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한 발, ‘지금’을 산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관객을 웃길 때의 그는 실제로도 장난꾸러기일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무대에서 웃음기를 거둔 그는 금세 고민을 안고 사는 심각한 남자가 된다.
이렇듯 상반된 성격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하는 까닭에 조강현에게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표정에는 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배어있다.
금방이라도 웃을 것 같다가도 이내 분노를 표출할 것 같은 양면성이 꿈틀댄다. 그런 그에게 <셜록홈즈>의 앤더슨 형제는 알맞은 놀이터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또 하나의 캐릭터에 도전한다. 한 인물의 분열증이 낳은 비극에서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앙상블에서 관객으로
그리고 지킬로
2008년 <지킬 앤 하이드> 앙상블에서 이제 무대의 제일 앞에 서게 됐네요. 기분이 어때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해서 딱히 어떤 느낌이라고 명쾌하게 대답을 못하겠어요. 드립 커피를 몇 번 시도했다가 드디어 제대로 맛이 났을 때의 짜릿함이랄까. 그런데 다른 건 있어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지킬 앤 하이드> 앙상블에 캐스팅이 됐을 때’라고 답한 적이 있었거든요. 물론 지킬과 하이드 역에 캐스팅된 지금도 기쁘지만, 그때의 느낌은 정말 강렬했어요.
그만큼 간절히 바랐다는 거겠죠.
아직도 프로덕션의 전화번호가 기억나요. 뒷번호가 8556인가? 그 번호로 전화 오기만 몇 주를 기다렸어요. 그땐 학생이어서 수업 중에 혹시나 전화가 올까봐 전전긍긍했죠. 한참 시간이 지나고야 연락이 왔는데 ‘앙상블에 합격했다’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이랑 부둥켜안고 정말 행복해했죠. 오히려 지금은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수가 없어요. 사실 제 마음은 막 부풀어 있는데 그걸 내색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이번 캐스팅 소식도 <드라큘라> 할 때 들어서 혼자 분장실에서 소리 지르면서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자신에게 꿈의 작품인 만큼 그동안 객석에서도 여러 번 봤겠네요.
아뇨, 어쩌다 보니 관객으로는 딱 한 번 봤어요. 샤롯데씨어터에서 김준현 선배님 공연으로 봤는데 그때도 ‘저 무대에 내가 한 번 설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속으로 계속 따라하면서 보니까 공연이 끝난 후엔 실제로 런스루한 것처럼 힘들었어요.
극장을 떠나서도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내가 저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견딜까 고민했어요. 표현의 방법은 굉장히 많고 다양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니까 내가 하는 게 어쩌면 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반드시 표현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당시 그곳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를 고민하는 중이에요.
‘표현의 한계’라고 했는데, 실제로 연습해보니 생각과는 다른 것들이 많죠?
하이드를 연기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물론 지킬도 어렵지만, 하이드는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인데 제가 표현하는 모습들은 굉장히 하드했어요. 툭 치면 부러질 만큼 굉장히 딱딱해서 연기하고 나면 온몸이 경직될 정도예요. 그런데 한계에 부딪히면서 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굉장히 릴랙스하고 툭 밀어도 절대 부러질 것 같지 않은 하이드로 바뀌었어요. 그러면서도 이제는 더 강인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 중이에요.
그동안 지킬에 처음 도전하는 배우들을 만날 때마다 ‘지킬이 쉽고 하이드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직접 해보니 지킬이 어렵다’라는 반응이 많던데, 반대네요?
형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명확히 알겠어요. 그분들은 이미 전환점에서 돌아 나온 거예요. 하이드는 자유롭고 릴랙스하니까 사실 크게 힘들 게 없어요. 마음대로 웃고 울어도 이상할 게 없어요. 상반된 연기를 해야 하는 건 오히려 지킬이에요. 굉장히 긴장돼 있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한데, 그러면서도 내면의 갈등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지킬이 그런 감정들을 절제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헷갈릴 거예요. 그 감정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요. (박)은태 형도 그랬고 저 역시 그랬어요.
그렇게 지킬과 하이드의 해석에 따라서 연기 노선이 달라지겠죠. 본인이 해석한 지킬은 어떤 인물인가요?
원작을 보면 지킬 박사가 실험으로 변신하는데 그대로 지킬 박사거든요. 몸집만 우락부락해지고 키만 훨씬 작아졌지, 인격은 똑같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밖에 나갔더니 친구들이 못 알아봐요. 하나둘씩 나쁜 짓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지킬로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그게 점차 커지면서 죄책감 없이 살인까지 하는 거죠. 그래서 하이드는 절대 괴물이 아니에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또 다른 지킬이죠. 같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이드 때문에 괴로워하는 지킬에 연민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웃음) 일단 대사랑 가사 안 틀리고 첫 공연을 무사히 해야죠.
<셜록홈즈>의 앤더슨 형제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겉으로는 두 인물을 선과 악이라고 쉽게 나눌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렇죠.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최민식 선배가 악마 같은 인물이었고, 이병헌 선배가 그 악마를 잡으려는 남자였잖아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는 상황이 되거든요. 이 작품도 끝으로 치달을수록 지킬과 하이드가 잘 섞여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연습할 때 루시를 죽이는 장면이 굉장히 고민됐어요. 은태 형도 저도 이 부분이 슬픈 거예요. 그 정서를 놓고 은태 형이랑 저랑 연출, 셋이서 토론을 했어요. 그리고 그건 자기 것이었던 루시가 떠나버린다는 강한 박탈감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어요.
그건 하이드와 어울리는 게 아니죠.
맞아요. 오히려 지킬과 닮아 있죠. 게다가 하이드가 살인을 즐기는 인물도 아니죠. 그는 절대 착한 사람은 죽이지 않으니까. 루시를 죽일 때만큼은 다른 정서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전 그게 지킬일 때 갖고 있던 감정들이 표출되는 순간일 수 있다고 봐요. 일단 이 상태에서 그 순간 느껴지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해요.
욕심을 내려놓은
‘11번째 지킬’
지킬의 복잡 미묘한 모습은 배우 조강현에게도 종종 보여요. 실제 성격은 어때요?
감정 기복이 좀 있어요. 왜 호불호가 정말 명확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전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이 색깔, 이 옷 너무 싫어!’ 하기도 하지만, 저는 맘에 안 들어도 입으라면 입어요. 밝을 때는 한없이 밝다가 내 안에 뭔가가 요동치면 또 처져 있기도 하는 게 좀 심한 편이에요. 술 마시면서 진지한 얘기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여행 떠났을 때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듣는 얘기가 재밌어요. 여행지에서는 정말 솔직한 얘기들을 하잖아요. 가령 누가 자기 나이가 이 정도 되다 보니까 삶이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대요. 그래서 장사를 다 정리하고 여기 여행 와 있다, 라는 식의 이야기. 그런 얘기들이 책 한 권보다 도움이 돼요.
예전에 이 작품을 할 뻔한 적이 있잖아요. 그 생각 때문에 한동안 생각이 많았을 듯해요.
2012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끝나고 오디션을 봤어요. <형제는 용감했다> 연습 중이었을 거예요. 처음엔 ‘봐서 뭐하나, 어차피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해서 봤어요. 그런데 덜컥 합격한 거예요. 정말 신 났죠. 다음 스케줄이 있었지만 어떻게 안 되겠나 싶었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결국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거절해야 했어요.
그래서 이번 트레일러 영상에서 “영원히 이 작품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군요?
세상에 어느 누가 지킬 역 제안을 거절하겠어요? 스케줄을 막론하고 그랬던 사람이 있을까요? (웃음) 그땐 정말 ‘이제 이 역은 영원히 못하겠구나, 접자’라고 마음을 먹었죠.
만약에 그때 했다면 인생의 경로가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좋은 작품을 하고 더 큰 무대에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좋죠. 하지만 지금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서 더 많은 박수를 받고 더 큰 무대를 향해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도 똑같이 그런 기회는 있어요. 무엇보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이 순간 자체가 가치가 있어요.
캐스팅을 거절했음에도 2년 후에 또 한 번 제안을 했다는 건, 그만큼 프로덕션에서 조강현에게서 새로운 지킬의 가능성을 봤다는 증거일 거예요. 본인은 그게 뭐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캐스팅이 된 당시에도 굉장히 의아했어요. 꿈이 이루어지는 건 제가 해내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많은 운과 적절한 타이밍, 그리고 제 영향 밖에 있는 수많은 요인들이 그걸 이뤄내는 거 같아요. 저의 가능성이라, 연습하면서도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그건 나중에 공연을 보고 관객들이 대답을 해주실 거라 생각해요.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닌데 매사가 상당히 여유로워요. 이번 작품도 부담이 될 만한데 지금 모습은 심지어 무덤덤해 보이기도 해요.
만약 2년 전에 이걸 했으면 아마 못 견뎌서 쓰러졌을 거예요. 이제는 큰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좀 달라요. 지금 연기하고 무대에 설 수 있는 자체에 정말 감사해요. 세상에 작은 무대 큰 무대, 작은 박수 큰 박수가 어딨겠습니까. 그 순간 하는 것에 충실하고 감사하면 큰 욕심이 안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생각이 달라진 건 수없이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걸 느꼈기 때문일 거예요. 혼자 떠날 때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 여러 번 여행을 갔거든요. 그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으면서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만약에 욕심이 있다면 이 대단한 형들 사이에서 숨 막혀서 어떻게 연습하고 웃겠어요? 견디지 못하겠죠.
여행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성장한 거네요. 배우로서도 좋은 태도인 것 같아요.
이 페이지를 읽고 있는 독자들도 혹시 힘겨워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면 단 하루라도 어떤 낯선 곳에 가보는 걸 권하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몰라도 그게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린 휴대폰에서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저는 여행을 가면 데이터 요금 때문에 휴대폰을 꺼놔요. 그럼 길을 모르니 감으로 찾아 헤매요. 그렇게 직관에 의존하면 많은 걸 볼 수 있어요. 요즘 어떤 사람을 알고 싶으면 먼저 페이스북을 뒤지잖아요. 직관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가 하는 말, 눈빛에서 다 보이고 읽혀요. 여행의 좋은 점이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여행 예찬론자 같은데 그렇진 않고요. (웃음) 무뎌졌던 본능,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 그런 게 배우의 삶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래도 배우라면 조강현만의 지킬로 어필하고 싶은 욕심은 있을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냥 ‘11번째 지킬’요. 나중에 이 작품이 20주년 됐을 때 역대 지킬들 이름이 쫙 있을 텐데, 그때 제 이름이 거기 붙어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혹시나 실수로 빼먹을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앞뒤 생각 안 하고 열심히 하는 것뿐이죠. 저만의 매력을 굳이, 억지로 꼽는다면 오글거리지만 순수함? 혹은 순박함이지 않을까 해요. 그게 앞으로도 지녀야 할 저만의 무기이자,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 것 같아요. 그걸 놓치면 정말 이도저도 아닌 배우가 될 것 같아요.
30대 초반의 프로필이 대작으로 채워지고 있어요. 이후의 프로필은 어떤 방향을 향할 것 같아요?
막연한 생각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명확한 바람은, 계속 연기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이에요. 오히려 <지킬 앤 하이드>에서 내 모습이 어떨까 하는 기대보다, 향후 10년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가 기대돼요. 재밌는 일들이 곳곳에 많을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일도 많겠죠. 하지만 힘든 일이 없으면 재밌는 일도 없는 거니까요. 중요한 건 재밌는 일들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여유 있게 그걸 즐길 수 있느냐일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의 10년이 정말 기대돼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7호 2015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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