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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FACE] <블랙메리포핀스> 김성일, 무대에서 자신을 만나다 [No.120]

글 |이민선 사진 |심주호 2013-09-11 5,219

첫 질문을 던지자마자 내심 놀랐던 이유는, 다소 차갑고 거만한 인상의 그가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너무도 순진하고 의연하게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근황을 듣듯 기자가 장시간의 청중 역할을 마칠 무렵, 김성일은 긴 이야기 들어줘서 감사하다 말하곤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이 많은 이야기가 과연 다 실릴까요?”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답했지만, 당연히 다 못 싣는다. 때때로 인터뷰이와 나눈 시간을 온전히 지면에 옮길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데, 김성일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인터뷰 동안 배우가 된 계기와 목표, 재능과 연기 스타일 등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묻기보다는, ‘인간 김성일’의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린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듣는 것은, 그가 어떤 태도로 무대에 서며 어떤 배우가 되리라 알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곱상하고 도도해 보이는 얼굴이라 부족함 없이 자란 청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가 온갖 풍파를 온몸으로 부딪쳐온 사실에 놀랐다.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어린 배우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는 정도 이상의, 뭐 그리 대단한 고생을 했을까 싶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때때로 극도로 불안정했던 가정환경에서 어려서부터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에게 지워진 짐은 평범하게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또래들은 분명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냥 춤과 노래가 좋아 연예인을 꿈꿨던 그는 중학교 입학 전에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TV 드라마의 아역 배우로 처음 연기를 접했고, 예고와 예대에 진학하며 꾸준히 배우로서 소양을 다졌지만, 여유롭게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후 이어서 <쓰릴 미> 같은 화제작에 출연하며 주목받았고 이내 여러 작품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그를 뒤흔드는 외부의 사정과 내면의 고민이 극심해져 지난해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에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이들의 부름에 다시 돌아와, 연극 <모범생들>과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두 작품에 동시에 서며 그간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거친 파도에 휩쓸리듯 살았고, 파도의 결을 하나하나 느낄 정도로 예민했던 그가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데뷔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미국에 있는 친구의 추천으로 브로드웨이 캐스트 음반과 영상을 접하고선 “죽기 전에 이 작품은 꼭 하고 말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이 작품의 음악과 연출, 안무, 무대 디자인, 연기 등 모든 면에 반했다. 특히 그가 끌렸던 이유는 극 중 모리츠가 평소 자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한국 초연이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을 봤지만, 최종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2년 후 재공연이 올라갈 때, 또 다시 오디션에 도전했고 또 고배를 마셨다. 오디션 결과를 알자마자, 그는 무턱대고 제작사로 달려갔단다. “돈은 안 받아도 괜찮다, 스태프라도 좋다, 그저 이 작품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별별 무리수를 다 던졌어요.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의 패기 덕인지 2주 후에 재오디션을 볼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한센 역으로 뮤지컬 데뷔를 할 수 있었다. 좀 우악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게 그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다. 영악함이라곤 단 1%도 없이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대로 행동하고, 진심을 그대로 다 드러내 보이는 것.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여서 조심히 다뤄야할 유리 같고 실제로 그 유리에는 상처 자국투성이지만, 그런데도 그 유리는 무척 반짝여서 결코 깨지지는 않을 것 같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재오디션은 ‘에른스트’를 뽑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한센’을 맡았고, <쓰릴 미>에선 ‘나’에 지원했지만 ‘그’ 역할이 주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현빈’이 아닌 ‘재일’이 되었다. 실제 성격은 무척 여리고 섬세한데, 배우에겐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라 실제로 맡은 건 강하고 냉정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에는 착한 순둥이 역할도 맡아 보고 싶고, 재미있고 밝은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대하는 부분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사소한 욕심을 넘어서 그가 바라는 것은 “더 큰 힘을 갖는 것”이다. “관객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주실 때,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이 일로 인해 제가 소외받는 사람들, 세상 밖에 나오지 못하고 바닥 아래에 숨어 있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더라고요. 더 큰 힘을 가지면,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 더욱 이 악물고 열심히 하려고요. 도망가지 않고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요.”

 

2011년 <스프링 어웨이크닝> 한센
2012년 <쓰릴 미> 그
2013년 <블랙메리포핀스> 헤르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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