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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친절한 영국 신사가 알려주는 유쾌한 살인 매뉴얼 <젠틀맨의 사랑과 살인 가이드> [No.127]

글 |이오진 (극작가) 사진 |Joan Marcus 2014-04-09 4,817

춘삼월의 뉴욕 브로드웨이에는 따끈따끈한 신작 뮤지컬들이 줄을 서있다. 프리뷰 공연을 마치고 속속 본 공연에 들어가는 작품 중에는, 오랜만에 브로드웨이로 컴백한 <레 미제라블>과 디즈니 만화 원작 뮤지컬 <알라딘>도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전부 디즈니로 흘러 들어간다는 설을 증명하듯, 뮤지컬 <알라딘>이 경쟁작들을 제치고 눈에 띄게 관객 몰이를 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 또한 영화의 전 세계적 흥행을 등에 업고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에 반해 동명 영화 원작의 뮤지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관계자들 사이에서 ‘저러다 일찍 막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사고 있는 중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도 기대를 모았던 권투 뮤지컬 <록키>의 흥행 부진 또한 안타깝다. 신작들 간의 불꽃 튀는 경쟁 틈바구니에, <젠틀맨의 사랑과 살인 가이드>(이하 <젠틀맨>)도 있다. 이 작품은 대박 뮤지컬은 아니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도 칭찬 일색인 데다 공연을 보고 온 이들의 반응도 좋아, 앞으로 롱런하는 뮤지컬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 보게 된다.

 

 

 

 

내용은 스릴러, 형식은 코미디

<젠틀맨>은 2012년 샌디에이고 초연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코네티컷에서 재공연을 하고, 지난해 10월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뮤지컬 코미디이다. <알라딘>처럼 디즈니의 후광을 입은 것도 아니고 <레 미제라블>처럼 전설적인 공연의 리바이벌도 아니지만, 10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뉴욕에 입성한 이 작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넘실거린다. 작품은 1907년작 소설 『이스라엘 랭크(Israel Rank)』를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1940년대에 영화 <카인드 하트 앤드 코로넷(Kind Heart and Coronets)>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뮤지컬이 완성된 후 영화사가 영화를 표절했다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사실 뮤지컬계에서 잘나가는 작품이 나오면 소송에 걸리는 일은 부지기수인데, 다행히도 <젠틀맨>이 승소하여 1907년의 소설이 2014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때는 1909년, 런던의 한 가정집.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잠긴 청년 몬티가 있다. 당장 직업도 없이 앞날이 깜깜한 몬티 앞에 나타난 정체 모를 요상한 할머니. 그녀는 자신이 몬티의 어머니와 잘 아는 사이였다며, 다짜고짜 그의 출생의 비밀을 폭로한다. “너는 영국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다이스큇 가문의 서열 아홉 번째 백작이야!”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명문가의 딸이었던 몬티의 어머니는 가난한 음악가였던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다이스큇 집안에서는 그 결혼을 반대했고, 결국 사랑을 택한 몬티의 어머니를 집안에서 내쫓아 버린다.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둘이 자란 몬티는, 자신이 정신 나간 할머니에게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해한다. 얼떨떨한 그에게, 할머니는 몬티의 어머니가 남긴 보석함을 열고 다이스큇 혈통을 증명하는 편지를 건네준다. 몬티는 비로소 확신을 갖고 할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다이스큇이다!(I am a D`Ysquith!)’

희망에 찬 몬티는 다이스큇 집안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돌아온 답장은 “우리는 네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앞으로 또 이 문제로 연락하면 신고해 버린다”는 협박성 멘트뿐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애인이었던 시벨라마저 몬티를 버리고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 버린다. 어머니도 잃고, 애인한테도 버림받고, 집안에서마저 외면당한 몬티는 복수를 결심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작품이 마치 스릴러물일 것 같지만, 말한 대로 이 작품은 코미디이다. 그리고 진짜 코미디는, 몬티가 다이스큇 가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몬티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집안의 친척들을 한 명 한 명 보내버리는데, 그 버라이어티한 방법들이 기가 막히다.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데 빙판을 몰래 톱질해서 빠져 죽게 한다든가, 양봉을 좋아하는 친척의 모자에 꿀을 듬뿍 발라 벌에 쏘여 죽게 하는 식이다. 가족의 잇따른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다이스큇 집안의 아가씨 피비에게 다가가 유혹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그 와중에 옛 애인이 명문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시벨라와 불륜을 저지른다.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르는 맹한 아가씨 피비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집안 식구들을 모조리 죽인 살인자인 줄도 모르고 몬티와 결혼을 한다.
몬티의 계획은 차근차근 현실화되고, 이제 망나니 백작 한 명만 제거하면 그가 다이스큇 가문의 서열 1위가 된다. 몬티는 안주머니에 독약을 품고 백작과 저녁 식사를 한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애인 시벨라와 아내 피비까지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된다. 마지막 장애물만이 남은 시점. 하지만 백작은 누군가가 탄 독약이 든 음식을 먹고 의문사 당한다. 다이스큇 가문의 후계자인 백작이 죽자, 경찰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후계자인 몬티를 취조하기 시작한다. 막상 앞서 일곱 명을 죽일 때는 의심 한 번 안 받다가, 그가 죽이지도 않은 백작 때문에 몬티는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몬티가 법정에 서자, 다이스큇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증인으로 나선다. 몬티의 아내인 피비와 애인 시벨라는 판사를 찾아가 상대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에 바쁘다. 하지만 결국 몬티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마침내 다이스큇 가문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되는구나’ 하고 안심하는 순간! 저택의 지붕을 뚫고 다이스큇 집안의 또 다른 서자인 청소부가 ‘내 주머니에 독약 있다!’라며 튀어나온다. 그렇게 뮤지컬은 또 다른 반전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다음에 저 배우는 어떻게 죽을까

<젠틀맨>은 속도감이 빠르고 집중도가 높은 뮤지컬이다. 정신없이 죽어나가는 다이스큇 귀족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공연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다. 코미디라는 장르 때문에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젠틀맨>은 넘버와 드라마의 조화가 절묘하고 리프라이즈의 활용도 높아 한 곡 한 곡이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은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극장을 나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넘버를 흥얼거리면 성공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젠틀맨>은 훌륭한 뮤지컬이다. 2막의 마지막 장면, 다 같이 부르는 피날레 ‘몬티 네바로’는 왕이 등장할 때 군악대의 연주와 같은 행진곡 분위기의 넘버인데, 근엄한 멜로디가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오케스트라의 빵빵한 연주에 맞춰 배우들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하는데, 정작 몬티는 여덟 명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말이다.
‘나 너랑 결혼하기로 결심했어(I`ve Decided to Marry You)’ 또한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몬티가 애인 시벨라와 침실에서 사랑을 속삭이다 갑자기 집에 피비가 찾아오자 당황해서 이 방 저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부르는 넘버인데, 세 배우의 호흡이 기가 막히다.
<젠틀맨>을 이끌고 가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주인공 몬티 역의 브라이스 핑크햄이 아니라, 1인 8역을 연기하는 제퍼슨 메이스이다. 몬티의 아내 피비와 심장 마비로 죽는 할아버지를 제외한, 몬티가 죽이는 다이스큇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이 놀라운 배우가 혼자 소화한다. 불과 3분 전에 정원에서 벌에 쏘여 죽은 그가 갑자기 여장을 하고 나와 괴팍한 할머니 연기를 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배우의 역량에 입이 떡 벌어진다. (물론 그 할머니도 곧 죽어 나간다) 연기는 물론이고 의상이나 분장 또한 완벽해, 1막이 끝날 때까지 같은 배우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제퍼슨은 도그 라이트 작 <나는 나의 아내다(I Am My Own Wife)>를 통해 토니 어워즈 연기상을 받은 실력파이다. 당시에도 1인 36역의 모노드라마를 너끈하게 소화해내며 관객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젠틀맨>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번엔 저 배우가 또 어떻게 죽을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된다.
작품 속의 살인은 그저 유희(遊戱)의 도구이지,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살인을 다룬 블랙코미디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뮤지컬 <스위니 토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피가 단 한 방울도 튀지 않는 <젠틀맨>은 오히려 <스팸어랏>의 시니컬한 코미디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작품 전체가 귀족 사회의 위선과 교만을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가 결국엔 의문사한 망나니 백작이 부르는 솔로 ‘난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I Don`t Understand the Poor)’의 가사는 이 작품의 색깔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I don`t understand the poor.
난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And they`re constantly turning out more.
아 근데 걔네들은 계속 늘어나
Every festering slum in Christendom
전 세계 기독교 국가에 온갖 더러운 빈민가마다
Is disgorging its young by the score.
걔네는 애들을 끊임없이 낳아댄다니까

 

심지어 백작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뒤에 걸린 초상화에서 가문의 조상들이 살아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명문가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오만한 무지(無智)를 느낄 수 있었다.

 

 

 

 

영국의 불안한 사회상 반영

<잰틀맨>은 자신이 귀족 집안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청년 몬티가 집안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과정을 담은 좌충우돌 코미디의 표면을 갖고 있지만, 실은 당시 영국의 불안한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젠틀맨>의 배경이자 몬티가 살고 있던 20세기 초 런던은, 가난과 매춘, 각종 질병이 난무하는 슬럼이었다. 당시 영국은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상태였고,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계급 사회의 구습이 남아있었다. 법적으로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무너졌지만, 실제로는 계급 사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당시 영국 배경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저택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 유독 많다. 대표적인 예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이다. 외부와 단절된 저택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이고, 그들 사이에 숨겨놓은 욕망이 살인 사건의 단초가 된다. 『대저택 살인 사건』, 『영국식 살인 정원』 등의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의 작품들 모두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 이 특수한 공간은, 당시 런던의 도시 빈민층의 삶과 반대되는 상류층의 삶을 상징한다. 자연을 벗 삼아 공기 좋은 교외의 대저택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사는 귀족의 삶과 도시 빈민층의 삶. 그 간극은 당시의 사회에서 일어난 뿌리 깊은 갈등의 씨앗이었다. <젠틀맨>은 당시 귀족 사회의 파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자 출신으로 귀족 집안에서 내쫓긴 하층 계급의 인물이 상류층 귀족들을 죽이고 자신이 귀족이 되는 설정은, 그간 계급 사회 내에서 자신의 신분 상승 욕구를 누르고 살아왔던 하층민들의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때문에 <젠틀맨>의 마지막, 청소부가 “내 주머니에 독약 숨겨 놨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또 다른 계급 간의 갈등을 암시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포복절도 소동극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작품은 결코 웃어넘길 만한 만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젠틀맨>의 저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한국의 창작뮤지컬 중 뮤지컬 코미디를 표방한 작품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관객들을 빵빵 터트리는 소소한 개그 코드는 어디에나 산재해 있고, 로맨틱 코미디의 타이틀을 단 뮤지컬도 많이 보았지만, 뮤지컬 코미디라고 부를 만한 작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러닝 타임 내내 정신없이 웃기다가 작품의 끝에는 찡한 마무리를 하는 작품들에는 어쩐지 뮤지컬 코미디라는 라벨을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그렇다면, 한국형 뮤지컬 코미디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 수 있을까? <젠틀맨>이 20세기 초 영국의 불안한 사회상을 비틀어 코미디로 만들어낸 것처럼, 우울해 보이기만 하는 대한민국의 오늘날도 화끈한 뮤지컬 코미디로 만들어 놓으면 관객들을 잠시나마 웃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조금 더 견딜 만해진다.” 극작가 딘센의 말이다. 지금도 노트북이 터질 정도로 작업하고 있을 한국의 창작뮤지컬 작가, 작곡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7호 2014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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