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오르는 꽃
막연히 배우를 꿈꾸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던 조상웅은 친구의 권유로 다소 얼결에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우연 같은 일을 계기로 그의 삶에는 변화가 생겼다.
삼 년의 시간, 세 개의 작품. 서두르지 않는 젊은 배우 조상웅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2012년으로 시간을 돌려야 한다. 해마다 수십 편의 대형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해는 한두 작품으로 기억되기 마련. 그리고 지난 2012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한국어로 공연되기까지 27년이 걸린 세계적인 작품 <레 미제라블>이다. 소위 말하는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이 작품의 초연 캐스트에 누가 이름을 올릴 것인지 관심이 대단했는데,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리우스와 코제트, 에포닌 같은 젊은 배역은 신인 배우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그때 나타난 새로운 얼굴 중 한 명이 조상웅이다. 천진하고 곱상한 소년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는 세상물정 모르고 혁명을 외치는 부잣집 도련님 마리우스로 무대에 올랐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레 미제라블>에서 처음 조상웅을 발견했겠지만, 그는 엄밀히 말해 신인 배우가 아니었다. 조상웅은 이미 2006년 일본 극단 시키가 국내에 올린 <라이온 킹>으로 데뷔한 짧지 않은 경력의 배우였으니까. 그런 그에게 혜성 같은 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그가 첫 작품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기 때문이다. “<라이온 킹>을 하면서 시키 시스템을 경험해보니까 거기에 들어가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시키는 소속 배우에게 전문적인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주저 없이 입단 오디션을 봤죠. 일본어는 전혀 못했지만요. 타지에서 활동하면 힘들다고들 하는데, 저는 정말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거기서 한 모든 경험 하나하나가 다 좋았어요.”
“묵묵히 노력하면 언젠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마음을 잡았던 조상웅은 입단 다섯 달 만에 <라이온 킹>의 심바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했던 건 2009년에 첫선을 보인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불완전한 십 대 모리츠를 따낸 점이다. 시키가 제작한 초연에 외국인이 출연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처음엔 캐스팅 후보에도 못 오른 ‘괄호’ 속 배우였어요. 그런데 오디션 심사를 보러 온 오리지널 프로덕션 음악감독이 저를 꼭 모리츠로 썼으면 좋겠다고 했대요. 기회가 좋았죠.” 조상웅은 잠시 사이를 두고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그저 운이 좋았던 건 아니에요. 제 나름대로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수줍은 듯 웃는 얼굴로 무한 긍정의 답을 하던 그에게서 들을 거라 생각지 못한 의외의 말에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싶은 심보가 발동했다. “성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당황한 듯 크게 웃던 조상웅이 다시 힘을 실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없으니까.”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거친 후에는 <코러스 라인>과 <캣츠>에 출연했고, 이 세 작품에 참여한 시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 내내 심바로 무대에 올랐다. 무려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말이다. 그 오랜 시간을 반복해 같은 무대에 오르면서 그는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까. “공연 마지막 날에도 더 좋은 걸 찾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역으로, 정답은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 작품을 오래 하면 지루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 작품 안에서 성장해간다는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역할 하나가 제 것이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도 좋고요.” 그게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출연한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선 만큼 조급함을 느낄 법도 한데, 그가 선택한 작품은 1년 동안 조연으로 출연하는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위키드>였으니까. 그리고 조상웅은 지금 현재 그의 첫 번째 창작뮤지컬인 <러브레터>에 출연 중이다.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많은 부분이 배우에게 달려 있는 초연 창작뮤지컬은 배우로서의 재능을 냉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조상웅은 타고난 이미지만으로도 기억 속에 아련하게 존재하는 첫사랑 이츠키를 표현해낸다. 다행인 건, 조상웅은 누구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게 싫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떠올리는 모습, 그게 곧 자신이라는 사람이라면서.
‘불안’, ‘초조’, ‘후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상웅과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이 배우는 언제 어떤 슬럼프로 좌절을 경험하게 될까 궁금해졌다. “슬럼프는 작품마다 겪죠. 힘든 게 왜 없겠어요. 그런데 제 인생의 모토가 ‘지금 이 순간을 살자’예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다 현재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조상웅이 다시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물론 관객이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된다면 바랄 거 없이 좋겠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7호 2015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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