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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쓰릴 미> 발견하는 재미에서 확인하는 재미로-세련된 통속(通俗)의 두 가지 갈래길 [No.87]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뮤지컬해븐 2010-12-14 4,968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서 <쓰릴 미>가 멋진 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읽었다. 최단 시간에 최다 관객을 동원한 소극장 뮤지컬이라더라.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4만 명이 넘는 관객이 이 공연을 관람했고 객석 점유율은 95%를 넘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초연된 이후 매번 승승장구하며 올해 6개월에 걸친 장기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쓰릴 미>는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흥행 뮤지컬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뮤지컬의 관극 문화가 작품 위주에서 팬덤 위주로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작품 자체의 저력이 없이 이런 호응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이 작품의 어떤 면모가 관객들의 마음을 그렇게 끌었던 걸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의 대중성이다. 실화인 소재 자체의 아우라에 동성애와 살인, 방화 등의 어둡고 음습한 통속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시선을 끈다. 그 이유에 ‘소재가 자극적이라서’ 라는 진부한 수사를 붙이지는 말자. 살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동성애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격문을 쏟아내긴 했지만, 이제 TV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해도 낯설지 않을 만큼은 됐지 않았던가. 이제 이런 소재는 자극적이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소재 자체보다는 그 소재를 끌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에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사건일수록 극적으로는 은폐된 구조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드러나게 되는 과정은 세련된 드라마투르기를 통해서만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법이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나’와 ‘그’의 욕망은 강해지고, 서로의 욕망이 대결할 때 심리적 흐름은 더 격렬해진다. 거기에 반전까지 더해진다면? 이런 이야기는 지루해지기가 오히려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멋스럽게 살린 데에는 무대의 언어도 크게 일조했다. 두 명의 배우, 거의 비어있는 무대, 무대 한편에 놓인 피아노 한 대. 참으로 간소하다. 이런 구성이라면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배우의 몫이라는 얘기다. 배우가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지는 무대가 오히려 익숙한 요즘, 배우의 존재 자체로 극적인 힘을 얻는 공연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배우의 연기를 이야기할 때 피아노의 역할도 빼놓을 순 없다. 피아노는 극의 음악을 이끌 뿐 아니라 연출의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극의 속도와 긴장을 직설적으로 풀어놓는 또 하나의 배우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이끌면서 대사와 호흡을 같이하는 음악은 자연스러운 배우의 말이 된다. 또한 배우와 피아노가 어우러져 자아내는 심리적 긴장은 무대 위의 시공간으로 새롭게 번역되었으니, 이때 간소한 무대는 충분히 기능적이어서 서사적인 공간 연출의 기민함을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최소한의 조건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세련됨. 두 시간 동안 관객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넉넉한 자본과 걸출한 스타가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와 공간의 상상력 그리고 기능적인 음악임을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런 작품이 관객에게 전폭적인 인정을 받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자칫 소수의 취향에 그칠 수 있는 면모가 적잖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점을 뒤집어 뮤지컬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전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뮤지컬만의 멋스러움을 발산하고, 뮤지컬의 배우는 노래하는 이일 뿐 아니라 연기하는 이임을 상기시켜주며, 음악이 이야기에 어떻게 색깔을 입히는지 잘 보여주는 공연이라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게 어디 있으랴. <쓰릴 미>는 일단, 그런 작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대중의 취향을 거쳐 검증된 작품.

 

 

 

 

 

 

 

 

 

 

 

 

 


그런 면에서 볼 때 <쓰릴 미>는 세련됨과 통속성을 동시에 갖춘 드문 공연이다. 혹시 통속이란 말이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속에서 저속함이라는 선입관을 벗어낸다면 세상(俗)과의 소통(通)이라는 예술적 덕목을 발견할 수 있는 바, <쓰릴 미>는 대중극의 미덕을 제대로 증명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관객이 두 번 세 번 이 작품을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관객은 두 배우가 그려내는 ‘나’와 ‘그’의 극적 긴장과 전환의 묘미, 그리고 연기적 해석을 보고자 한다. 이런 관객의 욕구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쓰릴 미>는 새로운 배우, 특히나 연기하는 배우를 발굴하는 탁월한 작품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런 미덕은 이미 이 작품을 거친 몇 명의 배우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말이다. 관객의 욕구가 매번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대중성의 함정이 있다.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것’이 오히려 작품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쓰릴 미>는 배우의, 배우에 의한, 배우를 위한 뮤지컬이다. 배우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입체감과 깊이가 달라지는 섬세한 작품인 것이다. 관객이 이 작품에 열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다. 여러 조합으로 페어가 구성된 데는 물론 장기 공연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관객에게 ‘골라먹는 재미’를 선사하려는 목적도 없지는 않았을 거다. 이로써 관객은 각각의 페어를 비교하는 재미를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작품이 가진 재미의 결은 달라져버렸다. 배우가 됐건 이야기가 됐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재미’에서 ‘익숙한 것을 확인하는 재미’로 그 축이 바뀌게 된 것이다.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려는 의지가 새롭게 작품을 해석해내려는 의지보다 강해지는 순간이다. 이때 자칫하면 배우의 연기를 배우의 그림으로 바꿔 버리는 손해나는 빅딜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거래는 분명 유혹적이기는 해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그러다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덕목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이 작품에 몰리는 이유 중의 하나인, 무수히 많은 페어의 공연은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배우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면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선택에 따른 복불복이지 무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아닌 셈이다. 억울한가? 다른 페어로 또 보시라. 이러한 메카니즘 속에 과거부터 쌓여온 작품의 명성은 좀처럼 훼손되지 않는다. 옳지 않다.

 


그래도 아직, <쓰릴 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피아노 조율이 덜 돼있어도, ‘슈퍼맨’이라는 말에 니체의 ‘초인’이 아니라 타이즈 위에 팬티 입은 클라크 켄트를 떠올리며 어색했어도, 관객의 시야에 대한 연출적 배려가 별로 없어 보이는 배심원석을 굳이 무대에 올린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해도, 이 작품을 만끽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건 순전히 작품 자체의 힘이다. 새로운 배우를 발견하는 것이든, 감정의 흐름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든, 배우의 달라진 연기를 보는 것이든, 이 작품이 품을 수 있는 재미는 옥시글옥시글하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선 관객의 요구를 때때로 배반해야 할 거다. 관객의 사랑과 작품의 깊이를 둘 다 잡기 위해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역설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7호 2010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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