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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태양왕> 보이지 않는 적과 보이지 않는 사랑 [No.128]

글 |김주연 (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2014-06-02 4,056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의 인생을 담은 <엘리자벳>, 그의 아들 루돌프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황태자 루돌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인 <마리 앙투아네트> 등 유럽 뮤지컬 중에는 유럽 왕실의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들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각의 이름 앞에 “비운의”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다는 점이다. 

눈부신 미모로 전 유럽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과 암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엘리자베트 황후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끝에 결국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루돌프 황태자, 그리고 호화롭고 사치스런 삶을 살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고귀하고 화려한 운명을 타고난 동시에 인간적인 약점으로 인해 불운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대비야말로 이들의 삶을 무대 위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놓을 수 있는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절대권력 루이의 적은 누구인가  
뮤지컬 <태양왕>의 주인공인 루이 14세의 경우, 그의 이름 앞에 “비운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당치 않다. ‘태양왕’이라는 번쩍번쩍 빛나는 칭호가 이야기하듯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태양처럼 빛나는 승리 그 자체였다.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이후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확립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중심으로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웠으며 예술적으로도 눈부신 업적을 쌓은 뒤 당시로서는 꽤 장수에 속하는 77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즉, 그의 인생에서는 ‘비극적’이라 이름 붙일 만한 사건을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어린 시절 모후의 섭정과 마자랭 재상의 간섭 속에서 미묘한 알력 관계에 놓이긴 했으나, 그것은 나이 어린 왕이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치르는 통과의례 이상으로 그를 위협하지는 않았고, 평생에 걸쳐 이런 저런 여성들과 많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위험하고 비극적인 연애는 없었으며, 더구나 절대 권력을 확립한 이후 그를 위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이러한 루이 14세의 삶을 소재로 하나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히 어려운 시도라 할 수 있다. 

권력을 극의 소재로 삼은 작품에서는 주로 권력에의 욕망과 그 영향력, 실권과 좌절 등이 드라마의 주된 갈등 축이 된다. 그런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누렸던, 그 스스로 절대권력 자체인 인물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비슷한 소재를 다룬 제라르 코르비오의 영화 <왕의 춤>의 경우에도 표면적으로는 루이 14세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극의 갈등 축을 이루는 인물은 루이 14세라는 절대권력 하에서 영욕을 번복한 예술가 륄리와 몰리에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왕권이든 이데올로기든 자본주의든 어떤 ‘절대적인’ 권력의 지배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소재가 되지만, 그 절대권력 자체를 이야기화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갈등의 축 
그래서인지 뮤지컬 <태양왕>에서 루이는 “왕이 되리라”는 노래를 통해 몇 번씩 강력한 권력에의 의지를 다짐하지만, 실제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구체적인 적이 드러나지 않다 보니 이 비장한 노래 역시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왕이 되리라”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웅장한 노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며 이를 위협하는 적들의 존재 역시 희미한 상황에서 “왕이 되리라”는 외침이 갖는 울림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섭정자인 안느 대비가 간간히 등장하긴 하나 그녀는 결코 아들을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며, 마자랭 수상의 음모 역시 ‘태양왕’의 권력에 맞서기에는 매우 미약하다. 조카딸 마리를 죽이고, 몽테스팡 부인을 이용해 루이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마자랭의 음모는 작품 전체에 걸쳐 루이와 팽팽한 대립을 이룬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입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유럽 최고의 절대군주와 신하라는 그들의 입장 자체가 일방적이고 수직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 아닌가. 

문제는 이로 인해 작품 전체에 걸쳐 대립 축을 이루고 극을 이끌어나갈 만한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결과 극중 루이의 갈등이나 위기는 어떤 드라마적인 흐름을 따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갑작스레 등장했다 곧 사라지는 에피소드적인 나열을 보여준다. 1막에서 루이가 겪는 가장 큰 위기는 전쟁 중 부상과 마리의 죽음이다. 갑작스런 출정 장면에서 루이와 기사들은 웅장하고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선보이지만, 정작 이들이 싸우는 적은 그저 ‘외국 군대’라는 막연한 대상일 뿐 어떤 구체적인 갈등 관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알 수 없는’ 적에 의해 부상을 당한 루이는 몇 달간 생사를 오가다가 얼마 뒤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갈등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니, 위기와 갈등이 극복되는 과정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사랑 
2막이 시작되고 대비의 죽음 이후 진정한 왕권을 찾은 루이에게서는 더더욱 갈등 요소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로인해 이후부터는 사랑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극을 이끌어가게 되는데, 문제는 그 사랑 역시 앞서 ‘보이지 않는 적’과 마찬가지로 그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리와의 첫사랑은 그렇다 치자. 젊은 청춘남녀가 눈이 맞아 갑자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안타깝게 헤어지는 상황 역시 이해가 간다. 하지만 몽테스팡 부인과 프랑소와즈와의 사랑은 어디서 비롯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도통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토록 마리를 못 잊던 루이가 몇 마디 유혹에 곧바로 몽테스팡 부인에게 넘어가는 것이나, 프랑소와즈를 만나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지는 상황 등은 분명 극적인 설득력을 좀 더 보여주어야 하는 장면들이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랑인 프랑소와즈와의 사랑 역시 극적인 긴장감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절대군주와 이미 극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를 사모해온 여인의 사랑 앞에 걸림돌이란 있을 수 없다. 첫 장면에서 자신은 왕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겸손해하는 프랑소와즈의 고민은 소소한 망설임일 뿐, 이 사랑을 가로막는 갈등으로는 기능할 수 없다. 어떤 걸림돌도 없이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두 연인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감미롭고 서정적이긴 하지만, 그저 아름다운 노래일 뿐 어떤 극적인 긴장감이나 간절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권력 의지를 불태우고, 보이지 않는 사랑을 노래한다는 것이 이 작품이 설득력과 힘을 잃은 가장 큰 지점으로 보인다.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도 화려한 무대와 의상도 극적 설득력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온전한 감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루이 14세의 사랑과 권력은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의 소재지만, 그 자체로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소재가 곧 흥미로운 이야기의 완성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무대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8호 2014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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