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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영 빅의 쇼비지니스에는 비즈니스가 없다 <애니여, 총을 들어라(Annie Get Your Gun)> [No.74]

글 |구지혜(런던통신원) 2009-11-09 7,103

낮은 하늘과 차갑고 스산한 런던의 바람이 유난스러운 올 가을, 웨스트엔드에서는 신나는 소식이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물론 <오페라의 유령2>의 내년 3월 공연이 확정 발표되면서 팬텀을 사랑하는 많은 관객들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금발이 너무해>를 비롯한 브로드웨이 흥행 뮤지컬들의 런던행도 주목할 만하지만 눈길을 끄는 신작 소식은 어쩐지 가뭄에 콩 나듯 하다. 이런 가운데 통속적인 사랑과 추억의 레퍼토리를 가진 고전 뮤지컬들이 낭만을 싣고 찾아오고 있다.

 

 

쇼 비즈니스의 세계를 그 유명한 노래 ‘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로 비유한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명작 <애니여, 총을 들어라(Annie Get Your Gun)>도 그중 하나다. 1946년 초연 당시 1,147번의 공연 횟수를 자랑할 만큼 대중들의 커다란 사랑을 받았던 이 작품은 벌린의 재치 있고 풍부한 음악과 가사, 허버트 & 도로시 필즈(Herbert & Dorothy Fields) 남매의 코믹한 대본으로 실제 오하이오의 명사수 애니 오클리(Annie Oakley)와 그녀의 남편 프랭크 버틀러(Frank Butler)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코미디의 고전이다.
 
명작의 가치를 지켜라!?
영 빅 시어터가 극장으로서 갖고 있는 최고의 장점은 극장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 초에 공연되었던 뮤지컬 <빈 소 롱(Been So Long)>이나 연극 <리어왕(King Lear)>처럼 제4의 벽이 허물어진 오픈 스테이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무대와 관객의 근접성이야말로 영 빅 시어터가 일반적인 웨스트엔드 극장의 프로시니엄 무대와 차별화 되는 점이다.
그런데 <애니여, 총을 들어라>는 영 빅 시어터 특유의 고도의 다각적인 측면과 시각적인 거리감의 유연성이 주는 무대의 최대 장점을 과감히(?) 던져 버렸다. 그 대신 답답하고 평면적이며 지나치게 옆으로 기다란 일자형 무대가 휑하니 놓여있었다. 1880년대라는 원작의 시대적 배경과 동떨어지는 1950년대 미국 극장식 영화관과 같은 느낌의 일자형 무대가 준 충격의 강도는 신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마치 여느 고등학교 학예회에 온 듯한 충격과 불편함 속에서 그래도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라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자형 무대의 2층에는 언젠가 열릴 것 같은 가건물 형식의 숨겨진 다락방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도 잠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통틀어 단 두 차례, 약 10여분간의 장면을 위해 쓰인 무대 위의 다락방은 거의 모든 관객들의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무대 디자이너의 실력을 의심케 하는 최악의 디자인이었다. 한술 더 떠서 기차 안에서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어설픈 컨베이어 벨트가 갑자기 천장에서 내려와 창 밖의 풍경을 재현하려고 했으니 한마디로 넌센스다.
 


물론 신선한 발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케스트라가 있을 법한 무대 아래에는 네 대의 피아노가 일렬로 놓여있었다. 어빙 벌린의 음악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비롯하여 192,3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선두주자답게 풍부한 오케스트라와 감미롭고 달콤한 멜로디를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그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단 네 대의 피아노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네 대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단선적이지만 정겨운 느낌으로 카우보이들의 무대인 작품의 옛스러움을 살리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대의 피아노가 만들어낸 일률적인 음악은 널빤지처럼 쭉쭉 늘어선 어설픈 일자형의 무대만큼이나 음악적 완성도를 떨어뜨림은 물론, 때로는 배우들의 가사 전달마저 어렵게 했다.
 
연출이 헷갈리면 관객은 더 헷갈린다.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쇼가 오하이오에 방문했을 때 이 쇼가 자랑하는 잘생긴 스타 명사수 프랭크 버틀러는 우연히 마을의 명사수 애니 오클리와 사격 시합을 하게 된다. 프랭크 버틀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애니는 시합에서 이기고, 프랭크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버팔로 빌의 제의를 받아들여 팀에 합류한다. 하지만 애니의 뛰어난 사격솜씨와 스타성은 상대적으로 프랭크의 명성을 떨어뜨리게 되고 상처받은 프랭크는 애니를 떠나버린다. 애니의 성공적인 유럽 투어에도 불구하고 버팔로 빌 쇼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프랭크의 포니 빌 쇼와 합병을 논의하게 되고, 프랭크와 재회한 애니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애니가 유럽투어 중 각 나라에서 받은 메달들이 프랭크를 또 다시 초라하게 만들며 쇼의 합병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고, 애니와 프랭크는 말싸움 끝에 마지막 사격 시합을 벌이기로 한다. 애니는 기지로 시합에서 프랭크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결국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연출가인 리차드 존스(Richard Jones)는 주로 오페라를 연출해왔다. 하지만 올 여름 영 빅 시어터에서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인상적으로 선보였고, 작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제인 호록스(Jane Horrocks)가 이번 프로덕션에서 애니 역할을 맡아 BBC를 비롯한 언론과 극장 관계자들이 많은 관심과 기대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애니여, 총을 들어라>는 연출력의 능력을 판가름하기 이전에 그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여부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대적인 배경을 마구 뒤섞어 놓았다는 데 있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인 애니는 미키 마우스의 모습이 찍혀있는 셔츠를 입고 있다. 분명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는 거의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꽤 오랫동안 사랑받는 미국적 캐릭터이지만, 분명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 이러한 의도적 시대적 불일치는 공연 여기저기서 나타나는데 애니 오클리가 사격수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후 전 세계 투어를 돌며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간디,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을 만나게 되는 일련의 프로젝션 스크린에서 그 의도가 분명해 진다. 게다가 생뚱맞게 무대 위 풍경은 1950년대다. 존스는 고의적으로 이 모든 시대적 불일치를 계산하고 이렇게 뒤섞어 놓은 것일까?

 

‘완벽한 재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재현을 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재현은 이미 원래 형태가 가지고 있던 재현 그 너머의 범주에서 재현되고 만다’는 들뢰즈의 예술에서의 재현의 불완전성은 완벽하게 오리지널과 일치할 수도 또 그럴 당위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고전 명작이 여러 유명한 연출가들에 의해 시대적 배경을 달리해서 작품의 새로운 면이 부각되어 새로운 가치가 부각되고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니여, 총을 들어라>는 ‘어떻게’ 재현할까 하는 방법론보다 ‘무엇을’ 재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극 중 인물들의 불분명한 아이덴티디에 있다. <애니여, 총을 들어라>는 1800년대 후반 미국 개척기 사회가 문명화되어가는 모습을 재현하고, 당시 미국 사회가 바라는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해 짚어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주인공 애니와 프랭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애니여, 총을 들어라>를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는 인물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색채가 아주 흐렸다. 마치 정체를 잃어버린 무대의 복잡한 시대성처럼. 그중에서도 인디언 캐릭터들을 바보스럽고 유치하게 그린 점이 특히 눈에 거슬렸다. <애니여, 총을 들어라> 속의 인디언들은 어설픈 인디언 ‘흉내내기(Mimicry)’ 이상의 문화적 이슈를 담고 있음을 망각한 듯 무채색의 불투명한 인디언과 백인과의 관계 설정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노래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름다운 거라고.
시종일관 관객들을 실망시킨 이번 프로덕션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됐던 것은 주연 배우들의 열띤 연기였다. 특히 애니 역을 맡았던 제인 호록스가 눈에 띄었는데 그녀는 TV, 영화, 무대를 넘나드는 풍부한 연기 경험의 베테랑 연기자다. 마흔이 넘은 관록의 연기자이지만 그녀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어린 애니 오클리로서 열연을 펼쳤다. 비록 그녀의 명확하지 않았던 미국식 지방 사투리가 냉정한 평가를 하기 좋아하는 영국의 뮤지컬 전문가들에겐 예상 밖의 부진이었을지 몰라도 동안의 ‘누나’들이 사랑 받는 요즘 시대에 상큼한 제인 호록스의 애교 넘치는 연기와 소프라노 노래는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편 뮤지컬 <마가릿>의 주인공을 연기하기도 했던 상대역 프랭크 버틀러 역의 줄리안 오벤든(Julian Ovenden)은 본래 프랭크 역에 요구되는 낮은 음색보다 다소 높은 목소리 톤이 아쉽기는 했지만,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부드럽게 매력적으로 극 전체를 무리 없이 이끌었다.
하지만 광활한 영 빅 시어터의 무대를 버리고 좁은 공간에서 연출된 이 뮤지컬이 결국 제대로 된 안무가 수반되지 않아 배우들이 자신의 끼와 재능을 100% 발휘하지 못한 사실은 많이 안타깝다. 리드미컬한 어빙 벌린의 음악들에 배우들이 그저 서서 손짓과 눈빛만으로 그들의의 노래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자형의 작은 무대에서 춤마저 제대로 추지 못하고 힘겹게 움직이는 배우들이 어쩐지 안쓰럽기까지 한 것은 왜일까? 작은 무대 공간,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던 걸까?
작년 런던의 소극장인 유니온 시어터(Union Theatre)의 <애니여, 총을 들어라>와 사뭇 비교가 되는 지점이다. 유니온 시어터의 프로덕션은 영 빅 시어터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서 몇 개 안 되는 최소한의 악기들로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원작이 주는 참 맛을 너무나도 잘 살려냈다. 그리고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애서 관객들이 무대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무대의 크기와 프로덕션의 규모 등은 공연의 질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저 무대 위 배우들도 지금 느끼고 있을까? 대답 대신 애니와 프랭크는 (사랑에 빠지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며) ‘They Say It`s Wonderful’를 노래할 뿐이다.
 


애니가 잡지 못한 한 가지
쇼 비즈니스만큼 냉정한 세계가 또 있을까? 쇼에 필요한 간단한 소품 제작부터 공연에 관계된 수많은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뮤지컬과 같은 쇼비지니스는 철저한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다. 게다가 작품에 쏟은 노력과 작품성, 투자 금액과는 별개로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오페라의 유령>처럼 어쩌다가 관객들의 눈에 들면 몇 십 년간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며 로또 당첨보다 더 큰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지만,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지고도 공연이 올려졌는지 쥐도 새도 사람도 모르게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도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세계가 쇼 비즈니스계인 것이다. 노래와 춤, 드라마와 인생이 공존하고, 배우들과 제작자들의 피와 땀의 노력은 커튼 뒤에 가려진 채, 관객들의 냉엄한 판단에 의해서만 살아남을지 죽을지 결정되는 비정한 세계.
안타깝게도 이번 영 빅 시어터(Young Vic Theatre) 프로덕션의 <애니여, 총을 들어라>는 한마디로  ‘쇼 비즈니스란 이런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을 만큼의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조만간 냉정한 쇼 비즈니스의 세계를 경험할 것 같다.
 
2010년 1월까지 공연 예정임

 

본 기사는 <더뮤지컬> 통권 제 74호 2009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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