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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한영범 [No.113]

글 |이민선 일러스트레이션 | 권재준 2013-02-13 4,382

여신님, 도와주세요 부탁 드려요!

 

무인도에서 백 일을 동고동락했던 여섯 명의 군인들은 각자 갈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쉬워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으로선 쉬이 가늠할 수 없습니다. 같은 곳을 향할 수 없는 현실만 또렷이 알 뿐.


* 이 글은 한영범을 연기한 배우 최호중과의 대화를 기초로 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이창섭 일행이 떠나간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말도 마세요, 착잡합니다.

 

그들은 원했던 북조선 고향으로 향했고, 당신들은 여기 남아서 구조를 기다릴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같은 전시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그들이 무사히 이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여기 남아 있다간 포로수용소로 끌려갈 테니 가는 걸 붙잡을 수도 없고, 제가 뭐라 말할 수 없었어요. 어쩐지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슬픈 생각이 듭니다. 부디, 그들도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아, 이러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울컥하네요.


처음 그들을 만날 때만 해도 그들과 헤어지는 마음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럼요, 만남 자체가 싫었죠. 포로 이송 명령을 받고 처음 창섭이 형을 봤을 때 겉으론 강한 척했지만 속으로 엄청 쫄았습니다. 인상도 진짜 무섭잖아요. 전 사무실에 앉아 행정 업무나 보는 걸 좋아했는데, 어쩌다 험한 수송 업무를 맡아서 무진장 짜증났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야외 업무는 딱 질색이거든요.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죠. 예상치 못한 난파로 무인도에 고립되다니요.
제가 이런 뒤숭숭하고 혼란한 시대에 군대에서 12년간 짬밥 먹으면서, 손바닥 비비고 요리조리 몸 사려가며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든 헤쳐 나갔는데 말입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막막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니까요.

이런 분이 어떻게 대위까지 해먹게 되셨습니까.
아,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전쟁의 한가운데, 군대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그럼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제가 진급을 좀 빨리 했어요. 제가 일 처리를 잘하기도 하지만, 실제보다 좀 더 능력 있어 보이기도 하거든요, 허허. 전 뭐 군인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장교로 바짝 목돈 벌어서 얼른 제대하려고 했죠. 나가선 장사나 하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인생이 꼬여버렸지 뭡니까.


그래도 꼬인 인생 푸는 것 전문이시지 않습니까. 여신님까지 불러들이셨으니 말이죠.
살아서 딸을 만나려면 배를 고쳐야 하는데 어떡합니까. 얼토당토않게 부하인 석구가 배를 고칠 수 있다고 뻥까지 쳐놨고, 못 고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조종수 순호를 어떻게든 구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거죠. 제 생각에, 공부는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지만, 이 두 가지는 타고나는 거라고 봅니다. 예술적 재능과 처세술. 제가 또 처세의 달인 아닙니까. 타고난 센스가, 크!


그래서 섬이 예쁘니 섬 주인 어쩌니,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으신 겁니까?
거짓말이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며칠 무인도에서 지내다 보니 저절로 핀 꽃이며 우거진 숲을 보니, 게다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보니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자연에서 희망의 빛도 함께 본 것이지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죠, 여신님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순호가 먼저 말한 겁니다. 네,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 여하튼 ‘여신님이 보고 계셔’ 작전으로 지내기가 편해진 건 사실이에요.
가장 중요한 건 심리적으로 안정됐다는 거죠. 이창섭을 비롯한 북한군들이 날 죽일 것 같았는데, ‘어라? 이 사람들도 내 말을 믿어주네? 어, 이들도 조금씩 웃네?’ 그러니 제 잔머리는 더 빨리 움직인 거죠. 어떻게 하면 저들을 내 편으로 만들까 하고요. 여신님이 좋아하실 거란 명분으로, 먹을 것은 나눠 먹자, 깨끗이 씻자, 싸우지 말자, 그런 규칙도 만들었습니다. 오호, 잘만 되면 서둘러 배를 고친 후에 내가 먼저 타고 나갈 수 있겠다! 빛이 보였달까요.


처음에는 배를 고치는 게 작전의 목적이었지만, 차츰 서로를 의지하게 된 건 참 신기한 일이에요.
철저히 경계하는 사이였는데, 우리가 그러리라곤…. 사람이라곤 우리뿐이니 서로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밤이면 모여 앉아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어렸을 적 이야기, 가족 이야기, 언제 즐거웠고 또 슬펐는지…. 아, 얘기를 나누다보니까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더라고요.


한 대위님은 딸 자랑, 많이 하셨고요?
에이, 뭐, 조금. 제가 이래 보여도 시시콜콜 제 이야기 늘어놓는 성격은 못 됩니다. 남의 얘기를 더 잘 들어주죠. 한참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잠들기 전에 혼자 딸애 사진을 꺼내 보곤 했죠. 제 딸, 보여드릴까요? 저 닮아서 예쁘죠? 흐흐. 애교도 많고 잘 울지도 않아요. 딸을 생각하면 꼭 돌아가야 한다, 얼른 이 섬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되새기게 됐어요.


류순호와는 남다르게 통하는 데가 있었던 것 같던데요.
순호를 처음엔 완전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녀석 알고 보니 속이 깊었어요. 어쩜 여신님이 아니라 순호가 우리를 바꾼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또, 촉이 좀 좋지 않겠습니까? 딱 보니, 이 녀석 가끔 낌새가 이상하더라고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살짝 의심도 되고요. 제가 남몰래 여기저기 뒤져보고선 순호의 뜻을 알게 됐죠. 에이,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 모두 이젠 서로를 탓하지 않아요.


하지만 몰래 구조 요청한 건 후회하지 않나요?
엄청 후회했죠. 백 일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함께 지냈던 사람들인데, 미안함이 너무 커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이게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지난 백 일간의 일들, 정말 잊을 수 없겠죠?
정말 평생,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 추억이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굉장한 사건임에 틀림없죠. 제가 나중에 이곳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면, 다들 뻥이라며 안 믿겠죠. 예, 제가 워낙 말재주가 좋고 허풍이 심하니까요, 흐흐. 아무도 믿지 않은들 어떻습니까. 그들이 진정 보고 싶을 겁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3호 2013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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