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작고한 세계적인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곡들을 엮고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보디가드>(1992)를 무대화한 주크박스 무비컬 <보디가드>가 오는 12월 5일 런던 개막을 앞두고 열기를 몰아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대에서 만날 수 없는 대가수의 인기곡을 들으며 추억 속 인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이번 무대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수해 온 흑인 스타 헤더 헤들리(Heather Headley)의 활약으로 프리뷰 기간에도 주말에는 매진 사례를 이루기 시작했다. 원작 영화는 1992년에 4억 달러가 넘는 입장 수익으로 세계 영화 흥행 성적 2위를 차지했고, 사운드트랙 음반은 무려 4,5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한 올 타임 베스트셀러이다. 그래서 원작 영화의 스토리를 따르고 영화의 삽입곡인 ‘I Will Always Love You’, ‘I Have Nothing’, ‘I`m Every Woman’ 등을 비롯해 총 열다섯 곡에 달하는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곡을 뮤지컬 넘버로 이용한 신작 뮤지컬 <보디가드>는 몬스터 히트 뮤지컬을 꿈꾸고 있다.
휘트니 휴스턴의 추모 공연이 아니다
영화 <보디가드>를 뮤지컬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이는 프로듀서 마이클 해리슨이다. 그는 뮤지컬 <보디가드>가 휘트니 휴스턴의 추모 공연이 아니라 스토리 라인이 제대로 있는 ‘북 뮤지컬(Book Musical)’임을 강조한다. 원작 영화에서 휘트니 휴스턴은 자기 자신으로 출연한 것이 아니라 레이첼 매론이라는 가상의 디바를 연기했고, 보디가드인 프랭크 역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명 영화를 뮤지컬화한 이번 작품에서도 여주인공 헤더 헤들리가 연기하는 것은 휘트니 휴스턴이 아니라 영화 속의 인물인 레이첼 매론이라는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을 엮어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임은 사실이지만, 관객들이 헤더 헤들리에게서 대적하기 힘든 대형 가수 휘트니 휴스턴을 기대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프로듀서의 기우가 엿보인다.
무비컬인가, 노래가 있는 연극인가
뮤지컬 <보디가드>는 원작 영화의 스토리를 충실히 따라간다. 그래미상을 여섯 번이나 받은 여가수이자 배우인 레이첼 매론이 스토커의 협박 편지를 받고 나서, 대통령 경호원 출신의 프랭크 파머를 보디가드로 기용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레이첼의 언니이며 레이첼과 함께 노래를 만들지만 늘 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니키 매론의 역할을 수정해, 그녀가 처음부터 프랭크를 두고 동생과 일종의 삼각관계를 이루는 점이 달라졌다. 또한 원작 영화에서는 질투에 눈이 먼 니키가 킬러를 고용해 동생 레이첼을 살해하려다가 문제가 복잡해지는데, 뮤지컬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 대신 스토커의 역할을 확대해 공수 부대 출신의 스토커가 처음부터 끝까지 레이첼을 위협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전체적으로 영화보다 간결해진 스토리는 대사 위주로 전개되면서 빠른 속도감을 자랑한다.
음악은 레이첼이 리허설이나 콘서트를 하는 장면, 그리고 레이첼과 니키가 프랭크에 대한 연정을 홀로 노래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Queen of the Night’로 화려하게 첫 장면을 장식할 때나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One Moment in Time’을 부르는 장면에서 헤더 헤들리는 그녀의 탁월한 노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객석에서 터지는 우레 같은 박수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니키 역의 데비 커럽이 바에서 그랜드 피아노 반주에 맞춰 ‘Saving All My Love for You’를 부르는 순간에는 애절한 색소폰 솔로 연주와 또 한 명의 훌륭한 뮤지컬 가수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만을 이용해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래는 주인공 레이첼과 언니 니키만이 부른다. 그리고 어린 아들 플레처가 레이첼이 리허설 하는 동안 노래를 따라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플레처는 엄마, 이모와 삼중창으로 ‘Jesus Loves Me’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세 명을 제외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단 한 장면, 가라오케에서 여자 손님들이 ‘How Will I Know’를 부르고, 같은 장소에서 프랭크가 레이첼 앞에서 부르기 싫은 노래(‘I Will Always Love You’)를 읊조리듯 불러서 웃음을 자아낼 때가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외에는 주인공 프랭크는 물론이고, 레이첼의 스토커와 경호원, 프로듀서, 홍보 담당자, 안무가 등 10여 명에 달하는 조연들이 노래를 전혀 하지 않으며, 물론 춤도 추지 않는다. 춤을 추는 이는 리허설과 콘서트 장면에서 백 코러스와, 막간에 등장하는 살사댄스 커플뿐이다. 그래서 아서 피터의 안무는 철저하게 쇼 안무에 국한되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에서야 비로소 모든 배우들이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는 진정한 뮤지컬의 순간을 맞는다. 영화에 근거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면서도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대사만 하기 때문에, 뮤지컬 <보디가드>는 형식적으로 무비컬이라기보다는 노래를 대거 삽입한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노래가 무려 열다섯 곡으로 음악의 비중으로만 보면 이 작품을 뮤지컬이라고 하는 데 이견이 없겠지만, 전형적인 뮤지컬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은 변종으로, 제작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몬스터’ 뮤지컬인 것은 확실하다.
속도감 있는 드라마 전개와 다채로운 색채의 연출
남자 주인공의 노래를 포기하는 이례적인 결단은 어쩌면 현명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짧고 재치 있는 대사만을 이용해 속도감 있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디바 레이첼은 갑자기 자기 일상에 침입한 보디가드 프랭크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당연히 그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이 때문에 그녀의 언니인 니키가 조사를 위해 프랭크를 돕게 되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 과정이 간단한 대사만으로 매우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예를 들어, 취미 삼아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니키의 미니 콘서트를 찾아간 프랭크와 그녀가 마주앉아 짧게 주고받는 몇 마디 대사를 통해 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솟아나는 과정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또한, 레이첼의 연예 활동에 관련된 수많은 인물들과 프랭크가 스토커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노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은 연극적인 생략과 암시로 절도 있게 진행된다. 대본을 맡은 알렉산더 디넬라리스는 극작가로서의 짧지 않은 경력과 뮤지컬 <자나 돈트!> 등의 오프브로드웨이의 경험을 살려, 매우 재치 있는 대사와 경제적인 스토리텔링을 자랑하는 뮤지컬 대본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여류 연출가 테아 샤록의 세심하면서도 연극성이 발휘된 연출이 더해져 극적 완성도가 높아졌다.
영국의 국립극장과 글로브극장 등에서 연극을 주로 연출해온 테아 샤록은 상황에 따라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순간을, 또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불안의 순간을 능숙하게 교차시켰다. 레이첼이 리허설 중에 아들 플레처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아들의 방에서 홍보용 사진을 고르는 장면, 통나무집에서 온 식구가 앉아 ‘Jesus Loves Me’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는다든지 아주 편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다든지 하는 세심한 설정을 통해 따스하고 행복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옆에 서서 이를 흐뭇한 듯 바라보는 프랭크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관객들에게 이 남자가 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리라는 확신을 준다. 반면, 스토커가 훔쳐온 레이첼의 빨간 드레스 조각을 아무 말 없이 매만지거나, 훔친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총을 꺼내는 장면 등은 대사나 노래 없이 침묵만으로 객석에 섬뜩한 두려움을 끼얹는다. 사랑이 싹트는 장면의 연출도 노련미가 넘친다. 니키와 프랭크가 바에서 마주 앉아 다정한 감정을 키우거나, 레이첼과 프랭크가 가라오케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는, 앙상블 배우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장난 어린 대사를 치고받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노래, 즉 뮤지컬 넘버를 연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란함도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한 곡의 노래에 여러 가지 연극적 상황이 삽입되면서, 노래의 톤이 다채롭게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라오케에서 레이첼이 정체를 숨기고 프랭크의 친구 ‘폴라’로서 자신의 인기곡인 ‘I Have Nothing’을 부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레이첼이 하기 싫은 듯 정체를 들킬까봐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시작했다가, 손님들의 반응을 의식하면서 조금 억눌린 열창을 시도한다. 손님들이 그녀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듯 마음 놓고 목청을 높였다가, 끝에 가면 손님들과 하나가 되어 신나는 합창으로 발전한다. 2막의 시작에서 레이첼이 프랭크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침대 가에 앉아 부르는 ‘All the Man That I Need’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속삭이듯 피아노 반주만으로 시작했다가, 간주 부분에서 언니 니키가 방에 들어와 프랭크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속상해하는 모습이 갈등을 예기한다. 이내 무대는 스튜디오로 전환되고, 노래의 뒷부분은 녹음실에서 있는 대로 목청을 높인 열창으로 마무리된다. 노래가 끝나면 녹음실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뭐에 씌었나?’ 하고 대사를 칠 정도로, 열정이 가득 담긴 보이스를 선보인다.
이동 막을 이용해 순간 전환이 돋보이는 무대장치
다채로운 분위기를 띠며 속도감 있는 연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동 막을 이용한 팀 해틀리의 순간 전환 무대이다. 그는 쪽 나무 모양의 패턴을 살린 고동색의 대형 막들을 상하좌우로 겹겹이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마술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아래위로, 그리고 양옆에서 막이 움직이면서 닫히다가 정지하면 그 순간 창문 크기의 작은 프레임이 형성되고, 그 속에 담긴 배우의 모습이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러한 졸보기 효과, 또는 반대로 막들이 모두 열리면서 프레임이 점점 확대되어 무대 전체가 드러나는 확대경 효과를 이용하여, 마치 무성 영화에서처럼 새로운 장면들이 시작되고 끝이 난다. 무대 앞에서부터 뒤쪽까지 상하좌우 네 겹으로 만들어진 이동 막들은 배우들이 무대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움직여, 무대의 다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는 방식으로 간편한 무대 전환을 가능케 한다. 프리뷰 기간에 이 장치가 정지하는 무대 사고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니, 단순해 보이지만 기술적으로 수월치 않은 무대임은 분명하다.
<보디가드>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한 팀 해틀리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면서 연극적 해석력을 키워왔고, 웨스트엔드에서는 <슈렉>, <스팸어랏> 등을 통해 컬러풀한 색감을 발휘한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간결한 이동 막과 조명으로 다양한 연극적 효과를 발휘했다. 예를 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레이첼의 스토커가 작은 프레임 속에 나타날 때,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앵글을 사용해 그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정수리만 보여줌으로써 정체불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강화시킨다. 비디오 디자이너 던컨 맥클린의 프로젝션 이미지들도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상상 장면이나 추억 장면에서 레이첼의 클로즈업 사진이나 동영상 이미지를 콜라쥬 형식으로 이동 막 위에 투사해 독특한 세련미를 보여주었다.
파워풀한 명곡들을 열창으로 재현하는 헤더 헤들리
뮤지컬 <보디가드>의 일등 공신은 역시 헤더 헤들리일 것이다. 캐스팅이 발표될 때부터 <라이온 킹>과 <아이다>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헤로인이었던 헤더 헤들리의 출연은 큰 화제를 모았다. 영국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이지만, 프리뷰를 시작하자마자 그녀의 독보적인 가창력과 카리스마는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며 장안의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단 어려움이 있다면, 두 시간 반여의 공연에서 두어 곡을 제외하고 모든 노래를 그녀 혼자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체력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역할이다. 그래서 <라이온 킹> 영국 프로덕션의 헤로인이었던 글로리아 오니티리가 월요일을 비롯한 일부 공연에 나누어 출연하고 있다. 글로리아 오니티리 역시 탁월한 가창력을 자랑하지만, 디바를 연기하기에는 존재감이 다소 부족하다. 헤더 헤들리가 차갑고 도도한 디바에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때론 카리스마 있는 가수로 능숙하게 변신하는 팔색조 같은 배우라면, 글로리아 오니티리는 안정적인 가창력과 연기력을 지녔지만 애교나 농염함이 없는 무난한 배우이다. 그래서 헤더 헤들리는 이번 무대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레이첼 매론에 못지않은 대표 디바로 성장할 듯하다.
뮤지컬 <보디가드>는 휘트니 휴스턴이 연기했던 레이첼 매론으로 빙의되어 그녀의 명곡들을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재현한 헤더 헤들리의 매력으로 성공을 약속받은 듯하다. 보디가드 프랭크 역의 로이드 오웬이 케빈 코스트너의 매력을 따라가지 못해 아쉽지만, 영국의 주요 연극 무대에서 다져온 연기력과 호소력 있는 보이스 컬러로 무난한 점수를 받을 듯하다. 또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이례적인 설정이 뮤지컬 애호가에게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러나 뮤지컬 <더티 댄싱>이 남녀 주인공 모두가 노래를 하지 않고 춤만 추는데도 몇 년간 런던에서 대성공을 누렸던 사실을 고려하면, 뮤지컬 <보디가드> 역시 원작 영화의 인기와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스타 헤더 헤들리의 열창에 힘입어 중년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한 인기 뮤지컬로 자리잡을 듯한 예감이 든다. 뮤지컬 <보디가드>의 공식 개막은 12월 5일로, 런던 아델피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11호 2012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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