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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제12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 별이 쏟아지는 정동진에서 [No.84]

글 |이유진 (자유기고가) 사진 |이유진 (자유기고가) 2010-09-02 4,846

“정동진에 가면 뭐랄까…,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에요.”
뭐, 사랑? 낯간지러운 멘트에 ‘픽’하고 웃어버리려다 그 진지한 표정에 반해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뭔가 단호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남자의 표정에 당장이라도 정동진으로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동진 독립영화제(이하 ‘JIFF’)에 가면 나도 영화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실제로 정동진으로 떠나기까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정동진에 가지 않아서일까? 지난 몇 년간 영화와 사랑에 빠지기는커녕 영화와 지지고 볶고 싸우느라 제대로 지쳐버렸다. 난 정말 영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영화가 짐스러워졌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문득, 오래 전 어느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그 남자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리고 다짐했다. 올해는 무조건 정동진에 가겠다고 말이다.


올해로 벌써 12회째인 JIFF를 처음 찾는다는 게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몇 번은 놀다 간 동네처럼 친근했다. 아마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영화인들의 JIFF 예찬론 덕분일 거다. 저 멀리 푸르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지만 관심은 온통 정동진 독립영화제뿐. 땀을 흘리며 매년 보금자리를 후원하는 정동진 초등학교로 향했다. 상영 준비를 하고 있는 스태프들은 여느 영화제와는 달리 분주한 모습 하나 없이 여유가 넘쳐흘렀다. 치밀하게 시간표를 짜고 치열하게 줄 서서 티켓 구할 필요 없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의자에 그냥 가서 앉으면 그만인 영화제. 아, JIFF의 여유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운동장 한편에 널부러져 기막힌 날씨를 벗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 영화제의 분위기에 취하고 있으니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영화제 시작,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JIFF의 명물 ‘모기 퇴치 쑥불’의 연기가 운동장을 뒤덮으며 상영이 시작되었다. 알찬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자자한 JIFF의 안목을 과시하듯, 올해 상영작들은 이미 인디포럼, 미장센단편영화제,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검증된 화제작들이었다. 단편영화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넘실거린다. 깜짝 놀랄 만한 천재성이 등장하기도 하고, 재기발랄한 센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눈을 뗄 수 없는 열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JIFF의 날카로운 안목을 통해 선발된 상영작들 모두 이러한 에너지가 넘실거렸다. 청년 실업의 심란한 풍경을 위트 있게 그린 <런던 유학생 리차드>와 유쾌한 액션을 위트 있게 표현한 <아이스크림>이나 상식의 허를 찌르는 실험적인 영상을 담은 <테이크 플레이스> 등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작품들이었다. JIFF의 특별한 관객상 ‘땡그랑 동전상’의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고민하면서 미리 준비해 간 동전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슬슬 JIFF에 취해갈 무렵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하늘을 가리켰고,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라는 JIFF의 슬로건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있고 그 아래 마법처럼 영화가 펼쳐진다. 저 멀리서 정동진 기차 소리가 들려오고 바다 내음을 실은 바람이 불어온다. 너무 낭만적이어서 비현실적이라고? 맞다. JIFF의 매력은 바로 그 ‘비현실성’에 있다. JIFF와 혼연일체 되고 나니 그제야 오래 전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얼굴은 그러니까, JIFF의 비현실성을 체험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굉장히 낭만적인 표정이었던 것이다. JIFF에 오면 ‘영화와 사랑에 빠질 것 같다’는 낯간지러운 멘트도 굉장히 로맨틱하게만 느껴진다. JIFF에는 그런 낭만이 펄떡거린다. 그 낭만 덕분에 아마도 나는 내년에도 JIFF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엔 꼭 개인 모기장에 돗자리, 강력 모기약, 옥수수와 뻥튀기 과자, 영화제 기념품까지 증정하는 ‘특별한 로열석’에 도전하리라. 그런데, 정동진에 가면 영화와 사랑에 빠질 것 같다던 그 남자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영화감독이 되겠다던 그 꿈은 이뤘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4호 2010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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