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연출가, 안무가, 프로듀서, 마케팅·홍보 담당자 이외에도 한 편의 공연이 무대에 올라 관객을 만나기까지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공연 시장이 커지고 작품의 성격이 다양해지면서 공연계에 필요한 직업군도 점차 세분화되어 왔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직업인 캐스팅 디렉터와 동물 배우 조련사를 통해 공연 작품의 틈새를 메우는 전문가들을 만나본다.
공연계의 틈새 직업의 세계
한 편의 공연을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스태프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한다. 큰 그림에서 공연의 제작 스태프를 살펴보면, 프로듀서와 기획자, 마케팅 담당자 등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파트와, 작가 및 연출가, 안무가, 디자이너 등 크리에이티브 영역을 담당하는 창작 스태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두 파트가 동시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작품의 개발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분화된 작업만으로 한 작품이 바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듀서로 대표되는 비즈니스 진영과 작가, 연출가로 대표되는 창작진의 합의가 필요한 수많은 사안 중 가장 중대한 문제가 바로 캐스팅이다. 그리고 이 두 파트 사이에서 의견을 모으고 전문적인 컨설팅을 제안하는 사람이 바로 캐스팅 디렉터이다. 캐스팅 디렉터는 말 그대로 공연이나 영화, TV 프로그램 등의 캐스팅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않은 직업이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이미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1982년 조직된 미국 캐스팅 디렉터 협회(Casting Society of America)에 영화와 TV, 공연계에서 활약하는 350여 명의 전문 캐스팅 디렉터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사람 못지않은 연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동물 배우를 조련하는 전문가 역시 공연계는 물론 다양한 매체에서 꼭 필요한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브로드웨이 캐스팅 디렉터의 세계
캐스팅 디렉터의 업무는 대개 의뢰받은 작품의 대본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작품을 개발해온 프로듀서와 작가, 연출가의 요구와 생각을 최대한 반영하며 배우를 찾되, 경우에 따라 캐스팅 디렉터의 신선한 제안이 작품의 항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작품의 장르와 성격에 따라 캐스팅 과정은 다소 달라진다. 연극과 뮤지컬, 신작과 리바이벌,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 등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단지 작품의 내용이나 음악만이 아니다. 캐스팅 디렉터는 프로듀서와 창작진의 요구에 적합한 배우들을 찾아내어 추천하고, 이들은 이 리스트로부터 선택의 폭을 좁혀 나간다.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이 오디션을 거쳐 대다수의 배우를 선발하지만, 작품의 특성에 따라 캐스팅 디렉터의 신선한 접근이 요구되는 작품도 있다.
<헤어스프레이>와 <인 더 하이츠>, <남태평양>, <위키드>, <넥스트 투 노멀> 등 수많은 작품에 참여해 온 브로드웨이의 베테랑 캐스팅 디렉터인 버나드 텔시(Bernard Telsey)는 자신의 작품 중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막을 올렸던 <렌트>의 캐스팅 과정을 가장 흥미진진했던 도전으로 손꼽는다.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네덜란더 씨어터로 자리를 옮겨 12년 넘게 공연된 <렌트>는 그의 첫 번째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창작자인 조나단 라슨과 연출가 마이클 그라이프의 요구가 매우 구체적이고 특별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로큰롤 보이스의 젊은 배우들을 원했고, 작품의 특성상 배우의 인종이 반영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유명 작가가 아니었던 조나단 라슨의 작품, 그것도 브로드웨이가 아닌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위해 창작진들이 배우를 바로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영리 공연 단체에서 공연한 이 작은 프로덕션에는 전국을 돌며 오디션을 할 만큼의 예산은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캐스팅 방법에서 다소 선회하는 쪽을 택했다. 공연장과 오디션 장에서 배우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텔시는 젊은 층이 즐겨보는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에 록 스타가 되고 싶은 배우를 찾는 광고를 실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적처럼 아담 파스칼(로저 역)을 찾아낼 수 있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3일 전에 캐스팅이 이루어진 극적인 순간이었다. 조나단 라슨은 텔시에게 배우를 찾는 데 명확한 비전과 동시에 유연한 테두리를 함께 제시했다. 엔젤 역은 백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에게 열어두었고, 미미 역시 배우의 인종에서는 선택의 폭을 넓혔다. 작가로서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되, 캐스팅 디렉터의 역량을 믿고 기다려준 것이다. 조나단 라슨과 마이클 그라이프는 배우들과 함께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그들에 맞게 캐릭터를 수정·보완해 갔다. 예를 들어, 원래 백인 캐릭터로 설정되었던 콜린 역은 텔시가 추천한 배우 제시 마틴의 캐스팅이 결정되면서 흑인으로 수정되었고, 아이디나 멘젤이 연기한 모린 역시 개발 단계에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였다. 오리지널 캐스트가 의미를 지니는 지점이다.
흥행 작품의 경우 수년간 공연을 지속하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오리지널 캐스트를 대체할 리플레이스먼트 배우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은 과정이다. 오리지널 캐스트의 발굴이 대본과 음악 위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라면, 리플레이스먼트 배우의 캐스팅은 이미 완성된 캐릭터를 이어 나갈 새로운 배우들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작업이다. 캐스팅 과정은 오리지널 캐스트가 완성한 캐릭터를 기준으로 하여, 대개 오디션 형태로 진행된다. 흥행 작품은 브로드웨이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투어 프로덕션과 라이선스 프로덕션의 캐스팅까지 함께 진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에, 오디션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간혹 원작의 연출가가 다른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 각 프로덕션의 협력 연출이 캐스팅 디렉터와 함께 오디션을 진행하기도 한다.
캐스팅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또 한 명의 브로드웨이 대표 캐스팅 디렉터인 타라 루빈(Tara Rubin)은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 투자 유치와 공연장 확보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법(How to Succeed in Business without Really Trying)>에 참여할 당시,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출연 결정은 작품 제작에 큰 호재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당초 오프브로드웨이 프로덕션으로 기획되었던 <온 어 클리어 데이 유 캔 시 포에버(On a Clear Day You Can See Forever)>의 경우, 해리 코닉 주니어의 합류가 결정되면서 브로드웨이로 항로를 전격 변경하기도 했다. 스타의 이름만으로 투자 유치와 극장 대관의 난관이 한결 수월해지는 것은 브로드웨이나 우리나라의 공연계나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버나드 텔시는 줄리아 로버츠와 주드 로 같은 할리우드 스타를 캐스팅할 때의 핵심은 배우가 얼마나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영화나 TV 프로그램에 비해 금전적인 보상이 높지 않으며, 일주일에 8회의 라이브 공연을 감행해야 한다는 점은 무대가 익숙하지 않은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작품의 성격에 적합한 배우라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무대의 특성과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사전에 꼼꼼하게 확인하는 일 또한 캐스팅 디렉터의 몫이다.
이렇듯 작품에 따라 캐스팅 디렉터에게 다른 역할이 요구된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나 <아메리칸 이디엇>처럼 신선한 신작의 경우, 캐스팅 디렉터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는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이미 잘 알려진 리바이벌 작품이나 특히 연극의 경우에는 스타 배우의 기용이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따라서 캐스팅 능력은 상당 부분 경험과 인맥에 기대어 있다. 뉴욕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배우들의 행보에 늘 관심을 갖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액터-뮤지션 뮤지컬’ 컨셉을 도입했던 연출가 존 도일의 리바이벌 프로덕션 <스위니 토드>와 <컴퍼니>의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버나드 텔시는 기성 배우 중 악기 연주가 가능한 사람들을 수소문했으며, 음악 학교를 찾아다니며 연주자 중 노래와 연기가 가능한 사람들을 발굴하고자 노력했다. 캐스팅 디렉터들은 최근의 경향 중 하나인 TV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가능성 있는 신인 배우를 찾아내기도 하고, 유튜브 동영상 등에서 화제가 된 사람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캐스팅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캐스팅 디렉터는 프로듀서와 창작자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할 배우를 발굴하고 캐스팅의 전 과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문화예술계 전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공연계를 지키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무대를 빛내는 동물 배우 그리고 조련사
<애니>와 <오즈의 마법사>, <금발이 너무해>.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실제 동물이 직접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극의 진행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는 이들 동물 배우들은 인형이나 분장, 특수 효과를 통한 눈속임으로 대체될 수 없다. 영화나 TV, CF에 등장하는 동물 배우들과 달리 라이브로 공연해야 하는 무대 위 동물 배우들이야말로 고도로 훈련된 전문 배우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훈련하고 무대에 세우는 일 또한 이미 전문화된 직업이다. 동물 배우 조련사 윌리엄 벨로니(William Berloni)는 30년 넘게 브로드웨이는 물론 다양한 매체에 출연하는 동물들을 트레이닝 해온 전문가다. 지난 2011년에는 토니 어워드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한 벨로니는 오랜 세월 동안 브로드웨이에서 꼭 필요한 전문 스태프로 명성을 이어왔다. 1976년에 그가 처음 조련해 뮤지컬 <애니>의 무대에 올랐던 샌디 역의 강아지는 무려 7년간이나 공연을 이어갔는데, 현재까지도 가장 오랫동안 한 역할을 공연한 동물 배우로 기록되어 있다.
무대 위에서 실제 동물 배우를 기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제작비가 소요된다. 동물 배우들의 트레이닝 과정은 물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공연 시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야 하고, 대개의 동물 배우들이 언더스터디를 따로 두고 있기에 동물 배우의 출연은 여간 까다로운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비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많은 프로덕션이 의상이나 소품 등으로 동물 배우를 대체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관객들은 물론 배우들까지도 작품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들이 직접 무대에서 연기해주기를 원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와 동물 배우의 완벽한 호흡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라이브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벨로니는 자신의 역할이 단순히 공연을 위한 동물 배우들을 발굴하고 트레이닝 하는 것 이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대본을 통해 작가들이 동물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해주기 원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것이 실제 무대에서 가능하도록 그들과 함께 고민한다. 간혹 영화나 TV 프로그램에서는 카메라 워크와 편집을 통해 가능한 장면이 공연에서는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가령, 영화 <금발이 너무해>에서 주인공 엘 우즈의 강아지 브루저가 나쁜 사람을 보며 짖는 장면을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와 달리 조련사가 직접 카메라(무대) 뒤에서 동물 배우에게 큐 사인을 주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벨로니는 배우가 직접 조련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전문 조련사는 동물 배우들의 트레이닝뿐만 아니라 배우와 동물 배우 사이의 의사소통 방법을 가르치는 일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일 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동물 배우 조련사는 무대 뒤에 머물며 그들의 호흡을 지켜보고 조율한다.
동물 배우 조련사는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정식 라이선스와 보험 가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공연계 전문직 중 하나이자, 동물과 무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다. 특히 윌리엄 벨로니가 조련한 동물 배우들이 모두 유기 동물이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버려진 동물을 입양해 무대 위에서 톡톡히 제 역할을 해내는 훌륭한 배우로 트레이닝 하고 관리하는 벨로니는 브로드웨이의 숨은 공로자가 아닐 수 없다.
뮤지컬의 좋은 대본과 음악이라는 재료는 연출을 비롯해 안무, 디자인 등 수많은 요소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편의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하지만 공연은 무대 위 배우와 관객이 함께 교감하고 호흡하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캐릭터를 완성하는 배우를 찾고 트레이닝 하여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 캐스팅 디렉터와 동물 배우 조련사야말로 프로듀서와 창작자, 그리고 관객을 이어주는 꼭 필요한 공연 전문 스태프들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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