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 귀환한 왕들 ‘휴 잭맨 Vs 해리 코닉 주니어’
한 시대, 한 장소에 두 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별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지금 브로드웨이에선, 돌아온 뮤지컬 스타들인 휴 잭맨과 해리 코닉 주니어가 일방통행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이 전쟁의 결과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필자가 평가하는 바로는, 배우 개인적으로는 휴 잭맨이, 작품적인 면에서는 해리 코닉 주니어가 이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휴 잭맨이 공연하고 있는 <휴 잭맨 : 백 온 브로드웨이>는 말 그대로 휴 잭맨의, 휴 잭맨에 의한, 휴 잭맨을 위한 무대다.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뮤지컬들의 유명한 장면과 넘버들을 가져와 갈라 형식으로 보여주며 그는 자신이 가진 끼와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반면, 해리 코닉 주니어는 앨런 제이 러너(Alan Jay Lerner)의 뮤지컬 <온 어 클리어 데이 유 캔 씨 포에버>(이하 <온 어 클리어 데이>)라는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홍보물에 제목만큼이나 크게 그의 이름을 적어 놓고, 포스터조차 독집 앨범 재킷 같은 사진으로 만들어, 무엇이 주가 되는지 홍보물만으로는 알쏭달쏭하다. 결국 브로드웨이도 스타 마케팅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일까?
휴 잭맨은 노래를 참 잘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 입장에서 출발하다보니 어떤 역할로 변신을 하든지 멋있게 보인다. 한편, 세 차례의 그래미상, 두 차례의 에미상을 받은 해리 코닉 주니어는 ‘음악가’의 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연기적인 디테일은 조금 떨어지는 듯 하지만 노래를 할 때 뮤지션 특유의 느낌이 참 좋다.
두 작품이 최근 브로드웨이 화제의 중심에 있지만, 갈라 형태의 <백 온 브로드웨이>보다는 하나의 뮤지컬 작품인 <온 어 클리어 데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최면을 소재로 시공과 성별을 넘나드는 러브 스토리
<온 어 클리어 데이>는 앨런 제이 러너가 대본을, 버튼 레인(Burton Lane)이 음악을 쓴 작품으로 196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1970년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이브 몽탕’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가 주제곡 ‘On a Clear Day’를 비롯해, 현재까지도 재즈 스탠다드 명곡들을 남기며 크게 성공했다. 브로드웨이 세인트 제임스 시어터에서 11월 12일부터 한 달간의 프리뷰를 거쳐 12월 11일에 정식 오픈하여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피터 파넬(Peter Parnell)이 쓰고, 2007년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토니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마이클 메이어(Michael Mayer)가 연출을 맡았다.
배경은 1970년대,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하는 일편단심 정신과 의사 ‘마크 브루크너(해리 코닉 주니어)’는 최면 치료법을 연구 중이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중, 게이 플로리스트인 데이비드 갬블은 최면에 매우 잘 걸리는 사람이다. 사랑과 관계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데이비드와는 달리, 그의 애인 워렌은 책임감도 있고, 데이비드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동거하길 원하고 있다.
심각한 체인 스모커인 데이비드는,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워렌을 위해 담배를 끊고자 최면 치료를 하기 위해 마크를 찾아간다. 최면 치료를 시작하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데이비드 안에는 40년대 여자 재즈 가수 멜린다 웰스라는 인격이 들어있었고, 최면 상태로 빠지면, 데이비드는 완벽한 멜린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매일 저녁 7시, 마크는 데이비드를 통해 멜린다를 보게 되며,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크의 관심사는 이제 데이비드의 치료가 아니라 멜린다를 만나는 것이다. 마크는 웨이트리스였던 멜린다가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그녀의 극적인 데뷔와 커리어의 발전을 모두 지켜보게 된다.
한편, 이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마크가 치료에 열성을 보인다고 믿으면서 좋아하는 현실의 데이비드. 하지만, 마크와 데이비드의 몸을 가진 멜린다가 첫 키스를 하던 날, 데이비드는 최면 상태에서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만다. 그리고 마크가 자신을 좋아해서 키스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 그래도 자꾸 동거하자고 조르는 워렌이 부담스러웠던 차, 데이비드는 마크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믿으면서 그에게 점점 끌리기 시작한다. 이로써, 마크, 멜린다, 데이비드, 워렌의 다소 복잡한 사각관계가 형성된다.
마크는 여러 조사를 통해, ‘멜린다 웰스’라는 여성이 실재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흥분에 휩싸인다. 멜린다는 30년 전 데이비드가 태어나던 날,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고, 그녀는 게이 플로리스트 데이비드로 환생한 것이다.
마크의 동료들은 마크가 환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인물과 사랑에 빠진 미친 의사로 여기고, 결국 데이비드에게 모든 진실을 알린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치료 과정을 녹취한 테이프를 듣게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지루한 남자와, 멋진 여성이 한 몸에 혼재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마크의 목소리에 큰 충격을 받는다.
상처받은 데이비드는 다시는 최면 치료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지만, 마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날은 데이비드의 생일, 곧 멜린다가 죽을 운명의 날이었기 때문에 마크는 그녀의 죽음을 막고 싶었던 것. 결국 데이비드는 마지막 최면에 응하고, 마크는 막 비행기에 오르려는 그녀를 붙잡으며 가지 말라 애원한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고, 운명은 이미 예정된 수순을 향해 달려간다.
최면에서 깨어난 데이비드에게 마크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간의 일을 사과한다. 이제 데이비드는 워렌과 함께하는 것이 두렵지 않고, 마크 역시 죽은 아내에게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환자와 의사가 모두 치료된 것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넘어선 새로운 스타, 제시 뮐러
리바이벌은 관객들에겐 기대치 않은 선물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원작이 너무 훌륭한 경우는 배우 입장에서도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니다. 여주인공으로서 살아있는 팝의 전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아성을 넘지 못한다면, 역할을 맡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특히 ‘극 중 가수’라는 역할은 극 중 변호사, 극 중 의사와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있다. 전문용어가 담긴 대사, 그럴듯한 연기만으론 ‘가수’라는 역할을 표현해내는 것이 어렵다. 말 그대로 ‘전업 가수’처럼, 정말 끝내주는 노래 실력이 있어야만 관객들은 그를 ‘극 중 가수’로 받아들인 뒤, 극에 몰입할 수 있을 테고, 시대적, 음악적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친 창법으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는 것마저도 어렵다. 진짜 가수를 하는 것보다, 가수 역할 하는 배우를 하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필자는 본업이 작곡가인 탓에 음악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편인데, 이 공연을 보면서 여주인공의 노래를 들으며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했다. 노래 한 곡에 목덜미까지 서늘해지는 그 기분이란…! 이 배우의 특별한 목소리 하나 듣는 것만으로도 150불에 달하는 표 값은 그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해리 코닉 주니어가 아닌, 여자 주인공 역의 제시 뮐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테크닉 면에서나 연기 면에서나,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소화해내는 면에서 전설의 선배 바브라의 아성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게이 캐릭터
<스프링 어웨이크닝> 연출을 맡았던 메이어 감독은 이 작품을 브로드웨이로 가져오면서, 큰 모험을 감행했다. 영화에서는 최면을 받게 되는 사람이 데이지라는 여성인데, 브로드웨이에서는 데이비드라는 게이 남성으로 만든다. 데이지를 게이 남성 데이비드로 바꿔 설정함으로써 극에 재미를 더해준다. 덕분에 판타지 로맨스물에서 코믹까지 장르가 확대되었다. 보통, 브로드웨이에서 게이 역할로 출연한다는 것은, 감칠맛 나는 명품 조연을 한다는 의미이다. 현란한 손동작, 날렵한 몸놀림, 특유의 깍쟁이 같은 말투 등 우리의 생각 속에 정형화된 게이 캐릭터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이런 캐릭터들은 주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사실 <온 어 클리어 데이>에 나오는 게이 커플은 그런 캐릭터와는 조금 다르다. 이 뮤지컬에서 게이 커플은 기존에 희화화되고 과장된 면이 있던 게이로서의 기존 이미지를 벗어나서, 꾸준하게 캐릭터 자체로서의 성격을 유지해 나간다. 게이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극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또한, 목소리와 몸의 선에서 남성미가 철철 느껴지는 해리 코닉 주니어와는 확연히 대비되도록, 히피 게이적인 느낌을 표현해 낸 연기가 쉽지만은 않았겠다 싶었다. 극이 끝날 때쯤은, ‘저 배우가 진짜 게이가 아니라면, 연기 천재임에 분명해!’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정형화된 게이들의 사랑보다 그저 한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 다가오면서 이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관계에 관한 두려움과 극복’이란 주제가 잘 다가왔다.
적절한 음악 스타일의 변화와 재기 넘치는 기발한 안무
이번 뮤지컬 버전에는 러너와 레인 콤비의 다른 작품, 영화 <로열 웨딩>에 쓰였던 ‘Too Late Now’가 삽입되어, 마크와 멜린다의 사랑의 테마로 쓰였다. 멜로디는 예전 버전과 다름없지만, 편곡과 전반적인 음악 스타일은 뉴올리언스 재즈 스타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늘 빅밴드 반주에 노래하는 해리 코닉 주니어를 염두에 둔 설정이기도 했겠지만, 여주인공이 그 당시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던 뉴올리언스 재즈 싱어 스타일을 충분히 소화해주었기 때문에 음악 스타일의 변화가 성공적이지 않았나 싶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1막 마지막에 마크와 멜린다, 데이비드 이렇게 셋이 추는 탱고 장면이다. 마크와 멜린다는 함께 춤을 추며 사랑에 빠지는데, 뒤쪽으로 소파가 회전하면서 비몽사몽 최면에 걸린 데이비드가 보이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자연스럽게 멜린다의 그림자가 되어 샌드위치 탱고를 춘다. 누가 환상이고 누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무렵, 음악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음악이 끝나가는 순간, 스텝이 바뀌며 멜린다는 사라지고, 그녀 뒤에 있던 데이비드가 마크와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진한 키스! 깜짝 놀란 관객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헉!’ 하는 소리를 애써 꿀꺽 삼켜내자, 바로 암전. 15분의 충격 완화용 인터미션이 시작된다. 새로운 극작가와 연출자, 참 머리 좋다!
일관성 있는 무대 컨셉의 필요
현지 평단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좋지만,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 첫 번째, 무대가 조금 어지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정신과와 심리 치료라는 키워드를 비주얼화하기 위해서 흑백의 미로 문양을 배경 세트에 적용시킨 모양이었다. 시도는 좋았지만, 기하학적인 문양과 히피 느낌의 학생들, 꽃으로 가득 찬 교실의 컨셉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좀 더 확실하고 중심이 되는 컨셉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배우에 대해서는, 많은 짐이 지워진 해리 코닉 주니어가 연기자로서 그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노래를 할 때마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콘서트용’ 팔 동작은 나중에는 거슬리기조차 했다.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있는 뮤지션 해리 코닉 주니어가 아니라, 뮤지컬 <온 어 클리어 데이>의 마크에 빠져 있는 배우 해리 코닉 주니어가 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건너편에서 공연하는 휴 잭맨은 금색 쫄바지 의상에 마라카스 들고서 삼바 춤을 추고, Ab 음까지 뻥뻥 시원하게 내면서 신나게 뛰어다니는데, 해리 코닉 주니어는 고음 낼 때마다 힘들어 보이고 목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콘서트에서 신나게 피아노 치던 그 에너지와 매력이 100퍼센트 발산되지 않는 느낌이었달까. 그가 내한할 때면 제일 좋은 자리 예약해서 공연 챙겨보고 음반도 모아왔던 팬으로서, 이젠 해리 코닉 주니어가 늙어가나 싶어서 서글프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는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고도 남을 만한 깨알 같은 캐릭터의 조연들과 상대 배우가 있었고, 그들은 그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또한, 그의 존재감은 어쨌든 대단했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디렉션을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과는 또 다른, 자유롭고도 중후한 멋의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해리 코닉 주니어만의 내공인가 싶었다.
놀랍도록 디테일한 연기
서구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디테일’이 살아 숨쉰다. 예를 들면,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숨쉴 때, 어깨를 들썩하는 것까지 그림으로 싱크 시켜주는 그 섬세함! 입 모양과 노래가 정확히 일치하는 정교함! 이런 것을 보고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이는 브로드웨이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온 어 클리어 데이>의 여주인공 멜린다가 바에 앉아서 테이블을 피아노 삼아, 피아노 연주를 흉내 내며 노래를 하는데, 그 놀라운 싱크로율이란! 전체 피아노 스코어의 진행, 느리고 빠름, 강약 조절까지 다 몸으로 외워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모니터를 하면서 배우의 모션을 따라서 치고 있겠지만, 꾸밈음을 치는 타이밍, 옥타브 간격을 계산한 연기, 피아노를 칠 때 손목을 이용하는 릴렉스, 바운스 동작까지… 피아니스트의 동작을 섬세하게 똑같이 잡아내어 그냥 보기만 하면 진짜 피아노를 친다고 생각되게 만들어주는 그 연기. 정말 책임감 있는 연기라는 생각, 이런 게 프로페셔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극장 문을 나서며
이 작품의 관객들은 80퍼센트 이상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지팡이까지 짚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해리 코닉 주니어의 주 장르는 빅밴드와 스윙인데, 그 장르의 음악 팬들은 연령대가 높다.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을지언정, 멋을 내고 와서 좋아하는 스타를 보고, 끝나고 나서도 사진 찍으려고 리무진 앞에서 길게 줄을 서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 20대인 나도 해리 코닉 주니어의 팬으로서 함께 리무진 앞에 줄 서 있었다. 20대든 70대든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좋은 음악과 양질의 문화를 가진 것이 이 나라의 힘인가 싶었다. 그리고 좋은 음악은 이렇듯 나이를 막론하고 사람을 끌어당기고 행복하게 해주는 진실한 힘이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0호 2012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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