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리뷰] 뮤지컬이 된 <왕세자 실종사건>, 그 갈 길은? [No.87]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사진제공 |극단 죽도록달린다 2010-12-24 5,112

대표적인 ‘서재형 표’ 연극인 <왕세자 실종사건>(한아름 작, 서재형 연출)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작품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뮤지컬이 될 만한 연극을 고를 때에 그 기준은 (구성을 포함한) 내용이다. 흔히 뮤지컬에서 많이 다루는 이야기, 그런 인물과 사건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노래가 들어갈 만한 여지가 있는가, 뮤지컬에서 많이 써왔던 음악을 노래로 만들어 넣었을 때에 그 작품과 잘 어울릴 것인가 등의 문제를 점검하게 된다. 그런데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의 독특함은 이러한 내용적 측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에서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내용적 측면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권력 암투만이 존재하는 험악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구동이가 보여준 자숙이에 대한 지고지순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왕세자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건은 그와 무관하게 전개된다는 점에서 전달되는 세상사의 비정합성과 아이러니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지점 모두,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는 하기 힘들며, 만약 이 두 가지의 내용적 측면을 작품의 초점으로 삼았다면 이 연극은 실패한 것이라 보아야 했다. 첫째, 왕비의 시녀로 궁에 들어간 자숙이를 그리워하다가 내관이 되어 그녀를 돌보아주는 구동이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초점이었다고 한다면, 이 연극은 매우 구태의연한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애인 따라 내관 되는 이야기는,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영화 <내시>에서 1980년대 이두용 감독의 <내시>로 이어졌고, 몇 년 전에 드라마 <왕과 나>에서까지 지겹도록 우려먹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중극도 아닌 본격 연극에서 이런 뻔한 사랑 이야기만을 하고 만다면 낙제점을 받아 마땅하다. 본격 연극이라면 모름지기, 남들이 다 해놓은 뻔한 인식과 감정을 뛰어넘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좀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작품이어야 한다. 둘째, 세상사의 비정합성과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연극은 실패이다. 세상사의 비정합성과 아이러니 자체가 주제였다면, 이 주제를 좀 더 정교화하는 여러 장치와 구성이 필요했으나,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주요 사건 두 가닥을 미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이런 주제가 형상화되지는 않는 법이다.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이 돋보였던 것은, 이런 내용적 측면이 초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무대와 배우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콤비의 첫 작품이 <삼총사>를 저본으로 삼은 <죽도록 달린다>였고, 이후 이를 자신들의 극단 이름으로 삼았다. 이 이름만큼 이들은 배우들을 죽도록 달리게 만든다. 배우의 몸을 끊임없이 격렬하게 움직이게 하고 그 움직임으로 무대의 역동성과 연극성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배우의 몸이 가장 중요하므로, 공간은 가능하면 비워놓는다. 텅 빈 공간은 배우들이 움직임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된다. 움직임의 격렬함 자체가 관객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거니와, 그 움직임이 어떤 규칙에 따라 이루어짐으로써, 텅 빈 공간이 뭔가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죽도록 달린다>에서는 공간 운용 방식에 비해 몸의 격렬함이 돋보였다면,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에서는 바둑판처럼 구획 지워진 삼면 무대를, 어떻게 수시로 자르고 봉합하면서 시공간을 짜맞춰 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여태까지 우리 연극이 벗어나지 못했던 일면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의 어법을 과감히 해체하면서도 매우 논리적이면서 정교한 시공간의 운영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돋보였고 뛰어났다. 왕세자를 찾는다는 추리의 구조와, 감출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금기의 사랑은 물론, 그 초점에 놓인 등불이자 살구이자 구동의 잘려진 양물(陽物)인 주황색 동그라미 소품의 미니멀한 설정까지 모두, 몇 개의 시공간을 수시로 분절하고 재접합하면서 기존의 무대 공간의 문법을 해체·재구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자, 이제야 비로소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을 이야기할 차례인데, 생각이 이즈음에 이르면 도대체 이 연극을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연극의 핵심 중 배우의 몸에 대한 역동적이고 연극적인 운용은 뮤지컬에서도 재현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시공간의 분절과 재접합 같은 측면은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매우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뚜껑을 열어본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은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우선 배우들을 ‘죽도록 달리게’ 만들어 몸의 연극적 표현을 극대화하고 공연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뮤지컬에서도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상당히 신선했다. 또한 본격 연극에서도 다소 독특했던 연출의 무대 운용 방식은, 뮤지컬로 만들면서 매우 단순화하고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로서는 매우 신선하고 창의적인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형 무대 미술에 의존하는 뮤지컬의 스펙터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표현이 극대화되는 빈 공간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구동이와 자숙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뮤지컬로 옮기니 오히려 빛을 발했다. 이런 사랑 이야기가 연극의 관행에서는 구태의연한 것이었지만, 대중적 공연물인 뮤지컬의 관행 속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음악이었다. 물론 뮤지컬의 관행으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음악에서도 신선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 뮤지컬의 음악은, 극 전체를 따라가는 음향 효과 차원의 기악 연주, 아리아라고 할 만한 노래답게 만들어진 넘버, 그리고 극적 대화를 노래화한 레치타티보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타악기를 중심으로 하여 극의 긴장과 이완 등의 흐름을 연주로 적절히 도와주는 음악은, 뮤지컬에서는 낯선 것이지만 이미 연극 등에서 많이 써온 방식이며, 특히 창극이나 마당극 등에서는 매우 익숙한 것이다. 노래를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나누어 쓴 것은 오페라의 관행을 빌려 온 것인데, 모든 대사를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처리하는 일반적인 오페라에 비해 아무래도 대사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이 작품에서는 그 배치가 아주 매끄럽고 일관성을 지녔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서정적이고 예쁜 아리아, 가끔 스케일이 큰 극적 페이소스를 지닌 선율 등을 구사한 작곡이 돋보였다.


이보다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음악의 전반적인 방향이 이 뮤지컬이 지닌 짜임새와 그 질감에 걸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시공간을 수시로 분절하고 재봉합하는 이 작품이 지닌, 다소 현대적인 질감에 비해, 음악은 그 기조를 지나치게 평범하고 대중적으로 설정했다는 흠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각각의 장면의 정조와 인물의 감정을 충실히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으나, 우연과 비정합성, 해체·재구성으로 요동치는 비고정적 세계를 표현하는 작품 전체의 현대적인 질감과 어울리지 못하므로, 극의 전체 느낌은 물론 음악조차 돋보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뮤지컬을 처음 만드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습작의 티, 즉 연극적 장면을 노래로 반복하면서 음악이 극의 속도와 리듬감을 해치는 현상도 여전히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러한 음악의 문제들은, 작곡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작가·연출·작곡이라는 이 작품의 핵심 창작자 셋이 함께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과연 이 작품에서 음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기본 컨셉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옳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음악을 매우 단순한 기능으로 부리고 있는 뮤지컬이고, 그 방식조차 능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뮤지컬이 보여준 성과는 오로지 연극에서 성취한 성과에 머물게 되었다. 연출적 발상이 작품 전체를 끌고 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의 최고 통제탑은 바로 연출자일 터인데, 작품의 결과를 놓고 보자면 그 통제탑이 <왕세자 실종사건>에서 음악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욕구를 별로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고 싶어졌을까. 실종된 왕세자보다,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7호 2010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