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극으로 영국 여왕에게 훈장을 받은 아시아의 연극인, 일본이 ‘세계의 니나가와’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하는 노장은 특급 스타들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질 만큼 거침없는 독재자라는 악명과 달리 성실하고 예의 바르게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정확하게 60분을 채운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존경심’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함께 자주 썼고, 일본을 대표하는 연출가로서의 입장을 묻자 ‘나는 일본을 대표하는 연출가가 아니라, 일본의 일부를 대표하는 연출가’라고 바로잡았다. 특별하지 않은 질문에도 한마디도 허투루 답하지 않는 일흔일곱 살의 연출가는 젊은 세대를 위한 조언을 요청받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젊었을 때 나 같은 노인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았으니 나도 쓸데없는 조언 같은 건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젊은 연극인들과 사이가 좋은 이유’라며 경쾌하게 웃는 자칭 ‘싸우는 노인’과 간담회 직후 따로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이어진 이야기들을 함께 정리했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공연을 위해 첫 내한을 하셨습니다. 여러 국가에서 공연을 하고, 많은 기자들을 만나셨겠네요. 문화권에 따라서 기자들의 질문에 차이가 있나요? 역시 달라요. 작품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유럽의 여기자들은 남자 배우에게 여자 역을 시키는 것에 대해 반드시 질문을 합니다. 굉장히 화를 내죠. ‘왜 여배우에게 여자 역을 맡기지 않냐’고. 일본은 여성에게 무조건 참기를 강요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여배우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더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시끄러!’라고 반박하더군요.(웃음) 로마에서도 그랬고, 아테네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 비극도 셰익스피어 극도 처음에는 남자들이 여성 역을 연기했잖아요? 그 전통대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남자가 여자 역을 하거나 여자가 남자 역을 할 때 관객들은 조금 이상하지만 매력적이다라는 느낌을 받는데 이것 역시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 중 하나라고 봅니다.
연극과 영화 작업을 모두 하시는데, 연극은 영화와 달리 고정된 형태로 남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공연을 한 후에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작품이 있습니까?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했던 작품은 재공연을 꼭 합니다. <햄릿>은 내년 2월에도 공연을 하는데 이번이 일곱 번째죠. (제일 아쉬움이 많은 작품인가요?) 아마도. 뭔가 하나가 걸려요. 어딘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뭔가가 안 풀린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뭔가가 걸리는 작품과 이거면 됐다고 생각하는 작품 중 어느 쪽이 많으신지. 이번에는 잘했다고 납득할 수 있는 성공한 작품이 더 많아요. 비평가의 평과는 다르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20대 시절 문패에 새겨놓았던 것처럼 역시 ‘천재 니나가와’ 라고 믿으세요?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것보다는 내가 만든 연극이 재미있으니까.(웃음)
관객이 3분 안에 자신의 현실을 잊고 극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셨죠. 그 3분을 두고 ‘니나가와의 마법’이라고들 말하던데요. 관객 한 명 한 명이 가지고 있는 삶의 역사도 다르고 그날의 기분도 다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현실을 내려놓고 연극의 세계 안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게 하는가가 연출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어떤 길을 지나서 극장까지 오게 되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로비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는 관객들이 짊어진 제각각의 삶의 무게를 인식하는 것이 연출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극장 안이 어두워지는 속도, 다시 무대가 밝아지는 속도, 그리고 밝아졌을 때 관객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정하고 극이 흘러가는 방향성을 관객이 3분 안에 받아들이고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변혁의 대상, 뛰어넘어야 하는 아버지의 위치에 섰다는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으세요? 젊은 세대로 인해 내 자신이나 내 일이 흔들리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젊은 세대에 대해서 겸허한 자세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배워온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세대와 그에 대해 저항하는 세대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는 신체적인 행동까지 해서 정치적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지만 지금의 세대는 그렇지 않죠.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에 익숙한 세대인데, 서로가 자라고 살아온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고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자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의 세계관과도 통하는 이야기인데 디태치먼트(분리, 고립 Detachment)와 커미트먼트(헌신, 의무 Commitment)를 어떻게 공유해서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녀(니나가와 미카)가 유명한 사진작가고 영화감독인데, 젊은 세대의 예술가이기도 하고 혈육이기도 한 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세요? 그렇죠. 평소에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아요.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보면 ‘어, 영상 쪽은 나보다 얘가 훨씬 잘하는데?’라는 놀라움을 느낍니다.
그러면 아버지로서 기쁘신가요, 예술가로서 질투를 느끼시나요? 딸이 아티스트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는 건 아버지로서 기쁜 일이지요. 그런데 부녀지간에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쑥쓰러운 일이라… 아버지가 연출가라는 것이 딸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합니다. 그래서 전시회가 있어도 첫날이 아니라 마지막 날 살짝 가서 보고 오죠.
아이돌 그룹 아라시의 니노미야 카즈나리에게 ‘이 시대의 바람이 느껴지는 얼굴’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뿐만 아니라 많은 톱스타들과 작업을 하셨는데요. 스타 캐스팅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스타나 아이돌은 대중의 욕망을 샤워처럼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무대에 나섰을 때는 대중들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연극에서 멀어진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역할도 하지요.
해외에는 셰익스피어 극이나 그리스 비극의 연출가로 유명하지만 다양한 현대극이나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유리가면>까지 연출할 만큼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자신이 지난해에 연출한 작품 수가 바로 생각나지 않을 만큼 다작을 하시면서도 새로운 관심사를 찾고, 영감을 받을 시간적인 여유가 있나요? 개인적인 시간을 만드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옛날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을 때는 연습 시간을 줄이거나 해서라도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고를 때는 내 의견도 있지만 젊은 프로듀서들의 제안을 받고 ‘아, 그거 재미있겠다. 한번 해보자’라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보니 다양한 작품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면, 나는 취미가 굉장히 많아요. 미식가로 비유하자면 고급 미식가도 있지만 노점 음식들만 좋아하는 B급 미식가도 있잖아요? 나는 양쪽 다예요. 비빔밥처럼 여러 재료를 다 넣어서 섞어 먹는 것처럼 다양한 것들을 섞어서 경험하는 것에 굉장히 흥미가 많아요. 작품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종종 질문을 받는데, 상어나 참치가 바다 속에서 끝없이 헤엄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웃음)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에 대해서 연극에 대해 관심이나 열정을 유지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세요? ‘오타쿠’라는 말을 한국 분들도 아시나요? 나는 연극 오타쿠예요. 연극을 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모형을 만드는 것처럼 연극을 만들고 세계를 재현하는 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각, 인간에 대한 느낌들을 한 작품만으로는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아서 차이점들도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로서 양국의 차이를 느낀 적이 있으세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데, 영화를 보면서 에너지가 굉장하다, 열정적이고 파워풀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나 박찬욱, 김기덕 감독을 좋아하는데 일본 사람들과 달리 정해져있는 선을 넘어서까지 깊이 파고든다는 걸 느꼈습니다. 실은 3월 12일에 한국에 첫 방문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고 방사능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요. 그때나 이번에 다시 방문했을 때나 공항에서 극장까지 오면서 도시 안에 바위가 많은 산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비슷하달까요. 한국은 야외극을 공연하기에 좋은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언가 근원적인 힘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런던이나 뉴욕 공연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에서의 첫 공연에 대해서는 좀 다른 긴장감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 사실을 의식해서 작품에 반영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의식해서 만든 것은 없습니다. 그건 정당하지 않은 일 같아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서 보여드렸을 때 받아들여진다면 보편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을 위한 선물처럼 뭔가를 장식한 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역사를 볼 때 한국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고, 이처럼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역시 한국과 무관계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기 위하여 첫걸음을 떼는 것이 이번 공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정리를 생각할 시기에, 첫걸음을 말씀하시는군요. 내 인생에서 변화할 수 있는 최후의 지점이 아닐까요.
미대 지망생이었던 시절에 생각했던 인생과 지금까지의 삶은 얼마나 비슷한가요? 젊었을 때 생각한 인생과는 완전히 달라요. 연출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연극의 제1선에서 활약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정말로 그때 생각했던 것과 인생이라는 건 전혀 다른 거네요.
그때 상상했던 인생은 어떤 것이었나요? 젊었을 때는 내가 뭘 하게 될지 정말 몰랐습니다. 미대는 떨어졌고 배우가 됐는데 내가 재능이 있는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출을 시작했죠.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연출에 대한 공부를 한 적도 없기 때문에, 김기덕 감독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떤 확신이 없었습니다.
확신이 없으면서 천재 니나가와라고… 그렇게 걸어놓으면 그 말에 지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잘난 척을 한 번 하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문패였습니다.(웃음)
돌이켜 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세요? 막 연출가가 되었을 때 정말로 공연을 하고 싶었던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낮에는 영화를 상영하고 밤 9시부터는 연극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 극장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제가 그곳에서 하고 싶은 작품 세 편의 기획안을 매니저에게 보여주면서 공연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용케 그럴 수 있었구나 싶어요. 그다음에는 그리스에서 희랍비극을 공연한 것. 그리고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한 것도 그렇지요. 그건 서양인들이 일본에 와서 가부키를 공연한 것과 똑같은 일인데, 참 겁이 없었구나 싶어요.
연출가로서 유럽 연극의 권위 앞에 기죽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준 무언가가 있었습니까? 외국 컴퍼니들이 일본에 와서 공연을 할 때,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내는데 나는 공감하지 못한 적이 많습니다. 나는 그 공연에 감동을 받지 못했으니까, 그 작품을 더 잘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죠. 유럽 연극의 전통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지만 비판하는 자세도 함께 가지고 싶었습니다.
비평가의 비판에 수긍한 적도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나에 대한 비판이라도 맞는 말이면 옳은 말이다, 좋다, 라고 수긍하죠. 그런데 800만 부를 찍는 신문에서 나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비판을 했을 때, 그에 반박하는 글을 써서 ‘니나가와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극장 문 앞에 붙여둔 적이 있습니다. 800만 부 대 1부의 싸움이었죠. 하지만 올바른 비평일 때는 조용히 듣기만 합니다.
요즘도 배우들에게 재떨이를 던지시는지? 배우들에게 어떤 것을 원해서 그렇게까지 격한 제스처를 취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물건을 던지는 짓은 요즘에는 거의 안 합니다. 옛날에는 말을 안 듣는 배우들에게 물건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건 권위를 확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좀 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지금도 재떨이는 아니지만 구두는 바로 던질 수 있도록 끈이 없는 신을 신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야구를 했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이 맞지 않게 던질 수 있습니다.(웃음) 배우에게 바라는 것은, 배우 자신이 생각한 것을 구체적인 연기로 표현해주기를,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우가 자신의 문제를 연기로서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유럽 연기를 흉내 내지 마라, 유럽식 발성을 흉내 내지 말고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발성으로 연기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리딩을 간략하게 하거나 생략하고 바로 동선을 잡는 리허설에 들어가는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럽 연극은 보통 테이블에 앉아서 희곡을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데 나는 이것이 배우보다는 학자에게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가 희곡에 접근할 때는 서서 몸과 지능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더 어울려요. 문학적인 접근만이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테이블 앞에 앉아서 하는 연습은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지난 3월 방한을 했다가 동일본 지진 때문에 급하게 귀국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이러한 상황에 처한 세계를 위해서는 예술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많았는데요. 연출가로서 어떤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되셨는지? 내가 만드는 연극이 이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현실이 덮쳐왔기 때문에, 만약 그때 내 작품을 공연하고 있었다면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일에 내가 현실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지 않나, 내가 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가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이 작품이 이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노인 배우들로 꾸려진 골드 시어터나 무명 배우들을 위한 넥스트 시어터는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과정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네요.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엄밀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고, 특히 지진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모두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나, 둘 세어가면서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파악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공연을 할 의향이 있으세요? 이런 작품도 있다고 더 보여드리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공연 이후로도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0호 2012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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