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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Mr.BONG ESSAY] 서태지의 <크리스말로윈> [No.134]

글 |봉태규 그림 | 봉태규 2014-12-08 3,976
The Day 





나는 어릴 때부터 날짜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흐릿했다. 아니, 거의 지워져 있다고 봐도 된다. 이상하게 요일은 정확하게 기억했는데 날짜는 매번 틀리기 일쑤였다. 정말 심할 땐 그달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업 특성상 누군가에게 사인해줄 일이 어쩌다 있을 때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왜냐면 언젠가 그해의 연도와 날짜를 몽땅 잘못 써서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되어 과거와 미래로 타임슬립을 한 적이 있으며, 어렵게 사인을 부탁했던 상대에게 성의 없다는 비난을 들으며 사인을 돌려받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짜 개념이 엉망진창인 내게도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몇 개의 날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내가 키웠던 강아지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 ‘98년 07월 07일’이다. 이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돌연 은퇴를 선언한 뒤 돌아온다, 돌아오지 않는다, 소문만 무성했던 서태지가 정식으로 컴백한 날이자 그가 그룹이 아닌 솔로 가수로 첫발을 내딛었던 날이기도 해서이다.
그날 오후 나는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엄마가 내 팔에 스윽 하고 뭔가를 올려줬던 그때 그 따뜻한 감촉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 갑작스러운 접촉이 생기면 움찔하고 놀라는 편인데, 그때는 신기하게 눈만 스르륵 떠졌다. 묘한 느낌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녀석은 딱 그때까지만 귀여웠다. 자라면서 점점 본색을 드러낸 뒤부터는 “나 따위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라는 말을 내뱉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같은 모습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강아지라면 이럴 거야, 라는 예상 안에 드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귀염성이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예를 들면 내가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와도 멀뚱히 쳐다보며 “어이!” 하고 말하듯이 꼬리만 살짝 흔들거나, 현관으로 다가와 내 신발에 콧바람을 “흥!” 불고 나서 “이 정도면 됐지”라는 눈빛을 보내며 어슬렁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잠을 잘 때도 자신이 눕고 싶은 자리를 예민하게 선정한 뒤 내가 거길 조금이라도 차지하고 있으면 앞발로 내 몸을 툭툭 건드리며 자리를 내줄 것을 요구하는 건방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나는 단호하게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제멋대로인 그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모습이 리얼하달까.

어쨌든 강아지가 처음 집에 온 날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이름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고민했나 싶을 정도로 강아지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지 가족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찔했던 기억은 다들 지쳐서 빨리 결론을 내리려는 마음에 아마도 ‘쫑’, 이런 이름을(물론 이 이름에도 심오함과 고민이 담겨져 있겠지만) 붙여주려고 했던 순간이다. 그런 자포자기 식의 의사 결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그 사이사이 서태지 솔로 1집을 맹렬히 들었다. 앨범 어디에도 가사가 적혀 있지 않아 연습장에 가사를 받아 적으며 공부하듯이 집중해서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해 노래를 듣고 나서야 앨범 재킷을 세세하게 살펴봤다. 혹시라도 구겨질까봐 아주 조심하면서. 그러다 인트로 곡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Maya’. 혹시나 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뜻도 멋졌다. 환영, 현상 세계라니. 크! 늦은 밤 나는 확신에 차 무릎을 탁 쳤다. “이거다!”라고. 그렇게 14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한 강아지의 이름은 마야가 됐다. 그래도 서태지 최고의 인트로는 ‘yo! taiji’라고 생각합니다만.



봉태규>> 세상일에 관심 없는 척하지만, 자신의 눈을 끄는 건 굳이 나서지 않으면서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런 남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4호 2014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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