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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CENE STEALER]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박송권·정영주 [No.137]

글 |송준호 사진 |김수홍 장소협찬| 반쥴(02-735-5437) 2015-02-27 7,272

‘진짜’의 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배출한 스타는 뜻밖에도  스칼렛이나 레트가 아닌 이름 없는 흑인 노예였다. 

자유를 갈망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노예 장을 연기한 박송권은  몸으로 한 번, 가창력으로 또 한 번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또 개성 강한 베테랑 정영주는 튀면 안 되는 작은 배역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극 안팎에서 선배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연기로 작품의 흥행을 이끌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났다. 



악에 바친 심정을 담은 노래


정영주는 지난해 워쇼스키 남매가 연출한 미국 드라마 <센스8> 출연에 이어 ‘혼다 어코드 배틀’에도 참여해 우승을 거머쥐는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였다. 얼마 전에는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스테이지 톡이 주관한 ‘관객이 뽑은 2014 연극 부문 최고의 조연 배우’에 선정되며 주가를 드높이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작품에서 “아이고~ 노예 장이 주인공이네. 네가 다 해먹어라!”라고 부러움 섞인 농을 던졌던 이가 박송권이다. 박송권은 가히 ‘스타 탄생’이라고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노예들의 합창을 뚫고 나오는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근육질의 구릿빛 몸은 무대에서 단연 빛을 발한다. 등장 신은 ‘검다는 것’과 ‘인간은’의 두 대목이 전부지만 관객의 호응은 이 부분에서 최고조에 다다른다. 노예 장 때문에 공연을 본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이런 인기가 우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오디션에서 가장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것도 스칼렛이나 레트가 아닌 노예 장이었다. 박송권이 최종 낙점되기까지는 다섯 번의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대개 오디션 횟수가 늘어갈수록 희망에 부풀기 마련이지만 박송권은 아니었다. “아무리 잘 어울리고 잘해도 내부에서 캐스팅이 결정되거나 바뀌는 경험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번 오디션도 사실 체념하는 마음으로 봤어요. ‘뽑으려면 뽑고 예의상 부른 거면 시간 떼워줄게’라는 심정으로요. 그냥 내가 가진 거 다 보여준다는 마음이었죠.”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나 설렘보다는 오기와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반영돼 뿜어진 목소리는 바로 노예 장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박송권 자신보다도 먼저 그의 캐스팅을 예견한 이가 바로 정영주였다. 1년 전에 먼저 캐스팅 제안을 받았던 정영주는 오리지널 버전의 영상을 보고 나서 어떤 배우가 이 역을 맡게 될까 관심을 가졌다. “사실 송권이랑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오디션을 본다는 건 알았어요. 오디션 명단도 미리 봤는데 알 만한 후배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역은 송권이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동석한 후배에 대한 립서비스가 아닐까 의심할 새도 없이 정영주는 박송권의 음색과 캐릭터의 부합성을 설파한다. “송권이 목소리는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음성인데 울림이 굉장히 깊은 데서 나와요. 예전보다 노래 실력도 많이 늘었고 그동안 아빠가 되어선지 더 성숙해진 느낌이에요.” 


관객과 동료들의 칭찬 세례가 이어지는 동안 박송권에게는 별명도 생겼다. ‘시선을 강탈하는 배우’라는 의미의 ‘박시강’이다. 이만하면 어깨가 으쓱해질 만도 하지만 박송권은 그런 반응에 가급적 초연하려고 한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의 아픈 경험 때문이다. “그때 제리 크런처 역을 맡았는데 저는 소리도 그렇고 체구도 뚱뚱하지 않아서 넉살스럽게 보이지 않았나 봐요. 주변에서 초연 배우와 비교를 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하지만 그가 팬들의 성원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격려 글은 휴대폰 카메라로 캡처해서 지니고 다닐 정도로 소중하다. “죽을 만큼 노력해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배우, 라고 쓰신 거 보고 굉장히 울컥했어요. 저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거든요. 그걸 조금이나마 알아주시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웠어요. 이런 후기들은 비타민처럼 보고 있어요.”




다른 역할, 같은 마음


두 사람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고는 있지만, 이 작품은 초연인 만큼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뮤지컬에 첫 도전하는 배우와 아직 무대 경력이 일천한 배우도 있어서 그만큼 관객과 평단의 평가에 예민한 상태다. 하지만 정영주는 그럴수록 배우는 평가에 신경 쓰기보다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욕을 안 먹으려고 애쓰면 그 캐릭터는 이미 죽어요. 욕을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대에서 얼마나 자기 임무를 잘하느냐가 중요해요. 뮤지컬 경험이 부족한 후배들은 자꾸 리뷰를 보려고 하는데, 보는 건 자유지만 흔들리지 말라고 말해요.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배우의 캐릭터는 무대 위에서 죽는 거니까.” 


그래서 이 작품에서 정영주가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은 ‘무게 중심 추’다. 그 생각처럼 그녀의 마마는 스칼렛의 그림자처럼, 때로는 노예 장을 포함한 젊은 노예들을 감싸는 엄마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일종의 배경처럼, 마마는 네 명의 주연 남녀 뒤에도, 흑인 노예들의 뒤에도 공기처럼 서 있다. 특히 시종일관 역동적인 몸짓과 노래를 부르는 노예 장의 장면이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건 듬직하게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마마 덕분이다. “배우들이 못 견디는 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제 역할은 그냥 단단하게 버텨주는 거예요. 가만히 서 있는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욕심을 가지면 균형감이 깨지니까 적극적으로 뭘 하면 안 되는 거죠.” 박송권도 이에 동의한다. “제가 누나랑 두 장면을 같이하잖아요. 누나가 무게를 잡아주시니까 제가 앞에서 뭔가를 할 수 있어요. 저 혼자서는 그 신을 이끌어갈 수 없어요. 사실 저만의 장면도 아니고요.”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것은 <맘마미아!>가 처음이었지만 첫 만남은 <아이다>를 통해서였다. 2003년에 뉴욕에서 토니 브랙스톤 주연의 <아이다>를 본 정영주는 2005년 라이선스 초연 리허설에서 오리지널 버전을 뛰어넘는 국내 앙상블들의 실력에 감탄해 눈물을 흘렸다. “브로드웨이 배우들이 화려한 소울을 들려준다면 우리에겐 가난한 소울이 있는데, 그때 그 배우들에게서 그게 나온 거예요. 무릎으로, 발뒤꿈치로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자니 목이 막혔어요.” 그때 정영주가 본 배우 중에 박송권이 있었다. 박송권은 흑인 노예들의 아픔을 담은 춤을 표현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아무리 흑인 정서를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그 아픔을 어떻게 다 보여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이 ‘흑인의 한이 아니라 너희들의 이야기를 보여달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깨달아 춤을 추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한’은 다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송권은 이번에도 흑인 노예들의 한을 표현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한을 끄집어내는 데 주력했다. 국내에서 흑인 역을 가장 많이, 잘 연기해온 정영주의 비결도 블루스나 재즈 보컬에 한국적 소울을 담아내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런 경험과 노하우는 영화 <노예 12년>의 정서를 무대로 옮긴 듯, 이번 작품의 ‘검다는 것’과 ‘인간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빨리’보다 ‘오래’를 향해


서로 밀고 당겨주는 두 사람의 진한 사람 냄새는 ‘에이콤’이라는 교차점에서 비롯된다. 잘 알려졌듯이 정영주는 에이콤 뮤지컬 아카데미 출신이다. 박송권도 <영웅>, <명성황후>, <보이첵> 등 에이콤의 대표작들에 참여했다. “에이콤은 고향 같은 느낌이에요. 저를 배우로서 크게 성장시켜줬던 곳이고, 저를 믿어주신 것도 윤호진 대표님이였어요.” ‘슬로 스타터’형인 박송권은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낼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준 에이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털어놓는다. “초반에 뭔가를 확 만드는 게 아니라 서서히 채워가면서 보여주는 스타일인데, 보통은 컴퍼니도 연출도 음악감독도 기다리지 못해요. 그리고 ‘저 배우는 이런 배우다’라고 초반에 결론을 내려버려요. 에이콤에서는 저도 몰랐던 영역을 발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원래 지닌 음색이 미성이었던 그는 중저음으로 음역을 확장시켜 지금의 목소리를 만들었다. <맨 오브 라만차> OST에서 ‘새야, 작은 새야’라는 곡에 녹음된 목소리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게 예쁘게 내야 하는 소리라서 사람들은 제가 불렀다고 하면 안 믿어요. 원래 제게 잘 맞는 정서도 거친 쪽이 아니라 부드러운 쪽이거든요. 사실 전 노예 장이 아니라 애슐리에 가깝죠. (웃음)” 


즐겨 부르는 노래가 의외로 <오페라의 유령>의 ‘Think of me’일 정도로 넓은 음역대를 자랑하는 정영주는 에이콤에서 하는 작품들의 앙상블을 하면서 중저음을 확장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지만 이건 주인공들 몫이더라고요. 저는 앙상블 하면서 그 부분도 책임지고, 메조소프라노, 알토도 책임져 왔어요. 한때 박칼린 음악감독이 저를 세 파트에서 다 부려먹길래 ‘내가 만만하나’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게 지금의 다양한 발성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 같아요.” 앙상블에 대한 그녀의 철학은 남다르다.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에 과감히 앙상블에 지원할 정도로 그녀에게 그 보직은 특별하다. “<맘마미아!> 오디션에서 로지 역과 앙상블에 지원해서 둘 다 하게 됐어요. 그때가 서른여섯 살이었는데, 남들은 이상하게 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앙상블이라고 생각하고 덤벼서 아까울 게 없었어요.” 그때를 기억하는 박송권은 선배의 생각에 동의하며 “앙상블은 능력이 안 되면 못해요. 사실 제일 잘해야 되는 게 앙상블”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정영주는 ‘지금 배우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말을 잇는다. “앙상블은 할 수 있는 때가 정해져 있어요. 또 실력 없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실력 없으면 못하는 게 앙상블이에요. 오히려 주인공은 언제든지 할 수 있거든요. 이걸 빨리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올해는 유독 대형작들이 많이 올라오는 만큼 이들도 벌써부터 차기작에 대한 그림을 그려두고 있다. 박송권은 <영웅>과 <명성황후>를 기다린다. 특히 작년에 <명성황후> 지방 공연에서 홍계훈 역을 맡았던 그는 이번 20주년 공연에서 제대로 진면목을 발휘하고 싶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일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다. 팬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캐릭터에 집중하기 위해 <레 미제라블>과 <프랑켄슈타인>의 오디션도 포기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영화 <젊은 남자>에서 이정재가 한 대사처럼 그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을 믿는다. 지난해 드라마를 경험한 정영주에게는 올해도 이야기가 오가는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확실하게 지키고 싶은 건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예전에 무리한 스케줄로 치명적인 위기를 겪었던 그녀는 무엇보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영주는 언젠가 선배 윤석화에게 받은 말을 그대로 박송권에게 건네며 서로를 축복한다. “송권아, 우리 무대에서 오래오래 보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7호 2015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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