 충실하게 출발한다. 이 출발점에서 어떻게 대중 서사의 영웅과 비극적 영웅을 하나로 잇는 반전을 이끌 것인가. 궁금할 따름이다.

일단 영웅 활극으로서의 충실함은 이 작품에게 요구되는 필요조건이다. 영웅 활극의 재미를 자아내는 대중적 코드는 분명하다.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호쾌한 볼거리, 영웅다운 위용, 악당의 당위성과 그만의 악랄한 매력, 영웅의 애절한 로맨스 등등. 이러한 코드들이 향하는 결말은 하나이다. 상식적 가치의 승리. 대중 서사의 전형성이 주는 미학적 안전함은 이렇듯 예측된 결말에 있다. 수많은 영웅 활극이 있지만 그것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척도는 색다른 결말이 아니라 뻔한 결말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의 생동감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형성에 반비례하도록 디테일의 섬세함이 요구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뻔한 결말이 분명해야 반전은 살아난다.

그런데 <로빈훗>은 이 지점에서 첫 번째로 넘어진다. 인물의 동기는 분명하지 않고(길버트!) 행동의 일관성도 부족할뿐더러(마리안!), 각성의 계기도 구체적이지 않다(필립!). 로빈 후드와 상대하는 모든 인물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은 로빈 후드 또한 피상적인 인물임을 반증한다. 로빈 후드를 행동하게 하는 첫 번째 동기는 분명 복수이지만, 그것이 정의의 인식으로 각성되는 순간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확신이 회의로 변화하는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냥 호쾌한 영웅 활극이라면 이런 구체성이 꼭 필요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마지막 로빈 후드의 절규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얹으려면 이런 과정은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엔 배신의 결과, 각성의 결과, 봉기의 결과만 있을 뿐 그 과정은 거의 생략된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서사를 통해 로빈 후드의 영웅성이 겪는 질적 변화, 즉 복수에서 정의로, 정의에서 회의로 각성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볼 수가 없는 거다.

출발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로빈훗>은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또 넘어진다. 맥락을 구축하지 못한 로빈 후드의 마지막 절규는 느닷없을 뿐이고, 마지막 대사는 감성을 자극하는 허구적 비장함에 그칠 뿐이다. 반전은 완벽히 무의미하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작품 내적인 과정에서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작품의 외적 맥락에서(뜬금없는 반전!) 갑작스레 개입하는 경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대사가 이 작품을 설명한다. 극에서 어떠한 내적인 긴장의 모양새도 덧입지 못한 이 대사가 작품의 의미인 듯 그 곁을 배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상적인 진지함은 ‘모방된 고급스러움’, 즉 키치일 뿐이다. 비판의 어휘가 극장을 휘몰아치지만 비판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그저 비판의 분위기를 즐기는 위장된 진지함. 민중이니 권력이니 현실 비판이니 과도한 개념의 남발이 작품의 실제를 넘어서는 순간 이 작품의 진지함은 키치의 허영에 그쳐버린다. <로빈훗>에는 대중예술 고유의 고급스러움을 빚어낼 자산이 분명 깔려 있다. 하지만 언뜻 스치는 키치의 향기를 부인할 수는 없다. 대중예술의 미덕을 가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나. 진지함의 어휘와 제스처를 빌리지 않아도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8호 2015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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