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희, 올해 무대 인생 61주년을 맞는 그녀를 대중들은 ‘여러분’을 부른 가수, 미니스커트를 처음 입은 신여성 1호로만 기억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즘 왜 활동을 안 하시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다섯 살에 무대에 선 후 60년 무대 인생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그녀에게 ‘왜 활동을 안 하냐’는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을 한번도 가수로 생각해본 적 없다는 그녀는 자신을 엔터테이너, 뮤지컬 배우, 또는 딴따라라고 부른다. 다섯 살 때 아버지의 무대에 떼를 써서 오른 지 벌써 60여 년이 지났다. 지난 무대 인생을 듣다보니 왜 그녀가 뮤지컬계 대모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윤복희는 인터뷰하는 그날 저녁에 그리스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짐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기꺼이 우리를 집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번 콘서트를 소개해주세요.
그동안 콘서트 하자는 제의가 많았는데 나는 혼자서 하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뮤지컬은 함께 둥글게 하잖아. 그게 재밌지. 그래서 안 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매니저도 없고, 기획도 없고, 빽도 없이 지금까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었을 거 아냐. 그러면 땡큐 카드같이 작고 예쁘게 해보겠다.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좀 지루하지 않게, 저건 35년 전에 부르던 노래다 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추억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거예요.
첫 무대는 어떻게 서게 되셨나요?
우리 아부지가 ‘부길부길쇼’를 했어요. 지금으로 치자면 뮤지컬 극단인 거지. 부산으로 예술인들 다 인솔해서 피난을 갔는데 거기 미 8군에서 쇼를 만들었어요. 쇼 해서 로션을 받으면 시장에 가서 팔아서 생활하고, 의상도 만들고 그랬어요. 그게 지금의 국제시장인 거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하니까 아버지나 어머니 다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하고 실제로 피도 나고 (그게 몇 살 때?) 다섯 살 때지. 무대에 꼭 서고 싶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에 선물로 나왔어요. 왜 산타할아버지 선물 자루 있잖아. 그걸 내려놓으면 마그네슘이 터지면서 내가 튀어나오는 거야. 한번 해보니까 또 하기 싫더라고. (네?) 어릴 땐 매일 바뀌어. 다 그래요. 오빠처럼 학교 가고 싶은 거야.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첫 무대에서 대히트를 하는 바람에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지.
무대에 서는 게 일이어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그저 오늘에 충실하고 나를 선택해주면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76년도에 자동차가 뒤집어지고 나서 뮤지컬을 하라는 성령을 받았어요. 후배들이랑 뮤지컬을 하면서 그때부터는 아~ 좋았어. 이게 나한테 주신 가장 큰 재능이구나. 내가 어렸을 때 했던 기억을 살려내서 가르치고 그랬지.
초창기에 뮤지컬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공연을 하셨지요.
나뿐만 아니라 제작하는 사람, 다들 목숨 내놓고 했어요. <빠담 빠담 빠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사운드 오브 뮤직>, <피터 팬> 전부 무보수로 했어요. 그땐 대관료도 없었는데. 잘되면 조금 주고 그랬지. 의상도 있는 거 서로 주고 그랬어요. 디자이너가 어딨고 분장이 어딨어. 다 우리가 했지. 요즘은 굉장히 호강하는 거야. 처음에는 목에 마이크를 매달고 했어요. 공연 끝나면 목 주위가 시커멓게 멍들곤 했어. 대사할 땐 마이크를 안 쓰고 노래할 때가 되면 마이크를 켜요. 마이크 켜는 걸 깜박 잊으면 그냥 생소리로 해야 돼. 방음이나 됐나, 극장이. 유관순기념관도 그렇고 세종도 그렇고 거기가 다 정치인들 연설하는 데지. 80년대 초에 공연할 때도 메인들만 마이크를 줬어요. 브라스 불어대고 하는데 어떡해. 죽기 살기로 하는 거야. 마이크 없이도 목소리가 브라스 연주를 뚫고 나가야 하잖아.
<피터 팬> 때 굉장히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피터 팬> 공연하면서 척추 세 개가 내려앉았잖아. 그게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첫 어린이 뮤지컬이잖아요. 객석을 보니까 어린아이들이 반 이상 차 있는 거야. 객석은 완전 개구리들이고. 첫 공연을 해야 하는데 올리기 몇 십분 전에 기계 설치가 완성된 거야. 그러니까 시험해볼 시간이 없었던 거지. 첫 공연이 첫 연습이었던 거야. 플라잉 하러 올라가면서 사도신경, 주기도문 다 외웠어. 막 올리면서 곧바로 날아 들어가야 하는데 세트에 다리가 걸려서 몸이 막 돌면서 날아가니까 아이들은 와~ 하고 함성 지르고 난리가 난 거야. (그때 다치신 거예요?) 이후에도 <피터 팬>은 여러 차례 했는데 다친 건 86년도. 후크 선장하고 칼싸움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후크 선장을 추송웅 씨가 했다고. 근데 보니까 ㄷ자로 연결해놓은 못이 빠지고 있는 거야. 추송웅 씨는 뒷걸음치고 있으니까 못 본 거지. 그래서 내가 당겼는데 그 사람이 남자고 하니까 반동으로 대신 내가 떨어졌어요. 근데 발바닥으로 곧바로 떨어졌어. 우지직 소리가 나더라고. 다음 장면에 악어 쫓으러 나가야 하는데 한쪽 발이 안 움직이는 거야. 공연 중간인데. 그때는 언더스터디가 있나, 더블이 있나.
그 정도 사고면 공연을 중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관객이 어른이면 양해를 구하고 중지했죠. 이거는 세네 살 먹은 어린이들이야. 피터 팬이 다쳐서 공연을 못한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해. 그러니까 후배들이 무대 뒤에서 내가 등장할 위치로 업고 뛰는 거지. 그러면 한쪽 발로 나와서 연기를 하는 거야. 그때 (유)인촌이가 첫 공연 보러 왔다가 공연 끝나고 날 업고 한의원으로 달려갔지. 그때는 인대만 끊어진 줄 알고 깁스하고 다시 저녁 공연을 했어요.
그럼 언제 척추 다치신 걸 아셨어요?
그렇게 한 10년 현대극장 공연을 하다가 나왔어요. 배우들끼리 ‘우리가 돈’이란 생각으로 참여해서 지분제로 <캣츠>를 올리기로 했어요. 집 저당 잡혀서 대관을 하고 신입 뽑아서 훈련시키고. 의상도 지분제, 분장도 지분제로 참여하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어. 거기 앙상블이 허준호, 전수경, 임춘길, 박계환, 주원성 무지 많아. 뮤지컬계 최고 음향감독인 김기영, 한진섭 연출도 다 참여했지. 공연 전날 총연습을 하는데 배우들에게 한참 뭐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손에서 담배가 뚝 떨어져. 오른쪽이 말을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들어가서 쉬겠다고 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어요. 그러니까 여기선 안 된다고 구급차를 타고 어딜 가더라고. 등 쪽에 대바늘을 꽂는 거야. 꽂더니 척추 5, 6, 7번이 내려앉았대. 그걸 몇 년 동안 몰랐던 거지. 해마다 4~5작품을 하니까 허리 아프고 하면 애들한테 등 좀 밟으라고 했지 그런 줄 알았나. 지금은 오른쪽만 마비가 됐지만 이젠 목 밑으로 마비가 온다고 해. 훨체어 타고 가야 한다는 거야. 내일이 공연인데 말이 안 되잖아. 다음 날 공연하러 갔죠. 애들한테 티를 안 냈어. 그래도 그리자벨라니까 다행이지. 그라자벨라가 늙은 창녀 고양이잖아. 한쪽 다리를 못 쓰니까 질질 끌고 가서 했죠. 관객들은 설정인 줄 알았을 거야. 작품에서 ‘메모리’를 한 세 번 부르는 데 두 번째는 춤을 춰야 했을 거야. 한쪽 발로 지탱하고 발을 올려서 턴을 해야 하는데 바르르 떨리는 거야. 너무 아프니까.
선생님은 왜 그렇게 모든 걸 혼자 짊어지고 가세요.
말할 수가 없었지. 우리가 올리고 지분제고 애들은 신인이고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다쳐서 이렇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캣츠> 공연할 땐 수익을 내서 뮤지컬 공연장을 만들자는 꿈이 있었다고. 각오가 굉장했어. 스폰서도 없고, 기획도 없으니까 겨울에 배우들이 캣츠 분장하고 트럭 타고 다니면서 광고하고 그랬다고. 공연 끝나고 배우들끼리 한 10만 원씩 나눠 가졌나. (그때 10만 원이면 지금 어느 정도에요?) 지금 돈으로 10만 원 정도.(웃음) 그렇게 4년을 했어요. 2년 지나고 (진)복자나 (전)수경이가 내 언더스터디를 했고. 몸은 다행히도 그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요. 병원에서는 몰핀을 맞으라고 하는데 약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정확히 내 몸이 어떻게 아픈지 알고 느끼며 가고 싶었어. 약 도움을 안 받고 몸이 그런 상태로 4년을 버텼지. 나중에는 너무 아프니까 하느님한테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어. 너무 아파서 기절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신경이 살아난 거야. 그래서 <피터 팬>도 다시 하고 <수퍼스타>도 하고 그랬지.
선생님은 진정 그리자벨라신데요. 제2의 삶을 받으셨잖아요.(웃음) 후배들이 왜 선생님을 뮤지컬계 대모라고 부르는지 알겠어요.
그땐 애들이 ‘대장’이라고 그랬지. 애들 무용, 노래, 발성 다 가르치고. 선생이 없었으니까. 남자애들은 혼 많이 났어. 노래나 춤이나 연기, 두 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프라이드는 다들 더럽게 강했다고. 클래식 하는 사람이나 발레 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들도 그랬고. 설득하면서 모시고 가는데 정말. 무용도 발레만으로는 안 되니까 재즈 가르치는 사람을 데려와서 배웠지. 내가 아프고 힘들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어.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후배들에게 언더스터디를 맡겨보고 객석에서 체크하고 후배들이 배우가 되어가는 것이 기뻤어요. 그래서 힘들지 않았어. 우리 아버지가 해서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하니까 애들이 하는 거잖아. 이제는 내가 대우를 받거든.
만능 엔터테이너세요.
만능, 그런 말이 어딨어. 배우면 다 할 수 있어야지. 우리 인간을 놓고 이야기해봐. 내가 말을 하면 음악이야. 표현은 연기고, 움직이는 것은 무용이야. 어떤 걸 표현할 때 이야기하고 움직이는 거는 당연하지. 우리가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게 하나였고, 원래 다 할 수 있었다고. 그게 뮤지컬이야. 만능은 무슨. 그런 말이 어딨어.
미 8군에서 공연하다 루이 암스트롱에게 발탁되어서 미국 무대에서 활동하셨죠.
미 8군에 있을 땐 모창만 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루이 암스트롱 모창한다는 게 귀에 들어가서 나를 찾은 거야. 내한 공연 할 때 한번 하라고 해서 공연 게스트로 참여해서 듀엣을 했어요. 미국에 가서 계약서를 보냈더라고. 그 이후 라스베이거스 호텔이나 뉴욕 큰 무대에서 유명한 분들하고 같은 무대에 섰어요. 그때 나랑 무용하는 언니들 세 명 노래 가르쳐서 ‘코리아 키튼즈’라고 한국의 고양들이란 이름으로 공연했지. TV도 하고 좋았죠. 근데 오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왔어요.
오빠가 가수였던 윤항기 목사님이시죠. 히트곡인 ‘여러분’을 오빠가 작곡해주었다고 하는데.
에이 무슨. 그건 잘못된 거야. 내가 미국에서 라이브를 많이 하고 TV 출연도 많이 하고 해서 항시 들어오면 특집 방송을 했어요. 67년도에도 그랬고. 76년에도 ‘나는 어떡하라고’(윤항기 노래) 도와달라고 해서 그거 해주려고 나왔다가 차가 뒤집힌 거지. 리사이틀 하면 대본도 내가 쓰고 PD들에게 도움을 주거든. 79년도 서울국제가요제는 MBC에서 하는 생중계 가요제인데 영어를 못하니까 내가 통역을 해줬고 호스트로 가요제에 나간 거지. 그때 <피터 팬>을 하고 있을 때니까 세종 스태프들하고 잘 알거든. 조명이나 동선까지 내가 다 짰다고. 원래는 내가 (‘여러분’으로) 상을 탈 게 아닌데 외국 심사위원들이 나한테 준 거야. 그때 오빠 전도할라고 오케스트라 있는 데 나와서 지휘봉만 들라고 했지. ‘여러분’이 원래 영어 가사인데 어떻게 윤항기 씨가 써요. 보통 가요는 3분 몇 초예요. 근데 이거는 7분 몇 십초야. ‘여러분’은 78년에 쓴 건데 바이블 스터디를 하면서 간증을 할 거 아냐. 내가 그때는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간증을 하면 말이 길어지고 해서 글로 썼다고. 그걸 압축해서 시를 쓰는 거고 거기에 곡을 붙이면 노래가 되는 거야. 그 곡 중 하나가 ‘여러분’이었어요.
미니스커트에 관한 것도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젤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은 맞죠. 근데 내가 귀국할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다 그건 아니죠. 당시에 미국에서 여길 오려면 열 몇 시간에 오는 게 아냐. 최소한 며칠은 걸려. 우리는 항공사가 없었고 김포공항도 군인용이었는데 해외 항공사가 좀 들어왔어요. 그때가 1~2월이었는데 통행시간이 있을 때였어요. 공항 셔터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는 거야.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다들 롱코트 입고 활주로에서 발발발 떨었어요. 무슨 미니스커트. 그러다 새벽 5시 되니까 시발택시가 들어오더라고. 그리고 다음해인가 비행기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내리는 장면이 나오는 <미니스커트>인가 <미니 아가씨>인가 하는 영화가 했어요. 그리고 신세계백화점이 생기면서 내 옛날 사진이랑 그 영화랑 어떻게 해서 마치 내가 내리는 것처럼 광고를 크게 했어요. “미쳤군 미쳤어. 새롭게 우리가 온다. 신세계”(이런 카피와 함께) 난 몰랐지. 나중에 알고 그거 내리라고 했는데 그래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내가 죽어도 안 입고 내렸다고 하니까 마치 본 것처럼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어요.
최근에는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시고, 여행도 즐기시는 것 같아요.
지난 1년 반 동안은 계속 그랬죠. 작년에 쭉 쉬었어요. 내 일생에 처음 쉬어본 거야. 미국에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나 자유의 여신상 한번 구경해본 적이 없어요. 어딜 가도 가면 그 일만 하는 거지 다른 것은 못하는 거야. 작년에도 쉬려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해. 그래서 제작자 앞에서 ‘나 쉴 거라고’ 하면서 머리를 잘랐어요. 그때는 공연할 때니까 머리가 길었지. 그러니까 쉬라고 하더라고. 애들은 쇼크였는데 원래 난 내 머리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잘랐거든. 남한테 머리 못 맡겨요. 딱 잡으면 어느 정도 될지 알지. (웃음) 영국으로 터키로 그리스로 다 다녔어. 이거 진작 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름다움의 극치야. 진짜 기가 막혀. 오늘은 목사님 부부 300명이랑 아테네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거기서 크루즈 여행을 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2호 2011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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