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조화된 안정된 연기와 정확하면서도 유연한 발음으로 ‘연기의 교과서’, ‘화술의 달인’으로 불리는 노배우의 명연기 덕분이었을까.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 이호재 선생을 보면서 단 한 번도 그의 나이를 가늠해본 적이 없었다. 오는 6월 1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이호재 선생의 칠순을 기념하는 공연이라는 소식이 뜻밖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1993년에 공연한 <돼지와 오토바이> 이후 이호재 선생과 꾸준한 인연을 맺고 있는 이만희 작가에게도 칠순이라는 숫자가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이호재 선생을 염두에 두고 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뜨거운 열정으로 무대를 채웠던 선배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관객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라는 이만희 작가의 진심어린 존경심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어받은 배우와 연출가, 스태프 50여 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호재 선생의 칠순 잔치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중이다. 지난 5월 15일, 이호재 선생과 이만희 작가를 만나기 위해 찾은 <그대를 속일지라도> 연습실에는 스승의 날을 맞은 배우들의 작은 축하 파티가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부르는 ‘스승의 은혜’에 마음이 뭉클해진 것은 필자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분이 작품으로 호흡을 맞춘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이만희 : <돼지와 오토바이>부터니까, 1993년이지요 선생님?
이호재 : 북촌창우극장개관기념 공연이었어. 그 전까지는 이 교수(이만희 작가는 현재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를 몰랐어. 학교 선생님이었거든. 그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를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라면서 절대 그러지 말라고, 희곡만 써서는 굶어죽는다고 말렸던 게 기억이 나네. 지금이야 대학 강의도 나가고 하지만 당시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 고정적인 월급 없이 작품만 쓴다는 건 우리 현실로 봐서는 힘들지 않겠냐고. 뭐 자신 있으니까 그만뒀겠지만.
이만희 : 하하하. 그 후로 십 년간 전업 작가를 했지요 제가. 학교 그만둘 때였다니까 1992년에 <불 좀 꺼주세요> 올려놓고 몇 달 지나서 선생님을 뵈었나 봐요.
2000년에 공연한 <불 좀 꺼주세요>를 제외하고 두 분이 함께 작업하신 작품 <돼지와 오토바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졸업>, <언덕을 넘어서 가자> 모두 이호재 선생님을 모델로 쓴 작품들로 알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작업은 칠순 생신 선물이라 더 뜻 깊을 것 같아요.
이만희 : 선생님을 보면 청바지를 입은 방장스님 같은 느낌이에요. 배우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큰 분이 별로 없잖아요. 말로는 명예, 권력, 돈 싫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선생님은 그런 표현조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고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도 싫어하시고 늘 그늘진 곳에 계셨어요. 천생 배우이시죠. 그런 인간적인 존경심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부탁하시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어요. 사실 부탁을 받고도 못 써준 분들이 참 많거든요. 배우가 어디 이호재 선생님밖에 없냐고 욕도 많이 먹어요. 이거 인터뷰 나가면 곤란한데….(모두 웃음) 어쨌든 제 생각에 선생님은 세월 가는 게 아까운 보물이세요. 문화예술 하는 사람으로서 섭섭함이 없지 않은 시대에, 헌정공연이라는데 얼마나 의미가 있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연극계에 이런 자발적인 헌정 공연이 있었나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관 단체가 아닌 연극계 동료?후배들이 앞장선 경우는 이번 공연이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만희 : 극단 컬티즌의 정혜영 대표가 고마운 게, 관 단체가 아니라 연극인들끼리 준비해서 작품을 쓰게 해준 거예요. 선생님이 제도권을 싫어하시거든요. 이번 공연은 등장인물이 특별 출연까지 더하면 서른 명이 넘어요. 거기에 스태프들까지 더하면 50명도 넘고요. 그 많은 분들이 선생님 한 분을 위해 뜻을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이런 작업에 동참하게 되서 기쁘고요.
이호재 : 이 작가의 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또 부탁한 시간까지 맞춰 작품을 써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잔치 분위기가 날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고맙고. 후배라고 하지만 다들 이 바닥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배우들이거든. 전무송이는 1962년에 연극아카데미 입학해서부터니까 벌써 50여년지기이고, 윤소정 씨도 1974년 <초분>에서 만났으니 40년이 넘었고, 권병길, 김재건 씨도 내일모레 일흔을 앞둔 사람들이야. 작은 역할의 배우들이나, 카메오로 출연하는 김철리, 최용훈, 이성열, 김광보 같은 연출가들 모두 내로라하는 사람들인데 대사 한두 마디 가지고들 출연해.
이만희 : 선생님이 전에 ‘나이 드니까 쥐어짜고 고통스러운 거 싫다, 가볍고 웃을 수 있는 작품 하나 써 달라’고 하셔서 <언덕을 넘어서 가자>를 드렸어요. 사실 이번 공연도 연극 실정이나 제작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6~7명 내외로 썼어야 했는데, 축하하는 자리인 만큼 큰 무대에서 어떤 축제 같은 작품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준비를 했어요. 연극이라는 게 어차피 공동예술이고 서로 의지해서 주거니 받거니 어우러지는 예술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임하는 작업이 산뜻하고 좋잖아요. 마음으로야 영국처럼 기사 작위 같은 거 드리면 참 좋겠지만 선생님이 싫어하실 테니까 그저 아흔여덟 살 정도 되실 때까지 타고난 건강을 지켜서 계속 공연을 하시면 좋겠어요.
선생님이라면 공연 스케줄을 편의에 맞춰 조율하시면 되잖아요. 원하는 작품만 출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한데요.
이호재 : 나는 작품을 선택할 권한이 없어. 컬티즌 평단원이라 대표가 공연해야 한다면 해야 해.(웃음) 전에는 대본도 읽어보고 상대배우가 누군지도 알아보곤 했는데 요즘은 정 대표가 추천하는 작품은 그냥 믿고 출연을 해. ‘설마 내가 못할 연기를 시키겠어’ 하며 말이야.
그래도 사극은 출연하지 않으신다면서요?
이호재 : 수염 붙이기 싫어서 안 해. TV 대하드라마를 하면 일 년을 하니까 돈을 꽤 많이 벌 수 있는데도 수염 얘기가 나오면 안 해. 내가 데뷔한 작품이 1962년 <생쥐와 인간>이었는데 덩치가 크다고 레니 스몰 역할을 맡았어. 수염을 붙여야겠는데 분장도구가 어디 있어. 수염붙이는 데 쓰는 스피치검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말로 니스라고 불렀단 말이야. 그걸 장판 붙이는데 쓰는 니스인 줄 알고 그걸 얼굴에 발랐던 거야. 또 양놈들이니까 누런 수염이 날 거다 생각하고는 생사가 없으니까 봉초담배라는 가루담배를 붙였어. 가슴에도 털이 있겠지 싶어서 가슴에도 붙였어. 그러고 공연을 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여와서 죽겠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수염이라면 말도 못 꺼내게 했어. 그래도 다행인 게 당시에 연극을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이 명동극장이랑 드라마센터밖에 없었어. 또 명동극장은 냉난방 시설이 없어서 너무 춥거나 더우면 공연을 못하고 봄, 가을 시즌에만 공연을 했어. 극단은 많지, 극장은 없지. 그래서 공연을 3일에서 길어야 5일밖에 못했어. 다행이었지.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1960년대 고교생들의 이야기가 유쾌하게 그려져 있던데요, 작품의 첫인상이 어떠셨나요?
이호재 : 책장을 넘길 때는 웃었는데 그 전에 대본 겉표지를 보고는 화가 났었어. 칠순기념공연이라고 써있는 거야. 참가하는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말자 했는데 그걸 떡하니 써놨으니 기분이 나빴지. 또 나는 내 나이를 생각하고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일흔이라고 하니까 순간 당황스러워지는 거야.
이만희 : 저도 처음에 그랬어요. 선생님처럼 청바지가 잘 어울리시는 분이 일흔이라니까 참 섭섭하더라고요. 하긴, 그러고 보니 저도 벌써 쉰일곱이에요.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아쉽던데 선생님은 얼마나 그러셨겠어요. 그래도 왜 아상(我相)이라고 하잖아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인 걸 아니까 많은 연극인들이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만약 선생님이 먼저 생일을 챙기셨다면 저부터도 안 썼을지 모르죠.
이호재 :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면서 ‘이런 역할은 다른 작품이었으면 안 했을 거다’라고들 해. 그래서 고맙긴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배우가 못할 건 또 뭔가 싶은 거야.
오랜만에 교복을 입는 기분은 어떠세요?
이호재 : 나는 학교 다닐 때 교복을 제대로 입은 적이 별로 없어. 아이스하키부 활동을 해서 교실에 거의 안 들어갔거든. 들어가면 맨날 매타작인데 뭐 하러 들어가. 학교에 갈 때, 나올 때만 교복을 입었는데, 그럴 때면 늘 싸움이 붙었어. 이 교수와 나는 휘문고 출신인데, 우리 학교 주변에 고등학교가 꽤 많았어. 각 학교마다 힘 좀 쓰는 녀석들이 다 싸움을 걸어서 교복에 대한 추억이 좋지가 않아.
극 중에서는 4대4 미팅도 하시던데요. 운동을 하셨으면 여고생들한테도 인기가 꽤 많으셨겠어요.
이호재 : 학교 근처에 여고도 또 많았어. 낮에는 창덕여고 학생들이 창문 밖으로 거울 빛반사 시켜서 표시를 하는 거야.
이만희 : 어, 우리 때도 그랬어요.
이호재 : 그게 전통이야. 그럼 해질녘 되면 우리가 또 그러면서 어느 반 여학생들이 예쁜가 살펴보곤 했어. 창덕여고 학생들이 빵떡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거 뺏어서 튀는 일도 많았지.
이만희 : 저는 산악반이었는데 그때 딱 한 번, 극 중 사천왕처럼 4대4 미팅을 비원에서 했었어요. 그때 제 파트너가 윤영실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패션모델이었어요. 1980년대 중반에 의문의 실종을 당한…. 그 언니가 영화배우 오수미 씨였죠. 사실 그때는 잘 몰랐어요. 교복 입을 때였으니까. 나중에 제가 절에서 지내던 시절에 장을 봐온 두부를 싼 선데이 서울에서 익숙한 얼굴을 본 거예요. 바로 패션모델이 된 윤영실이었어요. 이 글을 쓸 때는 그때 그 기억들이 굉장히 선명했어요.
작가님의 실제 경험에 이호재 선생님의 성격이 덧입혀진 작품이 된 건가요? 그럼 혹시 480등 얘기도?
이만희 : 하하. 그것도 제 얘기예요. 제가 그렇게 공부를 못했거든요.
이호재 : 나도 그랬어. 수업을 들어갔어야 공부를 하지.
이만희 : 제가 진짜로 예비고사 떨어지는 애들만 들어가는 지진아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받고 기적적으로 대학에 붙었어요. 극 중에 이호재 선생님이 담임선생님한테 얻어맞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거 쓰면서 어떤 배우가 할지는 몰라도 되게 행운아겠다 생각했어요. 욕심내는 배우가 꽤 많았을 것 같고요.
이호재 : 아마 권해효가 할 거야. 이대연이가 왕선생이고.
특정 배우를 놓고 작품을 쓰면 그 배우의 특정한 면을 담으려고 노력하게 될 텐데요, 이번 작품에는 이호재 선생님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만희 : 선생님 하면 제가 생각하는 어떤 상이 있잖아요. 저는 선생님한테서 대인의 풍모를 많이 느껴요. 제가 어렸을 때, 글을 쓰기 전부터 선생님 공연을 몇 편 봤고 작품으로 만난 지도 꽤 됐는데, 글을 쓰다보면 거인, 자이언트 같은 느낌의 캐릭터가 먼저 생각이 나요. 실력이 없는 자들은 뭐 하려고 애쓰고 실력 있는 자들은 단순하려고 애쓴다는데 선생님은 참 심플하시거든요. 이진백의 캐릭터에 그런 모습이 있어요. 역으로 쫀쫀한 역을 쓸 때면 혼자서 킥킥대면서 쓰곤 하는데 <언덕을 넘어서 가자> 때 많이 웃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안에서도 거인의 모습이 없지는 않았죠. 선생님은 연애나 낭만, 시인의 느낌이나 섬세함, 혹은 디테일한 것들을 하고는 싶은데 창피하고 안 써본 근육이라 무뚝뚝한 그런 느낌이세요. 비록 자주 만나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인 제가 선생님께 해드릴 수 있는 선물이 글 말고 뭐가 있겠어요. 저는 그게 여러 번의 술 좌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영화 작업은 같이 하신 적 없으세요?
이만희 : 제가 시나리오도 쓰지만 선생님을 떠올리면 대륙적 기질을 먼저 받아요. 영화 제작사 쪽에서 선생님 캐스팅 얘기가 나와도 제가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시기에는 부족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얘기밖에 할 수 없어요. 경제적인 여건만 되면 연극만 계속 하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제자가 저한테 희곡 쓸 때가 좋다고 ‘영화로 돈 좀 버셨으면 희곡만 쓰시죠’ 하는데 딱 그 느낌이 아닌가 싶어요.
이호재 : 이 교수는 나를 좋게 얘기하지만 난 다른 분야는 못해. 맞지를 않아. 영화나 TV는 안 맞는데 연극만 하고서는 먹고 사는 게 문제가 되니까 생각한 게 라디오였어. 연극배우는 희소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라디오는 얼굴은 안 보이고 말은 잊지 않고 계속 할 수 있고 당연히 연극도 할 수 있더라고. 88년 아시안 게임 할 때서부터 방송을 시작해서 IMF 때 그만뒀어. 예산을 줄이자고 작가를 자르겠다는데 그러면 내가 방송에 얽매이게 될 것 같아서 내가 그만뒀어. 그만두고 다시 경제적인 걱정이 생길 때 즈음에 <부부클리닉> 고정이 들어갔어. 촬영도 짧고 나오는 분량도 적어서 좋았는데 작년 4월에 없어졌지. 지금도 연극을 하면서 또 다른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 생각 중이야. 한번은 어느 극단 대표가 신입단원들 모아놨다고 격려해달라고 해서 가서는 당장 일어나서 집에 가라고 했어. 연극 하면 굶어죽는다고. 나야 이미 시작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난 어떤 학교에서 한 마디 해달라고 해도 안 가고 연극배우 결혼식에도 절대 안 가. 고생길이 훤한데 어떻게 가. 저 혼자 사는 것도 힘든데 가족까지 데리고 어떻게 하자는 거야. 결혼하지 말아야지.
이만희 :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셔도 후배 연극인들은 선생님이 그렇게 꿋꿋하게 무대를 지켜온 것이 존경스러울 거예요.
연습 혹은 공연 중에 후배들에게 훈수를 두기보다는 ‘너도 배우고 나도 배우인데 무슨 충고를 하냐’며 함께 고민을 나누신다는 얘기를 건네 들었습니다.
이호재 : 배우고 안 배우고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야. 선배라고 해서 분명히 잘하는 것만은 아니거든. 선배나 후배나 잘하는 게 있고 또 못하는 게 있는데 그걸 누가 어떻게 가르쳐. 나이 많이 먹었다고 다 잘하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라는 게 남이 못하는 건 잘 찾아내도 잘하는 건 잘 못 봐. 선배라면 못하는 후배 구박하기보다는 잘하는 면을 키워서 용기를 줘야지. 근데 얘기를 하다보면 못하는 걸 얘기하게 되니까 아예 안 해야 해.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시면서 상당히 많은 연출가들을 경험하셨는데 이번 공연의 안경모 연출은 상당히 젊은 편입니다. 젊은 연출가들과의 작업은 즐거우신가요?
이호재 :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얘기가 있어. 배우가 변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젊은 연출가와 작업을 하는 거야. 연출가와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그건 나이 때문이거든. 나는 연출가들을 많이 따라가 보려고 노력해. 그래야 연기자의 생명이 길다고 생각하거든. 자기 것만 고집하다 보면 오히려 조화가 안 되는 경우가 있어. 만약에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나이 많은 코치나 감독을 만났다면 세계 무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을지 몰라. 근데 요즘 젊은이들은 겁 없이 도전했잖아. 연극도 가능할 것이라 믿어.
이만희 : 선생님을 뵈면 참 희한한 게 있어요. 선생님이 참 고집불통일 것 같고 이런 얘기도 잘 안하시는데 보면 굉장히 말랑말랑하시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으세요. 제가 성공하신 분들 많이 뵙게 되는데, 굉장히 고집불통이고 가르치려 하는 분들도 꽤 많거든요. 근데 선생님은 보면 묵묵히 혼자서 반성하시고 배우시고 그런 거 같아요. 이번 연출가 같은 경우도 제가 추천을 했는데. 너무 어려서 어떤 반응이실까 궁금했는데 젊으니까 너무 좋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늘 깨어 있으시고 변화를 모색하는 모습이 있어요. 전혀 안 그러실 것 같은데.
이호재 : 고집불통인 건 있어. 소주. 그래도 요즘은 많이 먹진 않아. 많아야 2병? 문제는 그걸 매일 마신다는 거지. 작년 여름쯤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거의 매일 마시고 있으니까.
이만희 : 그때부터 계속 연습이나 공연을 쉬지 않고 하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래도 제가 선생님 입장이라면 후회 없을 것 같아요. 원 없이 많은 무대에 서셨잖아요. 우리나라가 연극을 후하게 쳐주는 곳이 아니니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다시 한 번 서보고 싶은 무대는 없으세요?
이호재 : (단호하게) 없어. 왜냐면 <페르귄트>나, <스까펭의 간계> 오태석 씨가 번안한 <쇠뚝이 놀이>는 이제 못해. 체력이 떨어져서 제대로 못할 바에야 아예 생각을 안 하는 게 나아. 그건 욕심이야. 작년 10월이었나? <뱃사람> 하려고 수염을 한번 길러봤는데 너무 놀랐어. 내가 이렇게 늙었나 싶어서. 그동안은 나이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 안 했어. 나이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이를 먹으면 한두 군데 고장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나이가 일흔이라니까 당황스러운 거야. 환갑 때는 우리 마누라하고 같이 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생일상도 안 차렸는데 말이야. 일흔이 되니까 이제 내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은 거야. 조금씩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고. 근데 연극배우가 정리할 게 뭐가 있겠어. 작품이나 계속 해야지. 컬티즌이 존속하는 한 일 년에 한 작품씩은 할 수 있을 테고, 오태석 씨하고도 신작일 경우에는 같이 하자고 약속한 게 있으니 운이 좋으면 당분간은 꾸준히 무대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자, 이제 그만 연습실로 들어가지?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1호 2010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