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잊지 않고 다시 돌아온 지창욱.
그는 한동안 <그날들>의 무영으로 울고 웃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은 이제
무대 위의 선명한 지표가 되어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 변화가 지창욱의 도전을 북돋아 준 것일까?
쉴 틈 없이 연이어 무대 활동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변치 않을 굳건함이 느껴진다.
<잭 더 리퍼>의 다니엘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형제는 용감했다>의 주봉으로 변신할
지창욱의 오늘을 들여다보았다.
<그날들>이란 작품이 배우 지창욱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그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뮤지컬을 다시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고마운 작품이죠. 올해 초부터 연습을 시작했는데, 사실 그 과정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무영이라는 역할을 만들어 가는 것, 노래를 소화하는 것,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려웠죠. 무대 작업을 오랜만에 하다 보니 어색하기도 하고, 대극장 무대에 처음 서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컸고요. 술 마시면서 장유정 연출님을 부둥켜안고 운 적도 있었죠. 다신 뮤지컬 못하겠구나 이런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런 시간들이 제가 무대 위에 서는 데 큰 힘을 주고 있어요. 나도 할 수 있구나! 무대에서의 자신감을 얻게 된 거죠.
무영 역으로 더 뮤지컬 어워즈 남우신인상을 받았어요. 그때 미처 수상 소감도 준비 못했다고 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못 다한 소감을 들려주세요.
설마 내가 받을까? 생각도 못했던 상이었어요. 멋있게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말도 제대로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꼭 해야 할 말은 했어요. <그날들> 팀에게 감사하다는 거요. 정말 이게 다예요.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그냥 다 고마워요. 앞으로 무대 위에서 창피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지창욱의 무영은 ‘그날들’의 가사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꺼내 보고 있는 듯 참 아련해요. 캐릭터에 어떤 정서를 담고 싶었나요?
사랑이요. 무영이는 정학이를 정말 사랑하고, 또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잖아요. 극 중에서 표현은 안 되지만, 사실 무영이는 가족도 없고 남모르는 아픔을 지닌 인물이거든요. 그런 친구가 정말 자기가 지켜주고 싶은 사랑을 만났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사랑에 중점을 두었어요. 무영은 죽은 뒤 정학을 다시 마주해도 ‘너를 못 봐서 너무 슬퍼’가 아니라 ‘그래, 다 지나갔어’ 라는 느낌으로 친구를 가볍게 대하잖아요. 이게 정말 무영다운 것 같아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어 행복한 사람인 거죠.
무영은 비극적인 인물인데, ‘나의 노래’ 등의 장면에서 보이는 밝음과 순수함이 돋보여요. 배우로서도 이 장면을 굉장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나의 노래’ 때 정말 즐거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기도 하고요. 앙상블과 스태프 형님들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했어요. 나는 이 장면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심지어 바지까지 벗을 수 있을 것 같다고요.(웃음) 그 정도로 재밌거든요. 그 때만큼은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신나게 놀아요.
<잭 더 리퍼>의 다니엘은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캐릭터라 기대가 크다고 하셨어요. 인물의 어떤 매력에 끌리셨나요?
다니엘이란 역할 자체가 매력적이에요. <잭 더 리퍼>가 살인마 이야기지만, 다니엘 입장에서 보면 사랑 이야기거든요.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변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더 끌려요. 다니엘은 단지 정신 이상자라기보다는 사랑을 따라가는 자인 것 같아요.
다니엘은 수많은 스타들이 거쳐 간 역할이기도 한데, 거기에 따른 부담감은 없나요?
부담되죠. 안재욱, 엄기준 등 많은 선배님들이 다니엘로 호평을 받았으니깐. 그래도 저만의 다니엘을 잘 표현하면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다니엘을 표현하는 것이 제 목표에요. 다니엘이 글로리아를 사랑하는 마음만 확실하게 보인다면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지 않을까요.
무영이나 다니엘 모두 사랑 때문에 인생의 전부를 거는 역할이에요. 이런 사랑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관객들이 더 많이 울고 감동을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현실에서 당연한 사랑이라면 거기서 감동이 올까요? 현실에서 정말 불가능할 수도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극으로서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형제는 용감했다>로 일본 아뮤즈 뮤지컬 시어터 무대에도 오르는데, 출연을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먼저 아뮤즈 쪽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마침 <잭 더 리퍼>에 출연할 계획을 세우던 참이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죠. 두 작품을 같이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장유정 연출님도 권유를 하시더라고요. 연출님은 저한테 엄마거든요. 그래서 제가 처한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죠. 지금 <잭 더 리퍼>를 연습하고 있는 상황인데, 제가 과연 <형제는 용감했다>를 함께 소화할 수 있을지 연출님께 되물었어요. “당연하지, 넌 할 수 있어.” 그 말로 제 마음을 움직이셨죠.(웃음)
뮤지컬로 일본 관객들을 만난다는 것은 처음이라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네요.
재밌는 작품이니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일본 관객들에게 한국 창작뮤지컬을 소개하는 자리잖아요. 내가 진짜 더 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돼요. 괜히 제가 못하면 한국 창작뮤지컬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지잖아요.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공연하는 느낌은 비슷해요. 결국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저니깐, 똑같이 책임감을 가져야죠.
처음 뮤지컬 무대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2007년 뮤지컬 창작집단 불과 얼음이 주최한 제1회 단막극 페스티벌이 첫 무대였죠?
처음엔 그냥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연극영화과로 들어갔어요. 연기가 노는 건 줄 알았거든요. 막상 대학에 가서 연기가 뭔지 알게 되니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렇게 점점 연기에 대해 알아가고 있던 스무 살 때 대학로에서 오디션을 보고 단막극 페스티벌에 출연하게 됐어요, 20분짜리 단막 뮤지컬 세 편을 선보이는 자리였죠. 알과핵 소극장에서 일주일 정도 공연을 했는데, 그땐 정말 철부지였거든요. 멋도 모르고 무대에 올랐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되겠지. 저렇게 하면 되겠지. 그러다 연출님께 엄청 혼이 났죠.
이후 2010년 <쓰릴 미>에 출연했고, 그땐 “무대 위에 서면 정말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확실히 무대는 다른 매체 연기와는 달라요. TV나 영화는 장면을 하나하나 다 끊어서 가잖아요. 순간 집중해서 찍고 빠지는 식이죠. 무대는 그렇지 않아요. 계속 찾고 고민해야 돼요. 그런 지점들이 재밌어요. 한 역할을 몇 개월 동안 계속 찾아가는 것. 이 작품 속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들이 고통스럽지만 즐거워요. 또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 좋아요. 다른 배우들과 함께 달리면서, 관객들의 웃음과 울음 그리고 박수 소리를 듣는 하나하나가 재미죠.
시간이 흐를수록 뮤지컬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꿈이었어요. 뮤지컬이 정말 하고 싶었거든요.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무대 위에서 좋은 배우이고 싶어요. <쓰릴 미> 때 같이 연습했던 형들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재범이 형, 무열이 형, 재웅이 형 등을 보면서 ‘나도 그들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언젠가 나도 선배들처럼 정말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지. 그런 생각들이 제 가슴에 아직도 남아있어요.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일까요?
아직 많이 고민돼요.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거기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고, 선배들을 보면서 열심히 배우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은 배우가 아닐까요?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으면 그 배우 역시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8호 2013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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