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결혼>은 제목처럼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이 시대 남녀들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다.
달콤 대신 쌈싸름하기만 한 작품 속 결혼의 맛은
‘스펙 겨루기’가 되어가는 현실의 결혼에 기대고 있다.
극 중 남자도 결혼 정보 회사를 통해 만난 여자에게
위장된 스펙으로 어필하려 한다.
관객에게 시계나 구두, 옷까지 빌려 자신을 꾸민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뚱이 신세가 되고 만다.
진정한 자신으로 상대와 마주해 결혼의 참 의미를 찾으라는 메시지이지만,
현실의 세태는 여전히 그렇지 않다.
결혼은 어쩌다 이런 것이 됐을까.
뮤지컬 속 남자 박형준이 직접 결혼 정보 회사를 찾아
베테랑 커플매니저인 이은주와 결혼의 의미를 되짚었다.
장소제공 | 가연결혼정보
현실 속 결혼의 조건들
이은주 개인적으로도 팬인데 이렇게 제 일과 관련된 작품으로 만나게 돼 영광이네요. 벌써 세 번째 같은 공연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처음 대본을 접했을 땐 어땠나요.
박형준 일단 캐릭터의 말투도 좀 옛날식이고 상징적인 말들이 많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무대에서 표현할까 고민 많이 했죠. 단순히 남녀의 맞선 과정이 아니라 인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감정 잡기도 어려웠어요. 아직도 연출님께 만날 혼나요. 일단 등장하면 한 시간 반 동안 퇴장 없이 무대에서 계속 말해야 하는 것도 힘든 점이죠.
이은주 체력 소모가 많겠어요.
박형준 체력적인 건, 사실 다른 뮤지컬들이 더 심하죠. 거기선 칼싸움도 하고, 춤추고, 날아다니는데(웃음). <결혼> 어떻게 보셨나요?
이은주 정말 현실적이더라구요. 저희가 실제로 접하는 게 다 있었어요. 여성들이 우선 보는 게 경제력이고, 남성은 외모와 나이거든요. 그런 것도 다 스펙이에요. 특히 외모나 나이는 학력이나 직업보다 상위의 스펙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뮤지컬이니까 그냥 웃으면서 재밌게 보겠지만 저희들은 결코 웃을 수 없는 문제죠. 현실이 그러니까요.
박형준 아까 인사 나눌 때도 물으셨잖아요. ‘외모 보지 않냐’고. 당연히 외모 보죠. 남자들은 다 똑같을 거예요. ‘몇 살이냐’, ‘얼굴이 어떠냐’가 관심사죠.
이은주 정확히는 ‘예쁘냐’겠죠(웃음).
박형준 저도 이 작품을 하면서 ‘결혼에서 외모나 물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조건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긴 하는데, 현실은 또 그렇지가 않잖아요. 극 중 남자도 결국 여자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런 사기를 치는 거고. 그런 분들이 실제로도 있겠죠?
이은주 극 속에서는 빌린 물건들로 경제력을 과시하면서 허세를 부리잖아요. 저희가 회원 인터뷰를 할 때 그런 경우가 있어요. 연봉을 말할 때 인센티브까지 포함해서 부풀리는 거죠. 물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성격이나 취향, 진심이 없다면 결혼 성립이 어려워요. 여자도 성형수술을 해서 미모로 어필하려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죠.
박형준 여자가 정말 압도적으로 예쁘다거나 남자가 돈이 굉장히 많다면 그것만 보고도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은주 그렇게 해서 설령 결혼을 한다 해도 결혼 생활에 필요한 조건들이 또 나타나게 돼 있어요. 요즘 이혼하는 커플들이 많아지는 이유도 조건‘만’ 보고 결혼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계속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아니면 싫증이 날 수밖에 없겠죠. 조건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잖아요. 그게 흔들리면 다 무너지는 거죠. 결국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요.
결혼 정보 회사, 사람 등급 매기는 곳?
박형준 커플매니저가 조건보다 진심이나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니까 좀 의외인 것 같아요. 결혼 정보 회사는 대개 조건을 최우선으로 하는 곳인 줄 알았거든요.
이은주 저희가 도와드리는 것과 실제 결혼 생활을 잘하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그건 장담할 수 없어요. 자기 걸 좀 내려놓는 분들이 확실히 결혼에 성공하는 확률은 더 높죠. 특히 이런저런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남성들이 많은데, 아무리 돈을 냈다고 해도 이곳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에요. 이런 분들은 요구 조건을 계속 늘리면서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려고 해요. 저도 결혼했지만, 사람이 한 50~60% 정도만 맞으면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되는데 말이죠(웃음).
박형준 그런 사람 정말 없더라고요. 많이 내려놔야 되는 것 같아요. 계속 욕심만 부린다고 해도 그걸 만족시키는 사람도 찾기 어렵고.
이은주 성철 스님이 주례사에서 그러셨다죠. 결혼으로 서로 덕 보려고 하지 말라고. 여성들 중에 결혼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하려는 분들이 있어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거죠. 그런 분들은 오로지 남자의 연봉, 직장으로 내 미래를 얼마나 보장해줄 수 있나만 봐요. 그러다가 밥 한 번 먹고 끝나는 거죠. 그게 계속 반복돼요. 이런 분들은 결혼하기 어려워요.
스타들은 결혼 정보 회사 대신 그들만의 커넥션이 있다고 하던데요.
박형준 전 스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웃음). 주로 작품을 같이하다 만나는 경우가 많아요. 차인표 신애라 부부도 그렇죠.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서로를 알게 되고 사랑하는 연기를 하다가 진짜로 그런 감정이 생기고… 그런다는데 저는 왜 이럴까요?(일동 웃음)
이은주 저도 궁금했어요. 로맨스 작품을 찍다 보면 만들어진 것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감정이 안 생길 리 없잖아요. 형준 씨도 그런 경험은 있지 않아요?
박형준 사실 이런 개인적인 질문 때문에 여기 오는 게 좀 두렵기도 했어요. 저에게도 어떤 등급이 매겨지거나 저도 모르게 제 정보가 누출될까봐요. 사실 결혼 정보 회사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갖는 생각이 ‘등급’이잖아요. 사람을 고기처럼 등급으로 나눠 분류하는 거요.
이은주 수능도 아닌데 웬 등급?(웃음) 그런 곳도 있지만, 저희는 그런 게 없어요. 사실 등급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고요.
박형준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나한테 등급을 매긴다면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특히 상대방도 그런 내 등급에 맞춰서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더욱요.
이은주 당연히 기분 나쁘죠.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까 박지성 선수도 그 등급표에 대입하면 8등급이라고 하더라고요. 조건을 따져봐도 박지성 선수가 그렇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박형준 이상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올 것 같아요.
이은주 별의별 분들이 다 있죠. 가령 목 길이가 몇 cm인 여자를 찾아달라는 분도 있어요. 걸음걸이에 자신 있는 분이나 스타킹을 신었을 때 예쁜 여자를 찾는 분도 있고. 본인 나이는 굉장히 많은데 자신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의 여자를 찾아달라는 남자 분들도 많아요.
박형준 그런 분들께는 뭐라고 하죠?
이은주 상대 여성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하죠. 당신이 그 여자라면 마흔 몇 살 먹은 남자를 만나고 싶겠냐고, 불가능하다고 하죠. 그러면 ‘불가능해도 해달라’고 해요(웃음).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다’ 라면서.
박형준 <결혼>에서도 초반에 그런 대사가 나오거든요. “말씀드렸을 텐데요. 22살짜리로 해달라고요.” “김태희 얼굴에 소녀시대 몸매 정도” 이런 것도 있고. 여기에 방금 말씀하신 “그게 가능하겠냐고요” 이런 애드리브 넣어야겠네요.
욕망에 가려진 진짜 나
박형준 현실은 이렇게 냉혹한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결혼을 다루는 방식이 대개 낭만적이잖아요. 그런 걸 볼 때면 괴리감이 크시겠어요. 실제로 정말 그런 낭만적인 결혼관을 가진 분들을 만나면 나름 까다로울 것 같기도 하고.
이은주 진짜 그래요. 정말 좋은 조건을 갖추신 분인데, 상대방의 조건을 아무것도 안 보는 거예요. 대신 느낌이 좋은 분, 그러니까 ‘사랑’을 찾는 거죠. 밖에서 찾다가 못 찾으니까 여기까지 오신 건데, 사실 이게 조건만 찾는 것 못지않게 성사시키기 어렵죠. ‘착하고 느낌 좋은, 예쁜 여성’ 같은 거죠. 차라리 조건을 매칭하는 게 쉬워요.
박형준 그런 분도 ‘예쁜’은 빠트리지 않는군요.
이은주 극 속 설정을 보면서 정말 인상적이었던 게, 빌린 물건들을 하나둘씩 빼앗기면서 빈털터리 알몸이 되는데 그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잖아요. 결혼이라는 게 그런 진짜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 같아요.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거든요. 사실 경제력, 경제력 하지만 사지(四肢)만 멀쩡하면 뭘 해서든 돈을 못 벌겠어요? 그건 정신의 문제죠.
박형준 매니저님의 경우는 어떠신가요. 결혼 상대나 지금의 결혼 생활요.
이은주 3분을 같이 있어도 3년처럼 지루한 사람이 있고, 3년을 같이 살아도 3분처럼 느껴질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싫증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전 기념일에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거 먹는 게 다예요. 굉장히 평범하죠. 그런데 평소에도 재래시장에 같이 놀러 가서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세월이 흘러도 그런 게 지루하지 않고 싫증이 안 나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어요. 좋은 차, 명품 백? 그런 거 없어도 소소하고 반짝이는 일상의 재미를 얼마든지 누릴 수가 있다는 말이죠.
박형준 마치 <결혼> 대본을 쓰신 분 같아요.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와닿네요. 말씀대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든지 다른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 텐데, 다들 왜 한길만 볼까 궁금하기도 해요. 그런 조건들은 극에서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데.
이은주 형준 씨가 연기했듯이 그런 게 다 없어져도 ‘진짜 나’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되는 거겠죠. 그게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거든요. 오로지 돈에만 집착하게 되면 자기 삶은 없어지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죠. 많은 분들이 계속된 만남에도 결혼 못하는 이유가 이런 욕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박형준 <결혼>이 결국 그 이야기에요. 그런 조건들만 있으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뺏기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마음이 유일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회원 분들께 저희 뮤지컬을 추천해주시면 그분들에게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형준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웃음).
이은주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포장을 해도 변하지 않는 게 마음이거든요. 저도 그런 의미에서 형준 씨에게 조언을 하자면, 외모 나이로는 30대 중반이라고 봐도 될 정도지만 생물학적인 나이는 마흔을 넘겼다는 거죠. 적은 나이가 아니에요. 그래서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상대 여성에 대해서도 더 현실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될 거예요.
말 나온 김에 결혼관에 대해 들어볼까요.
박형준 깊게 생각해보진 못했어요. 결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정적인 게 많았어요. 주변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결혼식 사회를 많이 봤는데 옆에서 보니 결혼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더라구요. 집안 간의 만남에, 극복해야 할 일들도 많고. 사실 하고 나면 별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아직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해요.
이은주 결혼하면 어떤 남편이 될 것 같은가요?
박형준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마치 장모님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인데요.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가 될 것 같아요. 요즘 <아빠! 어디가?> 같은 프로그램도 있잖아요. 친구 같은 아빠? 자, 이만하면 따님을 주시겠습니까?(일동 웃음)
이은주 아빠로서 말고 남편으로서요.
박형준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는데 예리하시네요. 이런 장모님 만나면 안 되는데. 사랑이 가장 기본이죠. 사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은 것 같아요.
이은주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상대를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는 자기 인생에 대한 성실함이에요. 오랫동안 연기 하나만 해오신 형준 씨는 그런 면에서는 합격점이니까 본인이 의지만 갖는다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박형준 좋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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