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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스칼렛 핌퍼넬> 박건형, 진짜를 향하는 남자 [No.118]

글 |배경희 사진 |김현성 2013-07-11 5,101

박건형이 히어로물 <스칼렛 핌퍼넬> 캐스팅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때, 의아해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박건형은 또 다른 도전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위해 변신하는 남자를 연기하기 전,
화려하고 엉뚱한 모습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스타일리스트  | 정주연   헤어·메이크업  | 염명희, 오희진(순수)
의상협찬  | 카루소 장광효, 킹크로치, 슈즈 바이 런칭엠, 카오리

    

우리의 외침이 희망을 줄 수 있길

<스칼렛 핌퍼넬>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 이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사실 <스칼렛 핌퍼넬>은 좀 뻔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박건형이 한다고 했을 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이니까. 사람들도 당연히 내가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작으로 <조로>를 했던 영향도 있을 거다. 그런데 대본을 보니 생각과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히어로물이 아니더라. 퍼시 역시 강하고 멋진 영웅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예전에 ‘정의는 반드시 살아있다’는 대사 한 줄 때문에 <삼총사>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스칼렛 핌퍼넬>에도 마음을 끄는 대사가 있나?
‘악이 번성하기 위해선 착하고 좋은 사람들의 침묵이 필요하다’는 대사. 극 중 선한 사람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불의와 맞서 싸우기로 하면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긴다. 요즘 우리 세상도 좀 힘들지 않나. 사실은 그래서 이 작품을 한 거다. 우리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난 영웅 심리가 좀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따뜻해지고,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이 박건형이 곧 퍼시라고 하지 않았나. 관대하고 넓은 영혼을 지닌 똑똑한 사람이라고. 정말 최고의 칭찬 아닌가? (웃음)
(정색하며) 그게 왜 칭찬이지? 내가 그런 사람이라니까. 사실을 말한 건데 그게 무슨 칭찬인가. (한참 사이를 두고) 상대를 진지하게 보다가, 슬쩍 웃기고, 나는 웃지 않는다. 이게 요즘 내가 퍼시를 위해 연습하는 거다. (웃음) 우리 팀 사람들이 다들 그런다. 그냥 너대로 자연스럽게 하라고. 난 그 말이 더 어렵다. 내가 평소에 어떻다는 거지? 내가 가진 여러 면 중 어떤 모습을 말하는 거지? 괜히 생각만 더 많아진다.


그럼 반대로 퍼시의 행동 중에서 무엇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나?
밖에서 부인이 스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왜 상대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 혼자 고민할까. 그게 이해가 안 됐다. 나라면 바로 물어봤을 거다. “스파이 맞아?” (전원 웃음) 사실이 어떻든 간에 상대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한다.


작품 속 사건은 마그리트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고 하면서 생기는데, 이 문제는 어떤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면 상대의 과거는 신경 안 쓴다. 내가 그 사람을 몰랐을 때의 일이니까. 나와 상관없는 과거를 알게 됐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지금의 그 사람이 달라지나? 달라지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그걸로 마음이 변하는 건 좀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습은 얼마나 진행됐나? 뭐가 가장 박건형을 괴롭히고 있나?
퍼시와 마그리트 관계에 대한 고민.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걸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대본에는 6주 동안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설명만 있지, 자세한 이야기는 안 나온다. 그 6주를 상상하는 것부터, 사랑하는 여자가 스파이라는 걸 알고 변하는 내 모습, 그 세세한 이야기를 찾는 중이다. 내가 이해해야 관객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작품은 가벼워질 수 있고, 또 반대로 무거워질 수도 있다.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게 퍼시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게 제일 어렵다.


캐릭터에 대해 연출가와 의견을 많이 나누는 편인가?
그렇다. 우리 작품에 무술이 나온다. 근데 그게 전문 무술인처럼 현란한 무술을 하는 게 아니라 아기자기한 액션에 가깝다. 우리 작품이 그런 톤인 거다. 그래서 스칼렛 핌퍼넬이 악당을 처치할 때 사람을 죽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칼로 베고 이런 거 말고, 그냥 기절을 시킨다든가 잡아 묶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제압만 하는 걸로 보여주자고 했다.

 

                               

 

 

나를 이끄는 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

출연작 중에 유독 시대극이 많다. 박건형이 시대극을 좋아하는 건가, 시대극이 박건형을 좋아하는 걸까?
옛날 시대 작품을 하면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이라 재밌다. 나도 주위 관계자들에게 <조로>나 <스칼렛 핌퍼넬> 같은 작품의 배우로 나를 떠올리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 허우대가 뮤지컬 배우들 중에서 제일 서구적이어서 그렇다더라. (웃음) 외국 남자 이미지가 있다고. (잠시 사이) 박건형은 라이선스 대극장 뮤지컬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좀 억울하다.


그런 오해가 있나? 그럼 제작사에서 창작뮤지컬은 으레 안 할 거라고 생각하고 제의도 안 하는 건 아닌가?
술자리에서 가끔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건형 씨한테는 같이하자는 이야기도 못 꺼내겠다고. 그럼 난 성격상 “그건 당신의 의지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그런다. 진심으로 내가 그 작품을 하길 원했다면, 어떻게든 대본을 주지 않았을까? 지나고 나서 아쉬운 소리하는 건 별로 납득이 안 된다. 어쨌든 난 라이선스 작품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대극장 뮤지컬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창작뮤지컬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문광부에 뮤지컬 예산 신청할 때도 같이 갔다. 협회 사람들하고 같이 가서 뮤지컬은 부가가치가 큰 산업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투자해야 한다고 그랬다. 근데 예산은 잘 안 됐지만.(웃음)


박건형이 라이선스 뮤지컬만 고집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다만 어떤 계산을 하고 작품을 고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끝난 뒤 <조로>를 하고, 그 다음 다시 <헤드윅>에서 <스칼렛 핌퍼넬>으로 이어지는 작품 선택을 보면,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음…. 치밀하게 계산하고 작품을 고르는 건 아니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한다. 굳이 말하면, 내 자신을 자극하는 작품에 마음이 간다. <모차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다 말렸다. 네가 하면 모차르트가 주교를 때려죽일 것 같다고. (전원 웃음) <헤드윅>도 98퍼센트가 반대했다. 안 어울리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근데 난 그럴 때 더 자극을 받는다. ‘넌 안 돼’라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심장이 뛴다. 종종 무모하다는 이야기도 듣는데, 무모하게 부딪쳐 보는 걸 좋아한다. 물론 나도 걱정은 된다. 하지만 도전하는 순간의 흥분이 두려움을 이긴다.


박건형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는 건, 관객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한테 거친 남자의 이미지가 있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선호한다는 것도 안다.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모습들이 부각되다보니, 언제부턴가 섬세한 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됐다. 나도 어떤 면에선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인데, 대중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아까 말했듯이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하는 거다. 


도전 의식을 떠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헤드윅>의 무엇에 그렇게 끌렸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서 했다. 그 작품 할 즈음엔 요즘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연애하다가 싫증나면 그냥 끝. 세상엔 남잔 많고, 여자도 많은데, 나를 희생하면서 사랑을 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헤드윅>은 그냥….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트랜스젠더 ‘헤드윅’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자기가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느끼니까. <헤드윅>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나도 위로받고 싶었고.

 

                              

 


나이를 먹으면서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다  
박건형을 둘러싼 오해 중 하나는 너무 팍팍하게 산다는 게 아닐까?
충분한 연습이 되지 않으면 무대 위에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사고가 안 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맞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통스러워야 관객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우린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니까 기꺼이 그 고통을 즐겨야 한다. 행복한 고통인 거지. 이런 생각은 신인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신인 때는 정말 열심히 했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할 땐, 아침 여덟시에 연습실에 도착해서 새벽 두 시에 집에 갔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면서 몇 시간씩 춤췄다고 하면, 사람들은 멋있게 생각한다. 전혀. 그건 정말 토 나오는 일이다. 근데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빡센 사람이 된 거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연습해야 뭔가 한 것 같았고, 그래야만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젠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지점이 달라진다. 요즘에는 무게중심을 잘 잡고 있는 게 좋다.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적절한 게 좋다. 


문득 궁금한데 신인 시절의 박건형은 어떤 후배였나?

선배들이 날 많이 예뻐했다. 왜냐하면 난 걸어 다니지 않고 날아다녔으니까. 선배가 뭔가를 찾을 때 “그거…” 하는 순간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거’라고만 했는데, ‘그걸’ 가지고 온다. 진짜 최고의 막내 아닌가. 


그렇게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후배들이 힘들겠다. (웃음)
어렸을 땐 동료나 후배들에게 내 기준을 강요했던 것 같다. 옛날엔 이런 말을 쉽게 했다. “너 왜 이렇게 열심히 안 하니?” “저 진짜 열심히 하는데요.” “아니, 넌 별로 열심히 안 해.” 상대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아니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돌이켜보니까 그 친구는 자기 인생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한마디가 저 친구의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점점 뭔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툭 던지는 한마디가 참 괜찮은 선배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스스로 굉장히 고민을 해야 하겠지.


공연하는 게 왜 그렇게 좋나?
나는 연습실에서 뒹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이쪽에선 음악 연습하고, 저쪽에선 안무 연습하고. 지금 이 순간은 각자 다른 이유로 땀 흘리고 있지만,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한 작품 안에서 다들 씩씩거리고 있구나 하고 느껴질 때,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내가 행복해서 하는 일로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는 것,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번 작품에서 바라는 것도 그거 하나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행복을 무대까지 가지고 가서,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잘 전달했으면 좋겠다. 


박견형은 언제나 파이팅이 넘쳐서 과연 방전이 될 때가 있을까 싶다. 당신이 지칠 땐 언젠가?
늦은 밤 집에 와서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가방을 바닥에 철퍼덕 내려놓을 때. 땀에 젖은 연습복을 세탁기에 집어넣을 때. ‘아씨, 오늘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힘들지?’ 하는 생각이 들면 힘이 빠진다. 근데 금방 다시 힘을 낸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힘을 내려고 한다. ‘우린 눈에 보이는 지우개 만드는 공장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오늘 뭘 했는지 당연히 알 수가 없지. 뭔가 잘되고 있을 거야.’ 그렇게 빨리 마음을 다잡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8호 2013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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