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진 켈리가 우산을 접어들고 비를 흠뻑 맞으며 흥겹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으로 유명한 1952년 MGM사의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이 신작 뮤지컬로 탄생하여 지난 2월 16일 웨스트엔드에서 개막했다. 물줄기로 흠뻑 젖은 팰리스 극장의 대형 무대 위에 노란 비옷을 입은 주인공들이 장난스레 물장구를 치는 <싱잉 인 더 레인>은 빗속의 낭만과 웃음이 가득한 뮤지컬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영국의 유명 발레리노이자 안무가인 아담 쿠퍼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춤과 노래까지 선사하여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주제곡 ‘Singin` in the Rain’ 외에도 ‘Make`em Laugh’, ‘Good Morning’ 등 귀에 익은 나시오 허브 브라운과 아서 프리드의 명곡들이 가득한 이번 무대는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의 영화 대본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원작에 충실한 뮤지컬이다. 영국의 지역 극장인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에서 제작하고, 예술감독인 조나단 처치가 직접 연출을 맡았다.
웨스트엔드의 무비컬
<싱잉 인 더 레인>은 최근 또 다른 추억의 명화 <러브 스토리>를 뮤지컬로 제작했던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가 두 번째로 선보이는 무비컬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역시 치체스터 지방에서 첫선을 보인 후 크게 인기를 얻어, 상업 지대인 웨스트엔드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장기 공연에 돌입했다. 유명 영화를 뮤지컬로, 또는 유명 뮤지컬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본격화되던 20세기 중반부터 이미 활발히 진행되던 일이다. 그리나 2000년대 이후, 웨스트엔드의 사전 제작비가 60억 원을 호가하게 되면서, 위험 부담이 큰 신작 뮤지컬보다는 유명 밴드의 음악을 이용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나 기존 영화의 유명도에 의존하는 무비컬이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지난 10년간 웨스트엔드에는 <메리 포핀스>(2004), <빌리 엘리어트>(2005), <더티 댄싱>(2006), <플래시 댄스>(2008), <시스터 액트>(2009) 등에 이어, 작년에 오픈한 <사랑과 영혼(Ghost)>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기초한 뮤지컬 작품 수가 상당히 많아졌다.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는 지역 극장으로는 보기 드물게 원작 영화의 라이선스 비용 때문에 제작비가 만만치 않은 무비컬 제작에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다.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은 원작이 영화일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흑백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토키, Talkie)로 넘어가던 전환기의 할리우드를 소재로 하고 있어, 영화와 인연이 많은 작품이다. 무성 영화계의 스타 배우인 돈 로크우드(아담 쿠퍼 분)가 대외 홍보 측면에서 연인 관계에 있는 상대 여배우 리나(캐서린 킹슬리 분)를 버리고, 그녀의 목소리 연기를 하는 얼굴 없는 무명 배우 케이시 셀든(스칼렛 스트랄렌 분)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뮤지컬 코미디이다. 옛날 할리우드 촬영장의 코믹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영화계의 왕자님이 숨겨진 무명의 여배우를 사랑하게 되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전개되고, 추억의 명곡과 화려한 무용 장면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지난 호에 소개한 <크레이지 포 유>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코미디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들, 귀에 남는 명곡, 화려한 춤과 러브 스토리를 적절히 겸비한 흥겨운 엔터테인먼트 공연이라 할 수 있다.
아담 쿠퍼의 매력
이번 <싱잉 인 더 레인> 무대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남자 주인공 돈 역을 맡은 아담 쿠퍼의 맹활약이다. 매튜 본이 안무한 남성판 <백조의 호수>의 주역으로 유명해진 아담 쿠퍼는 세계적인 발레리노이다. 1987년부터 로열발레무용단에서 8년간 활약했으며,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에 성장한 빌리가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에 출연했던 바로 그 무용수이다. 최근에는 안무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뮤지컬 <회전목마>와 <사이드 바이 사이드 바이 손드하임>의 런던 프로덕션의 안무를 맡았다. 2004년 런던의 새들러즈 웰즈에서 공연되었던 또 다른 버전의 무대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에서 안무가로 활약했던 그가, 이번 웨스트엔드 프로덕션에서는 주인공으로 전격 출연하여 숨은 노래 실력과 연기력까지 발휘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 무대 위에 흠뻑 젖은 채, ‘Singin` in the Rain’을 부르며 탭댄스를 추는 그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할 만하다. 장난꾸러기처럼 물장구를 치면서 객석에 마구 물을 튀기는 그의 태도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가득하다. 케이시 역의 스칼렛 스트랄렌과 함께 부르는 듀엣곡 ‘You Were Meant for Me’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 선율에 따라 모던 발레 스타일의 화려한 스핀과 리프트를 멋지게 선보인다. 돈의 친구인 코스모(다니엘 크로슬리 분)까지 합세한 트리오 ‘Good Morning’에서는 신나는 탭댄스를 선보이며 경쾌한 분위기를 한껏 연출한다. 그리고 코스모, 발성 코치와 함께 남성 트리오를 이루어 부르는 ‘Moses Supposes’는 한국말로 하면 ‘간장공장 공장장님은’ 하는 식의 발음 연습용 구절들을 코믹하게 읊조리는 신나는 곡으로, 전형적인 뮤지컬 선율에 맞추어 아담 쿠퍼가 원 없이 탭댄스 기교를 선보여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팔을 마구 휘두르며 온몸으로 탭댄스를 추는 세 남자가 멋지게 마무리 동작을 하면 객석에서는 그야말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진다. 발레를 전공한 아담 쿠퍼의 스타일에 맞게 모던 발레 동작을 활용한 안무가 많은 이번 공연은 작년에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안무로 호평을 받았던 앤드루 라이트의 세미 클래식한 춤 동작들과 다양한 탭댄스 장면들이 추억의 팝송과 훌륭하게 어울리며, 아담 쿠퍼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경쾌하고 스펙터클한 볼거리
이외에도 앤드루 라이트의 안무 실력과 조나단 처치의 유머 감각이 발휘된 컬러풀한 코러스 장면들이 즐비하다. 코스모가 리드하는 1막 중간의 뮤지컬 넘버 ‘Make`em Laugh’는 빠르고 경쾌한 선율과 함께 코믹한 마임과 벽을 부수는 묘기까지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순간을 선사한다. 곧바로 그 뒤를 잇는 ‘Beautiful Girls’는 케이시를 비롯한 아홉 명의 여배우들이 빨간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 모형 위에 앉아 네 명의 남자 파일럿들과 함께 화려한 무용을 선보이는 뮤지컬 넘버로, 모던 발레 동작과 뮤지컬 스타일 무용이 잘 뒤섞인 화려한 댄스 넘버이다. 또한, 2막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Good Morning’ 리프라이즈는 영화사 리셉션의 안내 아가씨 여러 명이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다가 전화 줄이 마구 꼬이는 코믹 효과를 내면서 서류를 들고 탭댄스를 추는 오피스 보이들과 앙상블을 이루어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영화 스튜디오에서 코스모가 프랑스 혁명과 브로드웨이 배우가 만나는 어이없는 대서사시를 한 편의 뮤지컬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하며 부르는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노랑, 초록, 분홍, 자주색 등 형형색색의 의상을 입은 코러스 16명이 무대를 꽉 채우며 신나는 무용 장면을 연출한다. 섹시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잠깐 출연해 재즈 선율에 맞춘 멋진 춤을 선사하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곡의 끝부분에 이르면 하얀색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돈과 케이시가 스모크가 가득 뿌려진 무대 위에 멋지게 등장하고, 전 출연진이 함께 펼치는 탭댄스의 향연으로 화려하게 마무리 된다.
무성 영화 시대를 재현한 신선한 연출
이렇게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은 아담 쿠퍼를 기용한 덕분인지, 원작 영화의 명곡들을 댄스 넘버로 한껏 활용하려는 의도인지, 공연 내용에서 살짝 벗어난 화려한 무용 장면이 상당히 많다. 단순한 러브 스토리를 줄기로 하여 영화 제작과 관련한 상상 장면들과 촬영장에서의 코믹 에피소드가 적극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맥락에서 벗어난 스펙터클이 생뚱맞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화려한 코러스 장면들은 수시로 행복한 볼거리를 선사하고, 흑백영화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장면들은 남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아담 쿠퍼와 캐서린 킹슬리가 모차르트가 썼을 법한 가발과 화려한 고전 의상을 입고 과장된 액션으로 연기하는 흑백 무성 영화 <결투하는 기사님(The Duelling Cavalier)>의 시사회 장면은 영상을 만든 윌리엄 갤러웨이의 유머 감각과 두 배우의 코믹 연기로 빛을 발한다. 시사회가 끝나고 화면상에 우아한 공주님으로 등장했던 리나가 실제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매우 거슬리는 하이 톤의 비음에 심한 브롱크스 악센트까지 섞인 목소리가 폭로되면서 큰 웃음을 자아낸다. 리나 역의 캐서린 킹슬리는 공연 내내 신경질적인 하이 톤을 유지하며 열연을 펼친다. 특히 그녀가 자기 목소리가 뭐가 이상하냐며 부르는 솔로곡 ‘What`s Wrong With Me’를 부르는 순간까지 과장된 고음을 유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객석에서는 동정과 웃음이 섞인 박수가 크게 터지기도 했다. 이렇게 저주받은 목소리를 가진 리나가 처음으로 촬영 시 음성 녹음을 시도하는 장면에선 마이크를 어디에 설치해야 할지 몰라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신선한 재미를 준다. 마이크를 화분 뒤에 심어 놓으니 리나가 자꾸 어색하게 고개를 화분 쪽으로 향하고, 또 리나의 드레스 소매에 달아 놓으니 상대 역인 돈이 리나의 팔만 쳐다보고 대사를 쳐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할 순간에 대신 드레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잡음만 크게 들리도록 했는데, 녹음 기술이 초보 단계이던 20세기 초의 상황을 현대 음향 기술을 이용해서 연출한 것이 새삼스레 신기하기도 하다, 또한 듣고 있기 민망한 리나의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미성의 케이시의 노래로 더빙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목격하는 순간은, 같은 화면을 보는데 목소리만 달라졌을 때 얼마나 큰 매직 효과를 불러오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해 흥미진진했다. 여주인공 케이시 역의 스칼렛 스트랄렌의 미성은 극의 설정상 특별히 더욱 돋보였다. 그녀가 부르는 솔로곡 ‘Your Are My Lucky Star’는 매우 로맨틱한 선율을 따라 발휘되는 풍성한 미성이 지저귀는 플루트의 소리와 어울려 무척 아름답게 들렸다.
이번 공연은 최고의 무용 실력을 자랑하며 뮤지컬 배우로 거듭난 아담 쿠퍼의 기용, 세기의 명곡에 맞추어 세미클래식한 안무를 선보인 앤드루 라이트의 안무력, 그리고 시종일관 장난기를 놓치지 않고 화려한 장면을 속도감 있게 연출한 조나단 처치의 연출력이 좋은 앙상블을 이루었다. 한순간도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하는 코믹한 설정이 재미있고, 향수 어린 흑백영화의 영상이 즐겁고, 거기에 어우러진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와 명장면을 제공하는 탭댄스의 향연이 스펙터클하다. 그래서 전 출연진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커튼콜의 순간이 되면, 팰리스 극장은 관객들이 우르르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는 감동에 젖는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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