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재가 주는 기대
듣기만 해도 호기심이 생기는 소재가 있다. 뮤지컬 <아가사>의 소재가 그렇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름이 제목인 것으로만 보자면, 그동안 나왔던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팡이 연관 검색어로 떠오를 터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아가사>는 이전의 추리 소재 작품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일단 홈즈와 루팡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이들은 완벽하다. 그들에게 설사 결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낸다! 하지만 <아가사>의 주인공은 작품 속의 탐정이 아니라 바로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작가이자 현실 속의 인간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써낸 그 숱한 작품을 뒤로 하고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 자체를 소재로 삼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1926년에 아가사 크리스티가 실종됐던 적이 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죽은 줄로 알았단다. 그런데 열흘 남짓 후 인근 호텔에 남편 내연녀의 이름으로 머물고 있던 아가사를 발견했을 때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천천히 기억을 찾기는 했지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죽을 때까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이게 실화란다. 오, 어쩜 이렇게 극적인 일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부터도 막 궁금해진다.
이런 이야기에 창작자로서 의욕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자, 독자가 풀 수 없는 가상의 수수께끼를 만들어내던 추리작가의 실제 삶에, 작가 스스로도 밝힐 수 없는 수수께끼가 생겨났다. 그 수수께끼의 전말은 무엇일까?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는 끝까지 그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까? 감추려는 게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을? 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실화를 소재로 잡는 순간 이제부터 창작의 형식을 빌려 진짜 추리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뮤지컬 <아가사>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삶을 재료로 삼아 새롭게 전개되는 추리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노선을 정해야 한다. 사건 밖의 관찰자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아님 사건 안의 당사자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이걸 결정하는 건 좀 중요하다. 그것은 추리물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추리란 기본적으로 범죄와 연결된 장르인 바, 사건이라는 표면에 숨겨진 인간내면의 어둠을 파헤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추리 장르가 심리극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광명한 이성의 세계다. 어둠은 이성적 논리의 성육신인 탐정에 의해 결국 정복되고 만다. 파악할 수 없는 공포는 결국 명쾌함의 안전지대에서 해체되는 법. 추리물은 이 두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러니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즉 탐정으로 대표되는 ‘전체를 파악하는 시선’을 강조할 것인지 아님 사건의 당사자라는 ‘어둠에 휘말린 인간’을 강조할 것인지에 따라 추리물은 탐정물이 될 수도 있고 심리물이 될 수도 있다. 인간 본성을 향한 깊은 이해와 사건을 극단까지 밀고 가는 상상력.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발견하는 재미야말로 추리물이 독자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장르불문.
소재에 지배당한 <아가사>
뮤지컬 <아가사>도 이 두 요소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의 시작은 탐정물에 가깝다. 극의 중심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종이라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 아가사와 우정을 나눴던, 지금은 작가가 된 소년탐정의 회고 속에서 아가사의 실종을 둘러싼 숨겨진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그중 가장 충격적인 진실의 주인공이 바로 아가사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아가사의 실종이라는 사건에서 아가사의 내면이라는 심리적 정황으로 바뀌어버린다. 사건의 당사자인 아가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은 추리극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심리극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뮤지컬 <아가사>는 추리와 심리를 연결하는 데 너무나도 미숙하다. 우선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중심적인 인물이 누구인지 분명치가 않다. 극은 어렸을 적 아가사의 실종을 직접 지켜봤던 청년이 그 진실을 파헤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진실을 파헤치는 방법이 뭐냐. 아직 생존해 있는 아가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거다. ‘그때의 진실을 알려주세요.’ 어머나. 뭔가 미스터리한 사건의 냄새는 잔뜩 풍겨놓고 풀어내는 방법은 이렇게 싱겁다니. 그런데 더 김새는 건 그 질문에 아가사가 냉큼 대답을 한다는 거다. ‘너와 난 연결되어 있어. 하지만 기억을 꺼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할 수 있겠니?’ (극에서 아무런 사건도 전개되지 않았는데 첫 대사부터 이런 식이라니. 이건 정녕 스포일러다!) 이때부터 극의 화자는 청년에서 갑자기 아가사로 바뀌어 버린다. 제3자의 기억이라는 틀에서 당사자의 경험이라는 틀로 극의 경계를 바꾸는 극작의 기술이 영 볼품없다.
극작의 서툰 면모는 이야기를 배치하는 방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사건과 내면이 분주하리만큼 정신없이 섞여 있다. 도대체 어디가 시공간의 경계인지, 이야기의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알아먹기가 쉽지 않은 거다. 그렇다보니 사건의 전개를 통해 관객이 알아채야 할 부분을 자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작가의 조바심이 도드라질 수밖에. 열쇠구멍으로 상징되는 추리의 본질은 무엇인지, 눈앞의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 청년의 기억상실이 실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까지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다. 추리의 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여기에 있지 않던가. 이 작품에 추리극 다운 면모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하긴 애초에 <아가사>의 관심은 추리의 긴장보다 심리적 갈등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심리적 갈등이라는 것이 영 재미가 없다. 이 작품에서는 아가사의 실종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의 심리적 배후를 죄책감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살인을 소재로 삼는 작가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질문은 적잖이 흥미롭다. 하지만 그 흥미를 잇기에 극 속의 대답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삶의 불행이 불러오는 배신감(친구라고 믿었던 소년은 원고를 빼돌리고 남편은 유모 딸과 바람났고 엄마 같던 유모는 ‘내가 니 에미로 보이냐’, 갑자기 돌변한다), 배신감이 불러일으킨 분노, 그 분노를 실행하고 싶은 욕구로서의 살인. ‘지킬 앤 하이드’ 기법은 이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자 극의 커다란 반전의 장치로 활용된다. 하지만 하이드처럼 실제로 뛰쳐나가 일을 벌인 것도 아닌데, 단지 자기 안의 불온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만으로 자기 자신(자기 분신도!)을 죽이려고 드는 아가사의 동기는 도덕적으로는 숭고할지 모르겠으나 심리를 파고드는 극적인 파국을 기대하는 관객의 시선에서 볼 때 고개를 크게 끄덕일 만큼의 상상력은 아니다. 심리극으로 보기에는 인물들을 움직이는 욕망이 너무 단순하고 약하다. 반전이 거듭돼도 맹숭맹숭, 긴장이 쌓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단지 극작에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뮤지컬로서의 문법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도록 꾸며졌음에 무척 아쉽다. 대사와 노래가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일 게다. 한 장면에서 배우의 대사에 따라 갑자기 바뀌는 음악의 분위기도 느닷없고, 모든 장면전환이 암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근래 보기 드문 무대연출도 놀라왔거니와, 미로가 됐든 아리아드네의 빨간 끈이 됐든 심인성 기억상실증이 됐든 말만 나왔다 하면 영상으로 쏴주는 설명과잉의 무대영상과 함께, 창의적인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안무는 극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에서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무능했다.
여러모로 아쉽다. 많은 이야기와 상상력의 가능성을 품은 멋진 소재가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독이 돼버렸으니 말이다. 실화의 흥미로움을 창작의 상상력이 따라잡기는커녕 도리어 거기서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다. 하지만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창작의 의욕은, 그것이 성찰을 동반한 지속성으로 이어질 때, 언젠가 결실을 맺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가사>는 앞으로의 창작 작업에 분명 약이 될 거다. 분명 그럴 거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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