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처음 국내 무대에 올랐던 장 크로스토프 마이요의 현대적인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이고 줄리엣이었던 세 사람, 김용걸과 김주원, 김지영은 국립발레단이 자랑스러워하는 스타였다. 그 후 11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서 있는 자리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여전히 빛나는 세 사람의 댄서 옆에 그들을 보면서 꿈을 키웠던 새로운 별이 합류했다. 오랜 파트너 김용걸과 김지영,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는 김주원과 이동훈. 아름다운 두 쌍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자리에 앉아 자신들이 깊이 사랑하는 마이요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000년 공연 때는 현역 무용수였지만 지금은 무용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용걸 씨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김용걸 학교가 바로 근처라 항상 옆에 있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이 작품을 하겠지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러워요. 좋은 작품으로 옛날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그 점에서는 감회가 새롭죠. 2000년 초연 때도 (김)지영이와 파트너였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른 걸 모르겠어요. 다만 두 번 다 로미오와 신부 역을 모두 맡았는데, 초연 때는 로미오가 편하고 신부가 부담스러웠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로미오 역이 좀… 그러네요. 2000년에는 제가 27살이었으니까 그 역에 맞는 나이였죠. 지금은 심적으로 더 몰입하기 쉬운 건 신부 쪽이에요. 나이도 있고 경험이 쌓였으니까요.
김주원 이번에 저도 줄리엣과 마담 캐퓰릿 역 두가지를 해요. 줄리엣의 감정을 알고 마담 캐퓰릿을 연기하니까 더 깊은 모성애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담 캐퓰릿의 느낌을 알고 줄리엣 역으로 춤을 추니까 흐름이나 동선에 대해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서 다른 댄서들과 호흡하는 게 더 편안하고요. 사실 마이요가 원하는 줄리엣은 기존에 알고 계시는 순진한 10대 소녀가 아니라 강한 ‘여성’이에요. 그러니까 11년 전에 어린 제가 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작품에 맞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영 11년 전에 했던 걸 생각해보면 참 멋모르고 용감하게 했던 것 같아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웃음) 지금은 제가 그때보다 알게 된 것들이 있으니까 오히려 조심스러워졌어요.
이동훈 선배님들이 11년 만에 다시 하시니까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저한테 다 말씀을 해주시니까 저는 그렇게 배우는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리고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가르쳐주는 것만 하고 공연을 많이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을 처음 들어봤어요. 그 음악을 들으면 정말로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고 슬퍼지고 집중이 돼요. 무섭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하고 미친 듯이 뭔가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은 제가 어린 것 같아요.
김용걸 이게 한국 발레교육의 현실이에요. 저도 발레단 입단 후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본 작품들이 많거든요. 그렇지만 동훈이는 보통 무용수가 아니에요. 이번 공연을 보시는 분들은 정말 좋을 거예요. 저도 기대하고 있고요. 저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는 친구고, 조금만 지나면 곧 완성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김주원 그런데 연습실에서 용걸 오빠를 보고 있으면 진짜 멋있어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어린 무용수들과는 무게감부터가 달라요.
이동훈 보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느낌이 전해져요. 예를 들어 이 장면은 이런 내용이니까 이런 느낌이겠지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항상 뭔가 다른 게 더 들어가 있으니까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김용걸 안무는 똑같아요. 표현하는 방식이나 중요한 포인트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데서 차이가 생기죠. 제가 어떤 포인트를 더 강하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뭔가를 더한 걸 동훈이가 보면 그렇게 느끼는 거죠. 그런데 저도 두 사람이 하는 걸 보면 똑같이 그런 생각을 해요. 저 포인트를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서로 다 보고 있죠. 그걸 일일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보면서 참 좋구나 생각을 해요.
이번 공연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서울시향의 정명훈 예술감독이 지휘하죠. 춤추는 분들도 신날 것 같은데요.
김용걸 솔직히 반반이죠, 걱정 반 기대 반. 사실 저한테는 거장이 어떤 깊이를 가지고 연주를 하느냐보다 템포가 더 중요하거든요. 음악적으로 정말 탁월하신 분들과 작업을 하는 게 언제나 기대만큼 좋은 결과만 나오는 건 아닌데, 제가 바라는 건 그렇게 큰 건 아니에요. 우리가 항상 연습할 때와 같은 템포로 춤을 출 수 있게 맞춰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김지영 저는 좋은 연주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광복절에 정명훈 선생님과 함께 시청 앞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선생님이 무대에 선 저희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지휘를 하셔야 했는데 리허설도 한 번밖에 못했어요. 짤막한 <로미오와 줄리엣> 파드되였는데 당연히 음악은 템포가 안 맞았죠. 그런데 느리고 빠른 걸 떠나서 그 음악 안에서 내가 편안하게 몸을 맡길 수가 있었어요. 마치 물 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처럼요. 물론 너무 느리긴 했어요.(웃음) 그렇지만 제가 많은 지휘자를 겪어봤는데요. 못하는 지휘자의 문제는 빠르거나 느린 게 아니에요. 연주도 이야기를 할 때처럼 숨을 쉬어야 할 곳이 있는데 그 지점을 흐지부지하게 뭉개버려요. 좋은 지휘자는 우리가 말할 때 끊어야 할 지점을 알아서 의미가 통하게 하는 것처럼 숨 쉴 곳이 있는 연주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기대를 하고 있어요.
김용걸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도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네요. 마에스트로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면서 아, 이래서 거장이구나 하게 되면 기쁘게 무릎을 꿇을 준비를 해야죠.(웃음)
여러 가지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마이요의 작품은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요.
김주원 춤 자체가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서로를 바라본다거나 터치를 하는 감정 표현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에요. 보통 발레처럼 약속된 마임으로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사람을 만지고 키스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워요. 또 마이요는 이 작품을 영화처럼 만들고 싶어서 무용수들이 객석의 관객들과 아이 컨택을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고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예요. 발레라고 했을 때 틀에 박힌 표현을 생각하셨던 분들은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런 면에서 무용수들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작품이고요.
김용걸 클래식 발레는 턴아웃, 포인트, 다 지키면서 해야 하고 그래서 힘들어요. 이 작품은 그런 것들을 원래 지키도록 되어있는 무용수들이 그 제약에서 약간 벗어나서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안무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은 현실의 몸짓들이 반영되어 있어서 무용수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에요. 만약 클래식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을 한다면 저 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 전부터 몸을 풀면서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 바 붙잡고 땀 줄줄 흘리면서. 그런데 이 작품은 한 15분 전에 가볍게 몸만 풀어도 되는, 그래서 좀 더 감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드라마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죠.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무대에 서면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저를 보잖아요? 그 시선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키스하고 그런 경험은 정말 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김지영 애 아빠가!(웃음)
김용걸 그러니까요. 객석에 제 아내가 보고 있을 텐데 보란 듯이… (일동 웃음) 제가 무대에 서는 사람이 아니면 파렴치한 변태 취급을 받을 일이잖아요. 이런 것들도 굉장히 흥미롭고 흥분이 돼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누레예프가 안무한 파리 오페라 발레단 버전이에요. 그런데 그 작품의 단점은 동작 때문에 몰입도가 좀 떨어져요. 정말 탁월한 무용수가 아니면 동작하기에 바빠서 죽음이나 고통 같은 것들을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정말 잘하는, 마누엘 리그리 같은 댄서가 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히거든요. 그 정도 무용수가 아니면 무대에 나가기 전에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전에 그 기술을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압박감을 먼저 느껴요. 마이요의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는 훨씬 좋죠. 물론 다른 스트레스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댄서로서 감정에 더 몰입할 수 있고 그래서 관객들도 더 큰 감동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김지영 저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정말 기가 막힌 것 같아요. 이 작품이 특별한 데는 음악의 힘이 정말 크다고 생각해요. 저도 여러 가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춤춰 봤지만 항상 좋았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들이 정말 많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같아요.
이동훈 저는 마이요의 작품을 <신데렐라>를 하면서 처음 경험했는데 발레에 이런 춤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항상 클래식만 좋아하고, 턴아웃이나 예쁜 라인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고, 늘 다리에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그런데 마이요 작품을 하면서 상체의 움직임, 표정, 손동작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는 게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마이요의 안무를 할 때는 그래야 한다는 메시지가 저한테 좀 더 확실하게 다가와요.
네 분이 모두 주역이잖아요. 발레에서 주역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자리일까요.
김용걸 저는 게스트입니다. 주역들께서 말씀해주셔야지 게스트가 계속 말이 많으면 안 되죠.(일동 웃음) 책임감이겠죠. 주위를 감싸주고 있는 솔리스트와 군무수들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주역이 무너지면 파장이 너무 크니까요. 주역이라면 춤을 잘 추는 건 기본이에요. 평소에 생활하는 것, 다른 무용수들이 그 주역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살아야 해요. 걸음도 멋있게 걸어야 하고, 밥을 먹을 때도 뭔가 달라야 하고.(웃음) 그래야 좀 주역 같죠. 그럼 그 사람이 발레를 할 때 좀 더 진지하게 몰입해서 보게 되는 거고요. 제가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봤던 에투왈이라는 사람들은 일단 무용을 잘하는 건 기본이었어요. 춤 잘 추니까 에투왈이 됐겠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평소 모습을 봤을 때는, 아 저렇게 하니까 에투왈이구나 싶은 게 있어요. 곁눈질로라도 항상 그 사람에게 시선이 이끌릴 수밖에 없어요. 뭔가 다르거든요. 주역은 그 발레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니까 모든 면에서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김지영 말 그대로 본보기인 것 같아요. 모든 무용수들이 처음 딱 입단을 했을 때 꿈꾸는 자리잖아요. 물론 군무수들이 감당하는 책임감도 있어요. 제가 군무를 해봐서 아는데요.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줄 하나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 하나로 인해서 모든 게 흐트러질 수 있다는 압박감이 있어요. 어쨌든 발레단 안에서는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건데 주역 무용수는 모두가 별처럼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 짐을 져야 하는거죠.
김주원 어릴 때는 잘 몰랐어요. 주역 무용수의 역할이 어떤 건지. 너무 저만 생각하고 제 춤에만 급급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고 무대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됐어요. 저희가 공연을 한번 하면 많게는 100명 가까이 되는 댄서가 무대에 올라가고 오케스트라, 스태프까지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데 크게 보면 주역은 그 모두를 이끌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사람이거든요. 동훈이는 주역을 한 지 몇 년이 됐지? 벌써 3년이구나.
이동훈 네. 저는… 다 좋은 말씀인데, 아직도 헷갈려요. 제가 어떤 주역이 되어야 할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아서…. 분명 친구들이고 동료고 선배님들인데 제가 주역으로 춤을 춘다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격이 있어야 하는 건지, 다 같이 어울리고 다 같이 춤추면서 역할에서는 다른 뭔가를 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극 안에서는 제가 그 역할에 맞게 왕자면 왕자로서 지시를 하지만, 작품 밖에서는 제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야 할지 아직은 마음을 못 정했어요. 예를 들어 내일 공연이 있다면 오늘 굉장히 예민해지잖아요. 그때는 저만 신경 쓰고 싶고 제 춤에 집중하고 싶어지는데, 그러면 다른 군무하는 동료들에 대해 이기적인 것 같고,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김주원 그래서 용걸 오빠 같은 사람이 오래 같이 있어주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보고 배울 수 있게. 저희 때는 여자 주역이 저와 지영이밖에 없었거든요. 항상 저는 주역 언니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 거예요. 저도 동훈이 나이 때는 똑같은 고민을 했던 거 같아요.
김지영 우리 때는 비록 남자일지언정 (김)용걸 오빠나 (이)원국 오빠가 있어서 그래도 주역으로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리고 지금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도움이 된다면 우리가 계속 발레단에 있는 의미가 되겠죠. 그런데 사실 다들 짐처럼 여기고 있는 거 아냐?(일동 웃음)
김용걸 지금 다들 잘하고 있어요.(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7호 2011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