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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INNER VIEW] <러브레터> 첫사랑의 추억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 [No.136]

글|누다심 사진제공|로네뜨 2015-02-04 5,462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묘한 기분이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고, 가족보다 더 가까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가 이성이라면 어떨까?


이츠키는 중학교 3년 내내 한 여학생과 같은 반이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이츠키였다. 동명이인이었던 것.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놀림도 많이 받았고, 도서부장 일도 같이해야 했다. 이츠키는 소녀를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워낙 수줍은 탓에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표현하지 못했다. 소녀 이츠키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년 이츠키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소년은 첫사랑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이츠키는 시간이 흘러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대학 선배의 소개로 히로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여자는 놀랍게도 자신의 첫사랑과 무척이나 닮았다. 이츠키는 주저하지 않고 히로코에게 마음을 전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줄 약혼반지를 준비해 놓고도 선뜻 청혼하지 못했다. 사실 이츠키의 마음에 있었던 사람은 히로코가 아니라 이츠키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츠키는 산에서 조난당해 죽음의 문턱에서도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도대체 첫사랑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렬할까? 비단 이츠키뿐이랴. 많은 사람들이 이츠키처럼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첫사랑이 강렬하게 남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과 주장이 있겠지만,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완결을 추구하는 인간의 고유 성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람에게는 한 번 시작한 것은 끝을 맺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자이가닉(Zeigarnik)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한 집단의 피험자에게는 과제를 다 풀도록 하고, 다른 집단의 피험자에게는 과제를 다 끝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 과제를 기억하라고 했을 때, 과제를 미완성한 집단의 피험자들이 과제를 완성한 집단의 피험자들보다 그 과제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했다. 이처럼 완성된 과제보다 미완성된 과제를 더 오래 마음속에 간직하는 현상을 자이가닉 효과라고 한다. 


이는 비단 기억에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심리치료 이론 중 하나인 게슈탈트 치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인 미해결 과제(Unfinished Business)에 대해 말한다. 과거의 사건 중 해결(완결)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내담자들이 미해결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과거의 연인이나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께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내담자가 있다면, 빈 의자에 그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게 만든 후 그 말을 하도록 한다.


첫사랑은 실수가 많다. 제대로 고백해보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혹은 어렵사리 고백을 해놓고, 사소한 싸움으로 등을 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충동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고는 그 즉시 후회가 들어 말을 주워 담고 싶지만, 첫 경험이라 모든 것이 미숙하고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춤주춤하다가 정말 헤어지게 된다. 또 상대방의 이별 통보에 얼떨결에 동의하는 바람에 정말 이별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첫사랑은 시작도, 중간 과정도, 끝맺음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되지 않기 쉽다. 당연히 마음에 남을 수밖에.




우리의 마음은 해결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하라고 계속 촉구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려고 한다. 이츠키 역시 그랬다. 제대로 고백도 못해보았던 자신의 첫사랑 이츠키와 닮은 여인 히로코를 만나자마자 프러포즈를 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조난사를 당하긴 했지만, 이츠키는 나름의 방법으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한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해결 과제를 완수하려는 이츠키의 노력은 조난사를 거치면서 히로코에게 미해결 과제를 던져주었다. 히로코는 약혼자 이츠키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후에도, 심지어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주는 또 다른 남자 아키바가 있음에도 이츠키를 잊지 못한다. 아키바가 보통의 남자였다면 아마 전 약혼자 이츠키를 못 잊는 자신의 약혼녀에게 망각을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키바가 선택한 방법은 외면이 아니라 직면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존중하면서도 그 마음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게 도와주었다. 이츠키의 옛 주소로 편지를 쓰는 것도 인정해 주었고, 이츠키가 살았던 그 동네로 여행도 떠났다. 마침내 이츠키가 조난사 당했던 그 산으로 자신의 여자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히로코로 하여금 이츠키를 향해 마음을 전하라고 독려한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던 안부 인사, 절절한 외침, 아련한 메아리.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히로코의 미해결 과제는 완결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여자 이츠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히로코는 이츠키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여자 이츠키였음을 알게 되었다. 


내면의 소리를 잘 듣고, 그 소리에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억지로 마음을 바꾸려거나 고쳐먹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직면할 때, 우리의 삶은 환상에서 현실로, 고통에서 행복으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누다심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심리학을 꿈꾸는 이. 
심리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누다심의 심리학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주제로 강연과 
집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꼭 알고 싶은 심리학의 모든 것』,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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