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의 정의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함께 있는 이를 웃게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좋은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웃게 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배우는 가장 좋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정상훈은 <스팸어랏>을 위해 다양한 웃음의 종류를 연구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웃음의 미학을 담기 위해서다.
그의 생각들을 찬찬히 듣다 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정상훈, 그는 참 ‘좋은 배우’다.
웃음의 미학
2010년 초연 이후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스팸어랏>. 정상훈은 초연 멤버였던 만큼 작품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 까닭에 웃음에 대한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초연 때보다 더 고민이 돼요. 포스터 슬로건이 ‘세상에서 가장 웃긴 뮤지컬’이거든요. 그런 만큼 관객들에게 웃음을 드려야 하잖아요. 제가 재미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크더라고요.” 그는 관객들에게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웃음의 미학을 작품에 담고 싶어 했다.
<스팸어랏>은 1960년대를 주름잡은 영국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톤의 여러 시리즈 중 <몬티 파이톤과 성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정상훈은 친한 동료 배우 정성화의 소개로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성화 형이 좋은 작품이 하나 있는데 같이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스팸어랏>? 이름이 생소해서 의아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롭더라고요. 오디션을 보려고 대본을 읽으면서 참 재밌고 독특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작 연습에 들어갔더니 국내 정서와의 차이 때문에 생각만큼 재밌지 않는 거예요. 처음엔 미궁에 빠졌죠.”
비논리적인 상황 전개를 통해 초현실적인 웃음을 끌어내는 몬티 파이톤의 유머는 영미 코미디계의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유머 코드를 전복시켰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초연의 화두는 몬티 파이톤의 유머를 한국화하는 것이었다. 랜슬럿 경을 비롯해 프랑스 성문지기, 니의 기사, 마법사 미미 등을 연기한 정상훈 역시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역할에 담았다. 한국의 욕과 프랑스어 느낌이 나는 단어를 합쳐 성문지기의 프랑스어를 만드는 등의 시도를 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멀티적인 면을 무대에 잘 녹여냈다.
정상훈은 이번 공연이 초연과 많이 다를 것이라 예고한다. “예전 작업이 몬티 파이톤의 코미디를 한국화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이전 것들을 부숴버리고 원작의 좋은 부분들을 살리면서 기본 작업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가 맡은 장면 역시 바꿨다. 프랑스 성문지기의 경우 욕을 많이 집어넣었던 초연과 달리 정치 풍자를 가미할 예정이다. “전보다 코미디를 더 많이 좋아하게 돼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제가 알게 된 에너지들을 작품에 다 쏟아붓고 있어요. 제 장면에 좀 더 독한 웃음들이 많이 들어갈 거예요.”
그는 웃음을 통해 관객들에게 뭔가 의미를 남겨주고 싶다는 바람을 이번 무대에 담았다. “웃음에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행복한 웃음도 있고, 귀여운 웃음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웃음을 작품 속에 담고자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나아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웃음도 전하려고 해요. 어머, 내가 저걸 보고 웃어야 돼?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게 독특한 웃음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그의 오랜 고민과 노력이 담긴 무대이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순수함과 경험이 빚어낸 특별함
정상훈의 유쾌한 매력은 무대에서 더욱 빛난다. 그는 객석에 웃음을 빵 터트리는 재주를 지닌 배우다. 특히 한 무대에서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극에 재미를 한껏 불어넣어 준다. <두 도시 이야기>의 바사드, <전국노래자랑>의 멀티맨 등은 조연임에도 그만의 특별한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다.
대체 그가 무대 위에 빚어내는 특별한 재미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그는 ‘순수함’을 지니는 것이 곧 웃음의 자산이라 이야기한다. “코미디는 일단 순수해야 해요. 순수해야 많이 웃을 수 있어요. 딱 다섯 살의 시선에 맞추는 게 가장 좋아요. 코미디를 짤 때 다섯 살 꼬마가 보면서도 즐거워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거죠.” 그는 다섯 살 아이도 행복할 수 있는 연기를 지향한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가 함께 배꼽을 잡으며 뒹굴뒹굴 웃을 수 있는 쉽고 순수한 코미디를 전하는 것이 그의 바람. “코미디 연극은 다양하지만, 코미디 뮤지컬은 많지 않잖아요.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은 독특한 코미디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고 이를 특화해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영특함이 엿보인다.
한편 그는 최근작 <어쌔신>을 통해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극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무엘 비크 역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끝없이 오르내리는 감정의 기복을 표현하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마음 수행을 위해 달마대사에 관한 책까지 읽으면서 선무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공연 직전에 15분 정도 명상을 하니 감정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죠.” 나아가 그는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황정민 배우에게도 많이 배웠다. 그는 애초에 황정민과 같은 배역에 캐스팅됐지만, 다른 배역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황정민 배우와 한 무대에 서서 그의 연기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민이 형은 공연이 끝난 뒤 술자리에서까지 끊임없이 작품 이야기를 해요.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을 몸소 느끼면서 저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연기의 내공을 쌓아 나가는 정상훈. 그는 경험이 주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해요. 그래서 연기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 시장을 많이 가 봐요. 전국 각지의 시장을 도는 거죠. 얼마 전에도 포항 중앙시장에 가서 멍게 한 접시 시켜놓고, 상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왔죠. 이런 경험들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그는 평소에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려 노력한다. 만남과 경험들이 차츰차츰 쌓여,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연기로 승화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영원히 행복한 배우
2001년 <가스펠>로 처음 뮤지컬 무대에 올랐던 정상훈. 어느덧 그의 무대 생활이 10년을 훌쩍 넘었다. 과연 그가 지금까지 뮤지컬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 답변은 ‘존재감’이었다. “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제일 행복해요.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하잖아요. 행복해지려면 계속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뮤지컬을 했을 때 칭찬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또한 그가 자랑하는 풍성한 인맥들도 뮤지컬을 통해 얻은 큰 자산이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얻게 됐죠. 사람은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좋은 연기를 못하거든요. 좋은 연기를 위해선 좋은 친분 관계가 바탕이 돼야 해요. 상대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 좋은 연기가 나오지 친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겠어요?”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친분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뮤지컬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다. “뮤지컬 때문에 제 부인을 만날 수 있었죠. 그래서 아들 한성이도 얻었고요.” 뮤지컬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얻었다며 활짝 웃는 그에게서 행복이 가득 묻어난다.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 환한 생기가 돈다.
결혼과 득남, 연이어 기쁜 소식을 들려준 정상훈의 삶엔 요즘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깐 철이 드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윤리나 도덕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는데, 이젠 무단 횡단도 안 해요.(웃음)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모든 것이 아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아내의 출산과 육아를 돕기 위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작명 책을 사서 직접 아들의 이름을 짓고, 좌우명까지 가화만사성으로 바꾼 그의 정성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정상훈, 그는 좋은 아빠임에 틀림없고, 이런 확신은 그가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에게 행복한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의 순수한 바람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의 활짝 웃는 얼굴만 떠올려도 금세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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