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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킹키부츠> [No.136]

글 |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 CJ E&M 2015-02-02 6,594

쇼 뮤지컬에 담긴 유토피아의 판타지





€‘이건 그저 신발 이야기라구!’ 

시작부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자칫 호들갑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뮤지컬 <킹키부츠>는 신나고 재미있다. 연말연초에 흥겨운 공연을 찾는 사람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추천할 수 있을 만큼 <킹키부츠>는 쇼 뮤지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 화끈한 볼거리,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음악, 적당히 따끈한 도덕적 교훈 등등 쇼 뮤지컬의 필요조건을 갖췄으면서도 자칫 그런 요소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넉넉하게 메우는 충분조건의 미덕을 지녔다고나 할까. 쉬운 이야기는 유치하지 않고, 대담한 볼거리는 천박하지 않으며, 흥겨운 음악은 관객의 정서에 친숙하게 다가오고, 적절한 감동은 억지스럽지 않다. 쇼 뮤지컬로서 이 작품은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전적으로 쇼 뮤지컬로만 규정짓기에는 좀 아깝다. 작품의 근간에는 실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가 깔려 있는데, 그 안에 생각해볼 만한 것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 찰리가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그저 신발 이야기’일 뿐이다. 파산 위기에 몰린 신발공장을 되살리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쳐 새로운 신발을 만들어 성공을 이뤄낸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재미있다. 일반적인 남성을 위한 신사화가 아닌, ‘다양한 남성’을 위한 독특한 부츠를 만들겠다는 것. 부츠의 고객이 될 ‘다양한 남성’은 바로 드래그퀸이다. 기발하지 않나? 이 평범치 않은 사람들을 고객 삼겠다니. 보수적인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공장을 다시 일으키고 성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고객을 이해하고 고객이 주인공처럼 빛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드래그퀸을 다룬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드래그퀸이 있다. ‘나를 이해해주세요’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도와줄게’라는 당당한 모습으로 말이다. 새로운 풍경이다. 이쯤 되면 ‘그저 신발 이야기’라고 보기엔 얘깃거리가 많아지는 셈이다. 쇼와는 또 다른 작품의 정체성이 배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드래그퀸과 노동자의 건강한 ‘갑’질 

이 작품의 재미가 배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수자들은 드래그퀸이 됐든 공장 노동자가 됐든 절대 주눅 들지 않는다. 표면적인 주인공은 젊은 공장주 찰리이지만 그는 이들의 도움을 늘 받아야 하는 입장일 뿐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장을 살릴 새로운 아이템 ‘킹키부츠’의 영감과 디자인은 드래그퀸 롤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디자인을 멋들어지게 실물로 만들어내는 기술은 전적으로 공장 노동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가끔 고용주로서 꽥 소리를 지른다 해도 너그럽고 넉넉하게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바로 드래그퀸과 노동자들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찰리가 아니라 바로 이들인 셈이다. 


이건 분명 대중서사의 유쾌한 판타지이다. 대중예술 특유의 도덕적 낙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다. 노동자를 가족으로 여기는 공장주 찰리의 책임감이 그렇고,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는 드래그퀸 롤라의 자존감이 그렇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서 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초에게조차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태도가 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의 ‘을’들이 건강한 ‘갑’질을 하는 상상력이라니. 드래그퀸 롤라는 온전한 배려와 인내로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까지도 감싸 안고,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된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산 아저씨 아줌마로서 공장주 찰리를 도와준다. 남자 찰리와 드래그퀸 롤라 사이에 선입관 없는 우정이 쌓이고, 공장주 찰리와 노동자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흐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구? 맞다. 말도 안 된다. 리얼리티라고는 요만큼도 찾을 수 없다. 롤라의 대사처럼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면’ 된다구? 천지사방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말이다. 어찌 보면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상상력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워낙 퍽퍽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소수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인권선언조차 어렵고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땅콩 하나 때문에 비행기를 세워라 돌려라 하는 오만함이 판치고 나와 다른 상대는 무조건 악마로 치부해버리는 무서운 이분법의 세상에서, 찰리와 롤라와 공장 식구들의 이야기는 대중서사의 순진하고 선량한 상상력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순진하고 선량한 상상력을 통해 지금 우리가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는 더없이 확연해진다. 


대중서사의 도덕적 낙관은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대중예술이 미학적으로 비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자리는 언제나 현실과 유토피아의 사이이다. 판타지는 현실의 척박함에 대한 은유이자 유토피아를 향한 상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논리를 박차면서 판타지는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는 거리를 확보한다. 그 거리를 통해 판타지의 상상력은 현실의 결핍을 분명하게 직시하는 시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킹키부츠>의 판타지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유쾌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잊어버린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다시보기에 가까워 보인다. €






유쾌한 그들의 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그들의 쇼이다. 먼저 기가 막히게 쭉쭉 뻗은 드래그퀸 ‘언니들’의 각선미 과시나, 라운드 걸의 비키니 워킹은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담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킹키부츠를 신은 드래그퀸들의 부츠 쇼는 여타의 뮤지컬에서 숱하게 나왔던 그 어떤 패션쇼보다도 신나고 통쾌하다. 왕년의 팝스타 신디 로퍼의 음악은 쇼의 활기를 불어넣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팝의 리듬이 때에 맞춰 경쾌하면서도 느낌 있게 살아나는데, 관객의 감성과 음악의 눈높이가 잘 맞아떨어져서 절로 고개가 까닥여진다. 개인적으로 이 음악이 낯설지 않았던 건 질풍노도 청소년 시절 워크맨에 이어폰 꽂고 주야장천 들었던 신디 로퍼의 음악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신디 언니, 오랜만이야. 그래도 이 작품 최고의 장면을 들라면 컨베이어 벨트 위의 쇼를 꼽을 테다. 킹키부츠의 성공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걷고 뛰고 춤추는 모습을 보시라. 컨베이어 벨트는 더 이상 단순반복의 쳇바퀴가 아니라 또 다른 걸음을 가능케 하는 기회의 발판으로 그 의미를 바꾼다. 공간 활용의 기능성을 살릴 뿐 아니라 극적 설명의 기능까지 너끈히 맡는다는 점에서 이런 설정은 기발하고 재미있다. 


작품의 이야기꺼리를 풍성하게 만든 데는 배우의 공이 크다. 특히 롤라 역을 맡은 강홍석의 연기는 도드라진다. 누가 봐도 딱 벌어진 상남자 강홍석이 만들어낸 롤라에게서 보이는 것은 드래그퀸의 외모가 아닌, 마음이다. 지금까지 뮤지컬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드래그퀸은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예쁜이들이었다. 하지만 강홍석의 롤라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라는 롤라의 대사가 살아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곱지 않고 오히려 복싱이 어울리는 건장한 외모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아름답고 싶고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싶은 드래그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고나 할까. 리얼리티가 여기 있었네그려. 


작은 배역을 크게 만든 정선아의 역량도 돋보인다. 그 역량은 ‘끼’가 아닌 성실함이다. 언뜻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한 역할을 존재감 있게 만든 것은 배우 정선아의 역할을 향한 성실함이 빚어낸 성과이다. 이런 역량이야말로 진짜 주연배우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아닐까. 배우로서 정선아를 믿을 수 있는 이유이다. 멋진 턱시도를 입은 신사도, 크고 단단한 그것을 자랑하는 마초도, 아름답고 싶은 드래그퀸도 모두 킹키부츠를 신고 런웨이를 걷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다운 모습으로 더불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꿈과 같은 <킹키부츠>의 선량한 결론에 나도 모르게 물개박수를 치고 말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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