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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더 데빌> [NO.133]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알앤디웍스 2014-11-27 4,472
소화되지 못한 관념에 얹혀버린 ‘악마’의 매력
                              


매혹적인 이름 ‘악마’                                  
편의점 냉장고에서 ‘악마의 유혹’이라는 커피를 보았을 때, 참 뜬금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한낱 커피 한 잔에 거창하기도 하지. 그런데 버스 터미널에 붙어 있는 수분 크림의 이름을 보니, 어럽쇼, ‘악마 크림’이네. 맞아. 파우스트 같은 뛰어난 인간이야 최고의 지혜를 위해 악마와 거래를 텄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궁색한 지갑을 열어 ‘악마’에게 살 수 있는 건 고작 한 모금의 달콤함이나 한순간의 피부 물광인걸. 오후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면, 퍼석한 얼굴에 생기가 돌 수 있다면! 좀 폼이 안 나긴 해도 파우스트나 우리나 각자의 행복을 위해 크든 작든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거래의 대가로 지불하는 건 마찬가지인 셈이다. ‘악마’라는 이름의 거래 상품은 언제나 우리를 매혹시킬 수 있는 ‘잇 아이템’이다.

뮤지컬 <더 데빌>도 마찬가지이다. 공연 전부터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배우와 연출의 이름값에 있을 테지만, ‘악마’라는 제목의 아우라를 무시할 수는 없다. 뮤지컬의 옷을 입은 ‘악마’는 무엇으로 우리를 매혹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창작뮤지컬 <더 데빌>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은’ 매력적인 열매를 관객 앞에 툭 던져 놓는다. 록 뮤지컬 형식에 걸맞게 철골 구조의 간결한 무대는 가운데 공간에 포커스를 맞추고, 양옆에는 클래식과 록을 동시에 연주할 밴드와 4인조 코러스가 자리잡았는데, 어두운 듯 세련된 공간의 첫인상이 눈에 띈다.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운데로 집중된다. 마치 라이브 콘서트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조명의 움직임은 현란하고, 그 강렬함에 호응하듯 밴드의 음악은 클래식하면서도 강렬한 록의 호흡을 숨 쉴 틈 없이 내지른다. 멋있다.

그 스타일의 중심에는 음악이 있다. 뮤지컬 형식으로 치자면 성스루에 가깝겠지만, 하나의 독립된 노래로 들어도 손색없게끔 각각의 넘버가 선보이는 완결성은 돋보인다. 록의 에너지와 클래식의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품은 각각의 넘버는 듣는 이의 감정과 신경을 감각적으로 자극한다. 음악의 매혹에 거칠게 마음이 쏠린다. 거기에 배우의 가창력은 정말이지 ‘끝내준다!’ 한지상과 김재범, 차지연의 에너지는 터지듯 분출되면서도 어루만지듯 아름답다. 뮤지컬에서 음악을 완성하는 이는 배우이니, 그렇게 보자면 이 작품의 음악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자람이 없는 셈이다. 멋있다.




‘악마’가 사라졌다!                                      
이렇듯 <더 데빌>은 ‘간지 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춘 작품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작품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끝내 완성한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분명 스타일이 멋진 공연이지만 정작 작품 자체의 관심은 스타일의 완성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음악의 스타일을 강조한다고 보기에 작품의 이야기는 너무 복잡하다. 음악을 중심으로 놓으려면 이야기가 더 정교하거나 아니면 아예 단순해야 하건만, 이 작품은 단순해지기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엔 정교하지가 않다. 이 정교하지 않음에 상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징이란 극적 논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고안된 상징은 모호하기는커녕 명료하고, 표면에 매이기는커녕 심연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더 데빌>의 이야기는 여전히 모호하고 표피적이다. 모호함의 정점에는 악마의 실체가 있고, 표피성의 정점에는 악이 저지르는 폭력이 있다. 이 작품의 시작에서 악마는 실체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이름을 빌린 설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 치명적인 거래를 제안하는 ‘엑스’는 언뜻 메피스토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일 뿐. 메피스토에서 시작해서 루시퍼도 됐다가(그레첸이 읊어대는 묵시록의 악마!), 하이드도 됐다가(너와 나는 거울 속의 하나!) ‘엑스’의 실체는 종잡을 수 없다. 기존의 고전이 제시하는 악마의 틀과 다르다? 악이 권력의 모습으로 독을 뿜어내는 지금 여기에서 ‘악마’가 과연 누구인지를 제시하려는 예술적 통찰일까? 잠시 기대했지만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악마는 실체에서 내면의 심리로 퇴행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지는 상대적 허상. 악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메피스토에서 루시퍼를 거쳐 하이드를 찍고 결국 ‘마음 안’으로 들어왔으니, 결론은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조화이니라. 위대한 화엄의 사상이여. 결국, 악마는 없다!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이 종교를 비판하는 작품이네, 종교를 옹호하는 작품이네, 설왕설래가 있는 모양이지만 둘 다 논거가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종교를 비판하려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선의 허구성을 비판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죽음에 이르기까지 희생하는 그레첸의 이미지는 오히려 성모에 가깝다. 그레첸의 구원은 자기 양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고난을 통해 성화된 결과처럼 보이는 거다. 더없이 종교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뜬금없긴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웬 기독교. 이 작품이 성찰하고자 했던 악은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의 범주에 속한 것 아니었나. 인문학의 악은 인간을 전체로서 통찰하지만 종교의 악은 이분법의 논리로 인간을 구분 짓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틀을 따온 이 작품이, 종교극도 아니면서, 성경 구절을 그렇게나 많이 인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완성되지 못한 매혹                                   
실체를 잃어버린 악은 추상에 불과하다. 상징은 많은 것을 표상하지만 추상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으니, ‘엑스’는 그야말로 변수가 돼버린다. 흰옷 입으면 천사, 검은 옷 입으면 악마.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다. 이런 단순함은 여러 영역으로 확장된다. 악마의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좋은 마음, 나쁜 선택을 하지 않을 양심만 있다면 우리는 선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 이건 둘 중 하나다. 인간을 전적으로 믿는 근본주의적 인본주의이거나 아니면 인간을 너무 모르는 데서 나오는 치명적인 오해이거나. 이런 대책 없는 선량함에 뇌쇄적인 악마 이야기는 양심의 도덕극으로 자리를 옮긴다.

악행의 그림이 전형적인 것도 이러한 추상성에 기인한 바 크다. 이 작품에서 악마의 폭력은 곧 돈과 성의 폭력인데, 그 유린의 상상력이 거칠고 성글다. 그레첸이 당하는 유린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자기암시에 가깝지만 그가 당하는 폭력의 이미지는, 유린당하는 이유조차 분명치 않은데도, 적잖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강한 이미지가 악마를 실체로 인식하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고전 속 악마의 폭력은 ‘광명의 천사’의 모습으로 찾아온 ‘죽음의 천사’가 선사하는 독약과도 같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잠식되고,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죽음의 영향력이 번져 나가는 전염병 같은 혼돈. 하지만 이 작품 속 악마의 폭력은 언뜻 이드의 욕망과 구분되지 않는다. 본능을 휘두르는 이런 악마, 정말 악마답지 않다.

이러한 추상성은 결국 자폐성으로 이어진다. 극에 아무런 단서도 주어져 있지 않건만 자기들만의 논리적 연결이 있다는 거다. 듣자 하니 마지막 둘만의 크리스마스 장면은 처음과 다른 선택을 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걸 알아챌 관객이 몇 명이나 될까! 주인공과 악마를 거울 관계로 병치하는 것이나 악마와 천사를 동일하게 설정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정도 되면 납득하기 어려워지는 거다.

표현에서 드러나는 모든 과잉의 원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직 소화되지 못한 관념을 감각으로 번역해내야 할 주체는 음악과 무대이기 때문이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데시벨을 높인 채 좀처럼 쉴 틈을 주지 않고 강하게 몰아붙이는 음악의 배치나 아이돌 쇼 프로그램을 연상시키는 많은 조명의 빈번한 운용은, 그 의도를 알겠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보고 듣기에 버겁다. 몸을 들썩이고 싶도록 감각적인 노래에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추상적인 가사가 붙은 부조화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작품을 그냥 놔두지 않는 연출가 이지나를 향한 기대감이 있다. 작품은 분명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려면 좀 더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 악마의 매력에 홀딱 넘어가고 싶지, 악마와 재미도 없는 수수께끼나 하긴 싫단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3호 2014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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