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라>의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극 중 발랄한 게이 역할을 맡은 조권의 리허설 사진을 보고 몇몇 네티즌의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솔직히 좀 촌스럽다. 여장 남자를 소재 삼은 뮤지컬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하나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여장 남자 모티프는 원래부터 놀이와 공연의 익숙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때만 해도 ‘미스 뭐뭐 선발 대회’는 캠프파이어와 더불어 엠티에서 빠지지 않는 행사였다. 물론 참가 자격은 반드시 남성일 것. 정성스런 화장과 옷차림으로 한껏 교태를 부린 남정네들의 ‘여자 되기’는 대부분 가당찮았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낭창낭창한 몸짓과 나긋나긋한 말투까지 흉내 내는 남자들도 있었으니,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이들의 퍼포먼스는 이후에도 길이길이 전설로 남았더랬다.
이런 오락의 전통은 이미 공연의 역사에서 증명되었던 바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의 배우는 역할의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 남자였고 서양 연극의 융성기인 셰익스피어 시대만 하더라도 여장 배우의 전통은 그 뿌리가 깊었다. 특히나 동양의 전통 연극에서 여장 배우의 전통은 공연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하는 고갱이였다. 가부키 여장 배우의 걸음걸이가 너무나 여성스러워서 당시 여자들이 그 배우의 걸음걸이를 따라한 것이 일본 여성들의 전형적인 몸 매무새가 됐다는 얘기나, 경극 극단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어여쁜 여장 배우의 소속 여부였기에 인기 있는 여장 배우를 확보하기 위해 단장들이 동분서주했다는 얘기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청나라 때는 여장 배우의 미모와 자태에 반해 그를 부인으로 맞이한 귀족도 있었으니, 연기 잘하면 남자도 귀부인이 될 수 있었던 거다. 놀라울 따름이다.
건장한 남자의 ‘여자 되기’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흥행 불패의 쇼다. 요즘에는 정체성이나 권력 문제 등 진지한 이야기로 주제 의식이 확장되었지만 역사적으로 통틀어 보자면 그런 관점은 오히려 오늘날 동시대에 국한될 뿐이다. 관객은 여자 옷을 입은 남자 배우의 우스꽝스러움에 폭소를 터뜨리다가도 그가 자아내는 여성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가짜임이 확연한데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배우가 발산할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일 터. 이건 흉내 내기라는 연기의 고전적 정의를 가장 잘 수행하는 배우만이 해낼 수 있는 성취일 것이다. 여장 남자 모티프는 배우의 연기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오래된 극적 장치이다. 윤리나 취향이나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도 백 프로의 오락인 거다.
‘프리실라’의 정체성
<프리실라>는 이런 전통에 서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무비컬로도 이야기하고, 당대의 히트 팝을 뮤지컬 넘버로 삼았기에 주크박스 뮤지컬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프리실라>는 단연 쇼 뮤지컬이다. 일단 무비컬은 이야기가 장르 이동의 축이 되는 데 비해, 뮤지컬 <프리실라>에서는 이야기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 이야기의 비중이 크다면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부터 시작해 관계 구축과 사건 전개까지 설명해야 할 게 많을 테지만 이 작품에서 이야기는 각 장면을 소개하는 제목 역할에 가깝다. 각 장면은 이야기로 연결된다기보다는 최소한의 이야기로 엮인 개별적인 무대에 더 가깝다. 모든 장면은 하나의 노래로 완결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무비컬보다는 주크박스 뮤지컬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주크박스에서 원곡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자면 <프리실라>는 노래의 아우라보다는 노래가 재현되는 방식에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에서 쇼에 더 가깝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반드시 그 노래여야 하지만 쇼는 그다지 상관없기 때문이다. 즐겁고 흥겹고 신 난다면 어떤 노래라도 오케이다. 듣자하니 원래 영화에는 아바의 노래가 심심찮게 흘러나오는데 뮤지컬에는 이런저런 문제로 뮤지컬 넘버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전혀 상관없다. 이 작품에서 노래가 맡아야 할 역할은 내용이 아니라 흥겨움이니까.
<프리실라>는 쇼 뮤지컬의 미덕에 충실하다. 대중을 향한 쇼는 자극적일 수는 있으되 절대 도발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되니, 드래그퀸이라는 자칫 부담스러울 소재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주제로 안전하게 착륙한다. 작품의 가벼움을 경박함과 구분 짓는 설정도 영리하다. 마초 같은 술집 여주인과 우아한 트랜스젠더를 나란히 세우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선천적 성별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질임을 꼬집기도 하고, 원주민 복장을 한 관광지 알바 청년을 통해 보이는 것만으로 진실을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심각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술집에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거나 아니면 마초들에게 폭행당할 위험에 처한다 해도 최고참 ‘언니’ 버나뎃의 말 한마디 발길질 한 번이면 모든 위기는 그걸로 끝이다. 성소수자로서 부딪히는 이런저런 갈등이 사건으로 연결되지 않고 간단한 에피소드로 끝나야 이 작품의 가벼움은 경쾌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의 사회적 갈등은 ‘프리실라 쇼’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프리실라>에서 드래그퀸의 정체성은 성소수자의 면모보다는 분장 쇼의 화려한 주인공에 맞춰져 있다. 어린 아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주인공의 대사(‘난 여러 사람으로 분장해’)는 이 작품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함축한다. 왕년의 드래그퀸 스타 버나뎃이 설파하는 립싱크의 미학도 이 작품의 맥락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 립싱크란 다른 사람의 소리에 자기 자신을 완벽히 맞추는 것이니만큼 나의 모습을 유지한 채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배우가 역할에 ‘립싱크’하는 사람이라면 남자가 여자로 변신하는 것도 다양한 역할 립싱크 중의 하나일 터. 어쩌면 이런 변신을 가능케 하는 부지기수의 화려한 의상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의 의상 바꾸기 쇼는 이런 심증에 도장을 찍는 물증이다. 드래그퀸 언니들이 마지막으로 선보이는 ‘호주 오페라 하우스’ 분장 필살기도 그렇다. ‘언니들’에 중점을 두자면 이건 어지간히 뜬금없는 설정이다. 아니, 드래그퀸에게 건물로 분장하라니 고운 언니들 모아놓고 이게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하지만 분장 쇼에 방점을 찍으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메이드 인 호주’ 쇼 라벨은 확실하게 찍은 셈이니 말이다.
흥겹고 신 나지만 아직은
<프리실라>는 쇼 뮤지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익히 봐왔던 그 멋있는 배우들이 갑자기 언니로 변신하는 모습도 놀라우려니와 쭉 뻗은 각선미에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몸매는 물론이요 콧소리 묻어나는 발성까지, 이번 참에 자기 안에 숨겨졌던 여성미를 발산하겠노라 작정한 사람들처럼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시종일관 꺼지지 않는 환한 LED조명처럼 극의 모든 장면은 익숙한 팝송과 화려한 의상이 어우러져 시끌벅적 난리법석 흥을 꺼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실라>를 완벽한 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서양의 문화 코드가 자연스레 무대에 배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사의 리듬과 느낌을 살려내지 못하는 어색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며, 쇼보다는 드라마에 가깝게 인물을 해석한 탓도 있을 거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도록 과장된 하이톤의 대사도 부담스럽지만(특히 밥 부인!) 전체적으로 만연한 이런 과장됨이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아쉽다. 배우들의 여장은 예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여성스러움은 성에 차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중심을 이뤄야 할 드래그퀸 쇼가 해맑도록 건전한(?) 바람에 처음의 기대감은 갈수록 쪼그라들더라. 호주 드래그퀸 쇼의 전통에 충실한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는 드래그퀸 쇼라기보다는 그냥 여자 옷 입고 귀엽게 춤추는 오빠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순해 보이는 안무 탓도 있을 거다. 관객들의 환호가 가장 크게 쏟아졌던 장면이 빨간 속옷을 걸친 아담이 관능적으로 등장했을 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드래그퀸이라는 소재 위에서 분장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의상과 화장에 그치지 않고 역할 자체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여장이 아니라 진짜 드래그퀸답게 보이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호영과 조권은 최고의 ‘쇼걸’이다. 쇼는 더 완벽하게 쇼다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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